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에 번역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문예출판사, 김선형 옮김)는 700페이지가 넘는다. 소녀 시절인 1950년(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생이다)부터 죽기 한 해 전까지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소소한 일상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 내면적 고통 따위가 가감 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10여 년 이상 쓰인 일기의 원래 분량은 발표된 것의 세 배가 넘는다.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명예를 손상할 만한 내용들을 실비아 사후 임의로 걸러내 발간한 탓이다.


나약하지만 열정적인 두 시인의 만남

테드 휴즈는 실비아 플라스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실비아가 영국에 유학 중일 때 서로 알게 되는데, 이미 그는 영국에서 유명한 시인이었다(나중에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다). 시적 재능뿐 아니라, 훤칠한 외모와 능란한 입담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에 비해 실비아는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여기는 시인 지망 유학생이었다. 문학에의 열정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 넘치는 20대 초반 여성이 낯선 곳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섬기기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어줄 만한 사람을 갈구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실비아>(2003)는 두 시인의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죽음을 담백하고 섬세한 영상에 담은 영화다. 예술가의 전기영화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극적인 미화나 스캔들에 초점을 둔 추문 들추기와는 거리가 멀다. 테드 휴즈 역할의 다니엘 크레이그와 실비아 플라스로 분한 기네스 펠트로의 섬려한 연기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배우는 두 시인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민함과 광기, 나약하지만 열정적인 심성을 밀도 있게 재연했다. 자신들이 쓴 시구를 읊으며 대화하는 장면들이 꽤 있다. 배우들이 읊는 시구에서 삶의 어떤 단면과 속살이 들춰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은, 내 경우 그리 많지 않다.

시인을 다룬 영화에서 시적인 울림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카메라에 포착되는 사물들과 인물의 표정 등이 시구와 자연스럽게 호환한다는 뜻이다. <실비아>는 그 점에서 시인의 우아하고 격렬한 영혼은 물론, 거기에 따르는 비참하고 암울한 삶의 표면을 조화롭게 병치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이 시를 읽을 때, 화면은 주변의 소소한 사물들까지 아우르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미장센 속에 시의 은밀한 비의를 드러내는 한 폭의 그림처럼 여겨진다. 책으로 읽었던 시들이 영화 속에서 새로 쓰여져 재탄생한 듯한 느낌이랄까. 적어도 이 영화는 시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화면 속에 시가 울린다

종이 위에 쓰인 채 그 뒤에 숨어있는 시인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경우는 때로 끔찍한 일이다(시인과 중국음식점 주방장 얼굴은 직접 보면 안 된다는, 오래된 문단 속설은 그저 농담 삼아 참조하시라). 시를 쓰는 건 언뜻 우아하고 고상한 일 같지만, 그 이면으로 들어가면 일상의 난분분한 속내들이 설거지 안 한 주방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기 마련이다. 시인이 마주하는 진짜 삶과 시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난삽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배면을 파헤치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실비아 플라스는 바로 그 배면에게 삶의 표면을 잡아먹힌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서든 실제로든, 테드 휴즈는 그녀의 우상이자 동반자로 시작해 결국엔 그녀를 배신하고 잡아먹는 지옥의 사령(使令)이 돼버린다. 소위, 그 자체가 ‘문학적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자신 안에 내장한 지옥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갉아먹은 자기분열의 연속이었지만, 그 시작과 끝엔 늘 남성이 있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는 땅벌을 연구하는 독일 태생 생물학자였다. 그는 실비아가 아홉 살 때 사망한다. 이후 실비아의 삶에서 죽음은 무시무시한 강박관념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자살 시도를 하게 되는데, 실비아는 “죽음을 겪고 나면 내가 부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적도 있다(영화에서도 이 대사가 나온다).


