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이름의 '크립트 키퍼'는 1990년대 아이콘 중 하나인 캐릭터다. 실존하는 인물이나 배우가 아니라 인형에 불과하지만, 영화도 세 편에나 출연했고 만화영화, 액션 피겨, 핀볼 기계, 심지어는 시리얼박스에도 등장했으니 꽤나 유명한 캐릭터인 것이다. 그는 무려 8년에 걸쳐 7시즌 동안 방영된 TV 시리즈의 쇼호스트이기도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가 그 작품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총 제작 지휘 아래 1989년부터 1996년까지 HBO에서 제작, 방영한 납골당 공포 이야기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는 방영 기간 내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1980~90년대 미국 문화 아이콘으로 굳게 자리잡은 시리즈다.
매회 새로운 단편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썩어 문드러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매력이 넘치는 납골당지기 ‘크립트 키퍼’(존 카저)가 쇼호스트로 매회 출연해, 할머니가 손자에게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듯 약 30분 분량의 호러 스토리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와 친분이 있는 배우와 감독들이 다수 프로젝트에 참가하였는데 마이클 J. 폭스, 아놀드 슈왈제네거, 리처드 도너, 윌리엄 프리드킨, 댄 애크로이드, 스티브 부세미, 미트 로프, 조 페시, 브래드 피트, 데미 무어, 브룩 쉴즈, 슬래쉬, 우피 골드버그, 이기 팝, 산드라 블록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이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게스트 감독을 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극장판으로도 세 편이 만들어졌는데, 1편과 2편인 <크리프트 스토리 - 데몬 나이트>(Tales from the Crypt: Demon Knight, 1995)와 <크리프트 스토리 - 뱀파이어와의 정사>(Bordello of Blood, 1996)는 국내에서도 개봉하였다.
3편은 피터 잭슨이 연출하고 마이클 J. 폭스가 주연을 맡은 <프라이트너>(The Frighteners, 1996)였는데, 아쉽게도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 프랜차이즈명을 빼고 개봉하였다.
1993년에는 토요일 아침 방영용 만화 시리즈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 키퍼>가 제작되기도 하였으니 이 시리즈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는 뛰어난 특수효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던 수준의 키치하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끔찍한 신체 훼손 묘사로 에미상을 수차례 수상하기도 했는데, 특히 스티브 부세미가 등장했던 에피소드의 끔찍한 분장은 지금도 팬들에게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를 능가하는 구역질나는 특수효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하나의 시리즈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애정과 정성으로 활용하기까진 원작 시리즈에 대한 경외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이 시리즈는 제작진들이 유년기에 엄마 몰래 이불 아래 숨어서 손전등을 켜고 보던 원작 만화 책 시리즈에 대한 존경심 넘치는 헌사인 것이다.
원작 만화는 195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미국 만화 시장을 평정하면서 슈퍼히어로물을 완전히 압도하고 모든 만화 제작사들이 공포 만화만 찍어내게 만들었던, 전설적인 출판사 ‘EC 코믹스’의 공포 만화 타이틀들이다. 우리나라에서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EC 코믹스는 미국 만화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EC 코믹스의 만화들은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 등 만화 업계인물들을 넘어서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예술인들, 조엘 실버 등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출판된 지 60년이 넘는, 지금까지 멤버수가 수천 명이 넘는 페이스북 그룹이 활발히 활동 중이고 매년 새로운 판형으로 시리즈가 재판되는, 미국 만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시리즈이다.
EC 코믹스는 맥스 게인스가 창립한 회사로, EC는 Educational Comics의 약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 만화 이야기’, ‘미국 역사 만화 이야기’ 등 교육적이고 건전한 내용의 만화를 주로 출간하던 회사였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범람하는 슈퍼히어로 만화들의 틈바구니에서 EC 코믹스의 건전한 만화들은 잘 팔리지 않았고, 회사는 지속적인 적자에 시달린다. 설상가상으로, 맥스 게인스는 어느 날 모터 보트를 타러 나갔다가 사고로 급사하고 만다. 맥스 게인스에게는 윌리엄 게인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윌리엄은 화학 교사가 되길 꿈꾸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모친의 강요로 인해 적자에 허덕이던 EC 코믹스를 1947년, 반강제로 물려받게 된다.
주변에서는 출판사업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는 윌리엄 게인스가 몇 년 후 회사를 정리하거나 헐값에 경쟁사에 넘기겠거니 짐작했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불과 3년 뒤 소규모 회사였던 EC 코믹스를 타임리나 DC 같은 메이저 경쟁사들이 두려워하고 견제하는 회사로 일궈낸다. 성공의 발단에는 1950년대 발간한 호러만화들이 있었다.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 <벌트 오브 호러>(The Vault of Horror), <헌트 오브 피어>(The Haunt of Fear)라는 이름의 세 시리즈는 1951년에 수백만 부까지 판매 부수를 올리며 EC 코믹스를 만화 출판업계의 거물로 거듭나게 했다.
하지만 아류 회사들의 난립, 공포 만화에 대한 부모들의 반감, 경쟁사들의 견제로 인해 불과 3년 뒤인 1954년, EC 코믹스는 모든 호러 만화들을 종간시킨다.
지난해 초, 영화감독 M.나이트 샤말란이 <테일즈 프롬 더 크립트>의 새 TV 시리즈 제작 계획을 발표했다. 완전히 새로운 컨텐츠는 아니고 예전에 방영했던 시리즈의 리메이크인데, 이 뉴스가 올라오자마자 각종 뉴스 페이지들과 인터넷 게시판에는 매우 기대된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1950년대 원작 만화의 팬들과 1990년대 TV 시리즈를 아련히 기억하는 팬들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새 TV 시리즈에서도 크립트 키퍼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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