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를 통과하는 8 miles road. 영화 <8마일>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모타운 레이블로 대표되는 흑인음악의 찬란한 역사가 담겨 있는 도시, 미국을 대표하던 자동차 제조 도시(모타운이라는 이름 역시 자동차를 뜻하는 '모터'에서 따온 것이다). 디트로이트를 이야기할 때 가장 흔하게 나오는 소재들이다. 하지만 둘 모두 과거형에 가깝다. 자동차 산업은 독일, 일본 등에 밀려 예전 같지 않아졌고, 모타운의 영광의 시대도 이제는 색이 많이 바랬다. 주축 산업이 무너지면서 도시는 쇠락했고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지만 모타운의 예가 있듯 디트로이트의 문화는 우월하다. 여느 도시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비율이 높고 그래서 블루스와 소울 음악 등이 강세를 보였다. 모타운은 상징과도 같았다. 디트로이트 테크노 또한 빼놓을 수 없고 최근에는 성소수자들을 중심으로 문화적 활력을 띤 도시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

여기에 에미넴이란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힙합에서 지역이란 배경이 중요한 것처럼 에미넴 역시 자신이 자란 디트로이트를 잊지 않고 늘 언급해왔다. 그래서 영화 <8마일>은 에미넴의 자전적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확히는 실제와 가상의 이야기를 섞어놓았다. 앞서 언급한 8 miles road를 경계로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가 다르다. 이렇듯 인종 경계가 뚜렷한 동네에서 에미넴이 연기한 지미 스미스 주니어(래빗)의 위치는 묘하다. 그는 백인이지만 생활수준이 극히 낮고 또 흑인들의 유희인 랩에 깊이 빠져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그에겐 철없는 엄마와 나이 어린 여동생이 있고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영화 속 짤방으로 유명한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란 말이 래빗의 현실이다.

래빗의 랩은 영화의 중심에 있다. 빼어난 랩 실력을 통해 ("X나 좋군?"을 외치는) 좋은 흑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됐고 잠깐의 로맨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랩을 통해 갈등을 겪기도 하고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사랑의 배신도 당한다. 랩은 래빗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다. 랩은 래빗의 시궁창 같은 삶을 탈출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8마일>은 분명 상투적인 영화다.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영화의 마지막엔 관객 모두가 원하는 장면을 시원하게 연출한다. 하지만 에미넴의 랩은 이 상투성마저도 극복해낸다. 악의 선봉에 서있는 파파독과의 마지막 랩 배틀에서 래빗이 랩을 하고 마이크를 던지고 돌아서는 장면 하나하나는 멋이 흘러넘친다. 그 멋진 퍼포먼스를 통해 랩이 가진 매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래빗은, 에미넴은 보여준다.
 
에미넴의 이 멋진 랩 퍼포먼스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제는 에미넴의 대표곡이 된 'Lose Yourself'는 랩을 통해서 얼마나 효과적인 무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한 명곡이다. <8마일>의 영화 포스터에서 에미넴이 손바닥에 적고 있는 게 바로 'Lose Yourself'의 가사다. 사운드트랙에는 'Lose Yourself'뿐 아니라 라킴, 갱스타, 제이지, 나스 등 힙합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들의 노래가 대거 수록돼있다.

파파독과의 랩 배틀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둔 뒤 한껏 들뜬 동료들이 한 잔 하러 가자고 할 때 래빗은 "야근하러 가아 해" 하며 쿨하게 돌아선다. 랩 배틀의 우승자가 됐지만 곧바로 랩스타로 이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고, 꿈과는 무관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앞서 나는 이 영화가 상투적이라 썼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만은 상투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Lose Yourself'. 현실과 맞닿으며 음악은 더 감동적으로 들린다.


김학선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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