1970년대 충무로. 산업화도 매니지먼트도, 시스템이라곤 전무했던 전근대적인 영화 환경. 반정부적이거나 미풍양속을 해하는 영화는 철저히 검열의 대상이 되었던 그때. 제약은 있지만 규칙은 없었던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려움 속에서 창작자의 열정은 더 비대해진다. 악평과 조롱 속에서도 ‘결말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나올 거라 믿고, 자신의 환상을 감행하는 난장판 현장 속의 감독 김열. <거미집>이라는 영화의 영화 속 감독 김열은 그 시대의 에너지와 아이러니를 그대로 담은, 다시는 불가능한 지난 시대의 창작 메커니즘 속 존재했던 멸종된 공룡일지도 모른다.
송강호가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 이어 근작 <밀정>(2016)까지 송강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획인 김지운 감독과 다시 뭉쳤다.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책임지는 감독들을 해부할 때, 반드시 가져야 할 ‘열쇠’인 송강호는 한국영화의 산업화, 모더니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 길을 개척해 온 배우다.
자신의 전 세대인 1970년대 현장을 향한 ‘리스펙’을 통해 그는 지금은 바뀐 영화 환경 안에서 창작자의 고충에 한발 다가가,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가 준 공기가 무엇인지 애써 발설한다. 블랙코미디의 소동극 속, 광기와 에너지를 장착한 감독 김열로 분한 송강호를 만났다.
김지운 감독을 비롯해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열며 활동해 온 감독들과 꾸준히 작업해 오고 계신데요. 그중 ‘감독 김지운’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잘 아시겠지만, 워낙 영화적인 장르의 변주를 통해 새로운 영화를 찍어오신 분이니까 일단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감독이죠. 제가 여러 인터뷰에 영화 여행을 떠난다는 표현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김지운 감독님과도 어떤 여행을 떠날까 하는 좀 설레는 게 있어요. 그래서 두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이번에는 또 어떻게 괴롭힐까 이런 생각도 드니까. (웃음) 그래서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어쨌건 설레는 마음이 더 크죠.
김지운 감독과의 작품 안에서 ‘배우 송강호’의 캐릭터를 점검해 본다면, 최근작 <밀정>의 일본 경찰 이정출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 장르에서 무게감 있는 역할이었다면, 이번 감독 김열은 블랙코미디 장르 안에 위치하고 있어요.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 같은 초기작이 연상되는데요.
<조용한 가족>을 한 지가 벌써 25년 됐네요. 그리고 <반칙왕>을 비롯해 그 시기에 찍었던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하면서 그때 현장에서 느꼈던 어떤 것들을 이번에 촬영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촬영 때도 장영남, 전여빈 배우와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요. 과거 배우들끼리 앙상블을 맞춰가면서 이렇게 막 열정적으로 촬영했던, 그 설레고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 많이 오더라고요. 물론 이후의 작업도 다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가 있지만, 배우들끼리 어떤 앙상블을 맞춰가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느낌은 확실히 <조용한 가족> <반칙왕> 때 경험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그간 투자 환경, OTT 플랫폼의 등장 등을 거치며 '스스로 변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는데요. 배우 입장에서 볼 땐 이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시나요.
이제는 영화를 예전처럼 찍을 수 없는 환경이 됐죠.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 아주 철저하게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아예 촬영을 못 하는 거죠. 과거와 비교하면 모두가 거의 베스트로 준비된 상태에서 첫 테이크부터 해야 해요.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없는 단점은 있지만, 시간과 자본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이 시스템이 훨씬 더 장점이 크죠.
많은 작품을 경험해 왔는데, 그렇게 ‘다시 찍어야 했던’ ‘집요했던 장면이 기억이 나실 텐데요.
어떤 작품은 8번도 재촬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작품이었나요. (웃음)
그건 말씀 못 드리고요. (웃음) 그 감독이 너무 미안해했었는데, 사실 저는 오히려 너무 좋았죠. 이렇게만 나오면 100번이라도 다시 찍겠다고 생각했고, 그건 진심이었으니까요. 다시 찍은 게 그전보다 훨씬 좋았거든요. 그 정도로 다시 찍는 게 가능했던 시대였고요. 요즘에는 아무래도 그러기 힘든 환경이다 보니까, 미리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애쓰죠.
그런 경험처럼, 이미 다 찍은 마지막 결말 장면을 다시 찍으려는 감독 김열의 믿음과 고집, 그리고 그 환영이 영화의 마지막에 구현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반드시 보여주고자 하는 스펙터클인데요. 원신원컷으로 진행되는데, 그 장면이 김열에게 가지는 의미, 또 본인에게 어떤 도전이었나요.