축축하고 암울하게, 그리하여 적나라하게

죽음에의 몰두는 모종의 상실감과 자기비하의 발로인 동시에 다른 삶을 갈구하려는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럼에도 그 사랑이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불구의 마음임이 선연해질수록 어떤 이들은 죽음에 골몰하게 된다. 죽음으로써 사랑을 확인시키려 하거나, 죽음을 통해 영원한 부재로 남는 사랑의 빈자리를 메우려 하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꼬리를 문 채 결코 얼굴을 맞닥뜨리지 못하는 두 마리 뱀과도 같다. 실비아는 그 둥그런 원환에 대한 본능적인 육감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 테드 휴즈는 이기적이고, 자신의 예민함만큼 실비아의 예민함을 견디지 못하는, 명민한 듯 아둔한 남성이었다. 겁쟁이거나 비열한이라 욕먹어도 마땅할 정도로 옹색한 내면이 영화에서도 선연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러한 옹색함과 비열함이 시적 촉수가 되어 사물을 냉엄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작용하게 되는, 묘한 역설도 체현되어 있다. 과도한 여성 편력에 빠졌던 남성 예술가들의 전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남성 예술가들은 자신 안의 야성과 마성을 여성을 매개로 표출하곤 입 닦아버리는 비열한들임에 분명한지도 모른다. 침대와 작업실이라는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오가며 그들은 자신을 낭비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고양시킨다. 둘 중 하나라도 결핍되면 그들은 곧장 어린아이로 퇴화한다. 실비아 플라스뿐 아니라, 그러한 남성들의 ‘이중플레이(?)’에 영육이 난도질당한 여성 예술가들이 역사 속에 허다하지 않던가.

<실비아>는 두 남녀의 그러한 갈등과 내적 혼란을 살금살금 떠내 함의가 풍요로운 영상으로 되살려낸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보는 이의 몫인 게 당연하다. 그 어떤 기울임 없이 전체적으로 나긋한 질감 속에 두 시인의 격렬한 내면을 솜씨 좋게 발라냈다. 그래서 여운이 더 짙고 영화 속에서 인용되는 시구들의 울림이 더 질박하게 전달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을 읽으면 행간이 확 트여 상상의 여백, 그 밀도가 더 높아진다. 시인을 다룬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다. 그렇다고 무슨 ‘시네포엠’이니 하는 겉멋 들린 우아함과는 거리가 있다. 단정하게 마름질된 서사의 틀 안에 시들이 적절하게 효과음을 넣어 시인의 진심을 안개처럼 스미게 하는 정도다. 안개라. 대체로 이 영화는 영국의 날씨만큼이나 축축하고 암울한 기운이다. 덜 마른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곤두선 습기에 피부가 아려오는 느낌이랄까.


삶도 시도, 한 손에 움켜쥐는 죽음의 매혹

앞서 언급했듯, 실비아 플라스는 상습 자살 미수자였다. 어릴 적 사고로 익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는데, 영화에서도 그 내용이 언급된다. 죽으려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조류에 휩쓸려 저절로 뭍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일화. ‘부활하는 느낌’이라는 대사도 그때 나온다. 테드 휴즈와 같이 보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그 얘길 한다. 이후, 영화는 계속 물살에 휘청거리는 듯한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물 위에 데스마스크처럼 떠 있는 실비아의 얼굴. 그녀 안엔 언제나 죽음이 자리 잡고 있고, 그걸 실천 혹은 실현하려 실비아는 자살시도를 일삼는다. 결국 자살로 귀결되었으나 실비아는 사실 죽음을 손에 쥐어 더 큰 삶, 더 광대한 시를 쓰고자 했을 뿐이다.

영화 초중반, 테드 휴즈가 외출하고 없는 집에 실비아 혼자 있다. 웬 여대생이 찾아와 테드 휴즈가 읽어봐 준다고 했다면서 원고를 건넨다. 실비아의 속이 뒤틀린다. 질투가 뒤섞인 오묘한 심정이다. 의부증이라 할만한 망상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사랑과 시에 대한 열정,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자신을 사로잡은 죽음에의 충동이 복합적으로 영혼 속에 똬리 틀고 있다가 슬슬 고개를 치켜든다. 벌거벗고 욕조 속에 잠긴 실비아. 얼굴만 물 밖으로 띄워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물은 실비아에겐 원형적 공포이자 선망의 상징이다. 죽음도 삶도 함께 누려야만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시라는 괴물이다.

물 위에 데스마스크처럼 떠 있는 실비아의 얼굴. 그녀 안엔 언제나 죽음이 자리 잡고 있고, 그걸 실천 혹은 실현하려 실비아는 자살시도를 일삼는다. 결국 자살로 귀결되었으나 실비아는 사실 죽음을 손에 쥐어 더 큰 삶, 더 광대한 시를 쓰고자 했을 뿐이다. 가스 밸브를 열어놓은 채 실비아 플라스는 집주인에게 의사를 불러달라는 메모를 남겨 놓았었다. 정말 죽고 싶은 동시에 정말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죽어서 다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죽음으로써 하나의 위대한 문학적 ‘거상’(巨像,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 제목이다)으로 남게 되었다. 시는 결국 삶의 밑바닥을 후벼파 띄어 올린 사후의 영예, 죽음의 큰 종소리 아니겠는가.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으로써 테드 휴즈에게 복수했다, 아니, 사랑의 영욕을 스스로 쟁취했다고나 하자.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