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서린 헵번은 몰라도 오드리 헵번은 안다. 케서린 헵번이 누구냐고? 그녀는 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선정한 “지난 100년 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 배우 목록에서 1위에 오른 배우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배우 캐서린 헵번 대신 오드리 헵번이 더 유명한 이유가 뭘까. 오드리 헵번은 시대를 넘어선, 영화를 넘어선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케서린 헵번이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21세기의 우리는 그녀를 모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언론을 기피하고 연기에 몰입한 배우였다. 오드리 헵번의 경우는 어떨까.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그레고리 펙을 태우고 베스파를 운전하는 그녀(<로마의 휴일>)를 우리는 기억한다. 큰 선글라스와 긴 장갑을 끼고 커피와 페이스트리 빵(도너츠가 아니다)을 들고 있는 그녀(<티파니에서 아침을>)도 우리는 알고 있다.
‘헵번 스타일’은 전 세계적인 유행이다. 과거형이 아니다.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녀는 유효하다. 마릴린 먼로의 스타일이 당시를 대변하는 것과는 다르다. ‘죽지 않는 아이콘’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태어나 1993년 1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태어난 날을 즈음해 그녀의 연기 인생과 삶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1.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인 사업가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헵번이 어릴 때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치 부역자였다. 헵번은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주로 성장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네덜란드는 독일 점령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그녀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외가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죽음의 공포와 함께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헵번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을 위한 비밀기금 모임에서 5살부터 배운 발레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침묵 속의 그 공연을 자신의 최고 공연이라고 회고했다.
2. 세기의 신데렐라가 탄생하다
헵번은 <로마의 휴일>(1953)로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됐다. 그야말로 스타 탄생이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스튜디오가 원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대신 오디션을 통해 헵번을 발탁했다. 헵번은 앤 공주를 위한 완벽한 배우였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다.
<로마의 휴일>에 함께 출연한 그레고리 펙은 영화 포스터에 자신의 이름이 크게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 그의 말은 사실이 됐다. 헵번은 첫 주연작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골든 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어워드(BAFTA)에서도 수상했다. 헵번은 한 영화로 세 시상식에서 모두 수상한 첫 여배우였다.
<로마의 휴일>을 통해 ‘헵번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특히 그녀의 단발머리는 지금도 헵번 스타일로 불린다. 당시 할리우드에선 섹시한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날씬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헵번의 등장은 모든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3. 협찬 받는 의상을 입다
<로마의 휴일>에 이어 헵번이 출연한 <사브리나>는 그녀를 진정한 패션 아이콘으로 만들어줬다. <사브리나>에 출연할 당시 헵번은 프랑스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의상을 입었다. 이 의상은 협찬을 받은 것이었다. 특정 브랜드의 의상을 협찬하는 일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사브리나>에서 헵번이 입고 나온 바지는 ‘사브리나 팬츠’, 구두는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린다. 지방시는 처음에 캐서린 헵번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이라서 실망했다고 한다. <사브리나> 이후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다.
4. 영화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의 첫 장면, 뉴욕의 보석상 ‘티파니’의 쇼윈도 앞에 서있는 헵번의 이미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리틀 블랙 드레스, 선글라스, 장갑, 목걸이까지 헵번이 입고 나온 모든 것이 20세기 영화, 패션을 대표하는 한 장면이 됐다. 물론 아파트 비상계단 창가에서 헵번이 부른 노래 ‘문 리버’(moon river)도 잊을 수 없다. 트루먼 카포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수작이기도 하다. 카포티는 헵번의 출연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마를린 먼로를 원했다. 헵번이 연기한 홀리는 콜걸이었기 때문이다.
5. 인도주의자가 되다
1967년 개봉한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 헵번은 활발한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천사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이었다. 이후 그녀는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전쟁을 겪었던 성장기 기억이 그녀를 인도주의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습득한 외국어 실력이 유니세프 활동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런 덕분에 그녀가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따로 통역을 거치지 않고 현지인과 대화했다.
오드리 헵번과 관련된 소소한 이야깃거리
-헵번은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 배우 목록에서 3위에 올랐다.
-헵번은 에미(Emmy, TV), 그래미(Grammy, 음악), 오스카(Oscar, 영화), 토니(Tony, 연극) 상을 모두 수상했다. 네 개의 상을 모두 수상하는 것을 EGOT라고 부른다. 미국 연예계의 그랜드슬램 같은 것이다. EGOT를 기록한 사람은 그녀를 포함해 12명이 있다.
-헵번은 스스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64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헵번은 직접 노래하지 않았다. 급하게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1957년작 <화니 페이스>에서는 직접 노래했다.
-헵번은 두 번 이혼했다. 첫번째 남편인 배우 멜 페러와 두번째 남편인 이탈리아인 의사 안드레아 도티 모두 바람둥이였다. 헵번은 두 사람 사이에서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다. 두 번째 이혼 이후 헵번은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와 죽을 때까지 동거했다.
-헵번은 63살이던 1993년 1월 20일, 스위스 톨로체나즈의 자택에서 결장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녀는 집 근처 묘지에 묻혔다. 그레고리 펙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타고르의 시 ‘영원한 사랑’(Unending Love) 암송했다.
<수상한 그녀>의 오말순(나문희)은 젊어진 뒤 오두리(심은경)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인다. 헵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004년 방영된 KBS 월화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도 차무혁(소지섭)과 윤서경(전혜진)의 생모로 오들희(이혜영)가 등장한다. <아멜리에>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 역시 헵번의 이름에서 따왔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