절박함이죠. 사실은 김열이라는 사람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 남들을 설득해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영화의 완성이 목전에 있는데, 그게 조금이라도 실패로 돌아가면 본인의 야망도 실패지만 그 수많은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좌절을 주게 되는 거죠. 김열은 그런 절박함에 휩싸인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찍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김지운 감독에게서 발견한 김열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웃음)
김열 감독이 그 혼돈 속에서 마지막 신을 찍어내기 위해 거의 광기에 휩싸이는 모습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때 김지운 감독님에게 한 번 봤어요. 중국 사막에서 100일 동안 지내며 촬영을 했는데,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다 찍지는 못했고, 다시 찍고 싶은 장면들도 있는데 시간은 제한돼 있고, 열정은 넘쳐서 광기의 도가니 속에서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웃음) 그때 우리 진짜 무지하게 고생했어요.
김지운 감독과는 현장을 오래 함께 경험해 온 협업자로서, 과거 창작자들의 분투를 다룬 이 작품을 만들면서 김지운 감독이 송강호 배우에게 기대고 이끌어 주기를 바란 지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김지운 감독은 좀 조용한 편이고 김열 감독처럼 막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아닌데요. 벌써 25년을 같이 했으니까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뭘 원하고 어떤 호흡으로 연기하기를 원하는지 잘 알고 있죠. 이번 현장은 항상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촬영했고 배우들끼리도 너무 잘 맞았어요. 감독님, 배우들과 가장 신경 쓴 건 어떻게 하면 지루함 없이 임팩트 없이 가느냐, 였던 것 같아요. 0.5초도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최대한 리듬을 타야 하고 그런 쪽의 연기 리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그게 가장 어렵기도 하고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기도 했어요.
직접 연출을 하는 배우들도 많은데요, 김열을 연기하면서 ‘디렉터스 체어’에 앉아 보는 간접 경험은 어떠셨나요.
감독 역할이 쉬운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에서 배우들만 고생하고 카메라 뒤에 앉아서 그냥 지켜보는 사람이다, 하고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웃음) 김열처럼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고통 속에서 결정해야 하고 고뇌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 정말 일개 배우가 감당할 몫이 아니구나,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세계다, 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꼈죠.
한번 도전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종종 받는 질문인데요.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참 부럽기도 하죠. 사실 저한테는 다재다능한 어떤 능력, 감독으로서의 열정 같은 것들이 없는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은 제게 그런 자질이 충분하다고 하기도 했는데 그냥 하신 소리 같고요. 한 20년 전부터 박찬욱 감독님도 좀 등을 떠밀었던 적이 있는데, 제가 정중히 고사했습니다. 전 배우 하기도 벅차다.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웃음)
메타 영화 형식(영화에 대한 영화)이라는 점에서 영화팬들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작품인데요. 현재 영화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의미도 더해지는 작품이었어요.
<거미집>은 익숙한 패턴의 영화들과 달리 생소하고 뭔가 좀 파격적인 면도 있죠. 지금은 그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영화의 맛이랄까,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참 귀한 시대인 것 같아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극장에 안 가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많은데, 이 영화만이 가지는 맛은 무엇일까, 어떤 반응을 얻을까, 기대도 좀 하게 됩니다. 영화는 암묵적으로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에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고,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얘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기 위해서 시나리오부터 연기와 연출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 그 안에 다 들어가야 하죠. 사실 거기서 오는 영화만의 매력이 있어요. 배우로서 저는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표현, 그리고 희열을 전달하고 싶어요. <거미집>이 그런 작품으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배우로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장서 계셨는데요. 영화 촬영 현장의 분투와 고민을 그린 <거미집>을 통해, 지금까지 당신의 선택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을 것 같아요. 어떤 기준으로 작품에 도전해 오셨나요.
이 이야기를 하려는 감독님의 비전이 어떤가, 또 이 이야기가 얼마나 지금 관객과 밀접하게 소통이 될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죠.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 영화를 통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는 것 같아요. 열 발자국은 못 되더라도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모습을 찾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어요. 이런 시도들이 없다면 틀에 박혀 있는 영화만 계속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겠죠. 내 입으로 얘기하기에는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늘 이런 생각으로 이 영화가 그런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려 합니다.
다양한 추석 한국영화 중 한편으로 관객들과 만나는데요. <거미집>만의 매력을 짚어 주신다면요.
제가 <기생충>에 이어서 거미까지 약간 벌레, 곤충, 뭐 그런 계통의 작품들이 많은데, (웃음) 제목 때문에 무슨 공포 영화인가, 이런 선입견을 가지시지 말고 편하고 즐거운 웃음을 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만의 매력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