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투기>를 통해 독립영화계 스타로 자리매김한 류혜영은, <나의 독재자>, <그놈이다> 등의 상업영화를 거쳐 재작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행보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선거를 소재로 한 <특별시민>은 조연을 맡았던 시대극 <해어화> 이후 1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다. 어느 역할을 맡아도 배우 류혜영이 어른댔던 지난 영화와는 달리, <특별시민>의 임민선은 배우의 이미지보다 인물의 품성이 먼저 보인다. 그동안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지금을 즐기고 싶다." 류혜영이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이유다. 여느 10대들처럼 '학교-학원-독서실-집' 동선을 오가는 생활을 따라가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사는 곳에서 아주 먼 예고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1학년이었던 2007년, 우연히 단편영화 <여고생이다>에 참여하게 됐고 그때 '촬영현장'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앞으로 이걸 쭉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어요. 아직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해서 계속 연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지난 10년간 <미성년>, <잉투기>, <나의 독재자>, <그놈이다>, <해어화> 같은 작품들이 켜켜이 쌓아나갔다.

<잉투기>의 영자 / <나의 독재자>의 여정
<그놈이다>의 은지 / <해어화>의 옥향
<응답하라 1988>의 보라

2015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류혜영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었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성깔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을 동시에 지닌 성보라 역의 류혜영은 혜리, 박보검, 류준열, 고경표, 안재홍, 이동휘 등과 함께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스타로서의 저변을 넓혔다. 하지만 당시 쏟아진 관심이 그녀의 행보를 명쾌하게 했던 건 아니었다. "휩쓸렸다면 휩쓸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시켜야 할 방향 같은 걸 깨끗하게 볼 수 없었어요. 제가 지향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큰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통 안 보였죠."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루었지만, 일상에서도 무수한 눈길을 받아야 하는 불편함 역시 감당해야 했다. "원하기만 했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생각이 밀려들던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시민>을 만났다.

<응답하라 1988>의 보라

<특별시민>의 민선

류혜영이 지금껏 맡아온 캐릭터들은 모두 닮아 보였다. 못마땅하다는 듯 인중을 들어올릴 때도 소년 같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릴 때도, 그 인물들과 함께 류혜영이라는 사람도 동시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특별시민>의 임민선은 다르다. '정치 컨설턴트'라는 낯선 직업, 타협의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우직한 태도로 똘똘 뭉친 임민선은 류혜영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특별시민> 속 모든 인물들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품위 있는 승리를 올곧게 주장한다.

<특별시민>의 민선

"냉정하고 감정을 일체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저는 화나거나 슬프면 눈물부터 흘려요. 감정 숨기기부터가 너무 어려웠어요." 접점이 적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헤맸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들 앞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과 낯선 캐릭터에 대한 난점이 상충해서 마음고생도 심했다. 하지만 꿋꿋이 제 견해와 동료들의 의견을 곱씹으며,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임민선을 만들기 위해 캐릭터를 쌓고 원점으로 돌리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출처=류혜영 인스타그램

수많은 것들이 부옇게만 보일 때, 최민식이 손을 내밀었다. 우연찮게 나란히 앉아 진행했던 전체 리딩을 마친 며칠 후 직접 1:1 과외를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 최민식이 분한 변종구와 임민선은 상대편 진영에 있는 인물이라 영화 속에서 함께 만나는 신이 단 하나밖에 없지만, 무려 10시간을 넘기는 동안 연기에 대한 지도를 비롯한 천금 같은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들은 얘기는 계속 마음에 새기고 있고, 심지어 그때 못 느꼈던 걸 지금 느끼기도 해요.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냐고 묻자 류혜영은 잠시 머뭇대다가 "사실... 저만 갖고 있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어떤 조언인지 이야기해주는 것보다 그 기억을 나만 갖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이야말로 너무 류혜영다워서,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조한철, 류혜영, 라미란

<특별시민>은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 라미란 등 류혜영과 같은 회사에 속한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그 가운데 라미란과의 추억이 특히 깊었다. <응답하라 1988>도 같이 했고, <특별시민> 속 임민선의 분량이 양진주(라미란) 캠프의 인물들과 대부분 엮여 있어 더더욱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촬영을 하다가 짬이 나면 늘 차에 캠핑도구를 싣고 다니는 라미란의 차를 타고, '양진주 캠프' 배우들끼리 캠핑을 떠난 적도 있다고. 영화 내내 의견을 대립하던 양진주 캠프의 기묘한 케미는 사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다.

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너무 힘들지만 항상 끝나면 고생한 게 기억에 크게 남잖아요. 느낀 것도, 배운 것도 많아서 앞으로 더더 많이 변할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류혜영은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원칙주의자 임민선을 <특별시민>에 새길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재미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흘러가는 대로 커리어를 쌓았다면, <특별시민>을 통해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작품을 준비하며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완전히 새롭게 깨닫게 됐다. 촬영은 물론 이후 개봉 전후의 프로모션까지 두루 소화하며, <응답하라 1988> 이후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 고민했던 "진짜 프로가 되어가는 과정"을 선배들을 통해 제대로 배웠다. 프로배우로서 한발짝 더 내딛은 류혜영의 다음 캐릭터는 어떤 모습일까. 류혜영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과 둥글둥글한 목소리가 한데 담긴 <특별시민>의 임민선이 그 도약의 예고편이 될 것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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