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명장면 혹은 명대사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주연 배우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감독의 이름이 먼저 머릿속에서 맴돌 때도 있다. 한 장의 스틸 사진이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음악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포스터 역시 영화를 기억하는 중요한 장치다. 사실 포스터는 영화 개봉 전 더 힘을 발휘한다. 근사한 포스터는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에서 제공되기 이전에는 포스터만으로 어떤 영화를 볼지 결정하기도 했다. 극장에서 영화가 내려가고 DVD, 블루레이 등 2차 판권 시장으로 넘어가도 포스터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렇게 포스터는 영화를 기억한다.
북미권의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에서 “1990년대 베스트 포스터 50”을 선정했다. 순위는 정하지 않았다. 리스트를 살펴보니 익숙한 추억의 영화들이 꽤 많다. 해당 영화의 국내 포스터로 추정되는 이미지를 구할 수 있는 경우에는 비교할 수 있게 첨부했다. 아울러 에디터가 선정한 1990년대의 인상적인 한국영화 포스터도 끝에 추가했다.
가위손 (1990)
<가위손>은 팀 버튼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 영화다. 포스터에는 주연 배우 조니 뎁의 얼굴과 그의 가위손이 보인다. 국내 개봉 포스터 대신 아마도 VHS 비디오테이프의 커버이미지로 추정되는 이미지를 같이 넣어봤다. 1990년대 동네마다 비디오대여점이 성행했다. ‘OO극장 개봉작’이라는 문구가 자주 삽입되곤 했다.
사랑과 영혼 (1990)
한국 개봉 제목 <사랑과 영혼>은 원제인 <Ghost>보다 좀더 영화를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한국 버전 포스터에는 영화 속 명장면이 삽입됐다.
귀여운 여인 (1990)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의 로맨틱 코미디 <귀여운 여인> 포스터는 이후 비슷한 장르의 영화에서 벤치마킹되는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귀여운 여인> 역시 과거 포스터를 벤치마킹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남녀 배우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포스터가 꽤 많다. <귀여운 여인>과 비슷한 구도의 포스터를 몇 개 찾아봤다.
정글 피버 (1991)
스파이크 리 감독의 <정글 피버>는 인종문제를 다룬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이 손을 맞잡은 포스터 사진이 영화를 잘 설명해준다.
양들의 침묵 (1991)
<양들의 침묵> 역시 인상적인 포스터로 기억된다. 국내 포스터에는 주연 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얼굴을 강조했다.
미녀와 야수 (1991)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포스터를 보고 2017년 개봉한 실사영화의 포스터인 줄 착각할 뻔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용서 받지 못한 자 (1992)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배우들의 얼굴을 배치한 ‘전통적인 방식’의 포스터처럼 보인다. 함께 첨부한 사진은 <가위손>처럼 비디오테이프 표지 이미지인 듯하다.
캔디맨 (1992)
버나드 로즈 감독의 호러영화 <캔디맨>는 커다란 눈동자가 포스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포스터에 눈동자 이미지가 사용된 경우도 꽤 많은 듯하다.
쥬라기 공원 (1993)
<쥬라기 공원> 포스터 속의 영화 제목과 공룡 그림의 ‘아이콘’은 시리즈를 상징한다. 비슷한 예로 <스타워즈>의 제목 서체도 변하지 않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 (1994)
<포레스트 검프>의 포스터는 1990년대가 아닌 영화사 전체를 범위로 해도 좋은 포스터로 언급되지 않을까.
쉰들러 리스트 (1994)
<쉰들러 리스트> 포스터에는 배우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다. 국내 포스터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유태인이라도 더 살려내고자 했던 영화 속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의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멋진 포스터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 (1994)
원본 포스터 상단에 등장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토미 리 존스의 이름은 국내 포스터에서 사라졌다. 제목에는 감독의 이름이 들어갔다. 2017년이라면 제목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킬러’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펄프 픽션 (199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 포스터는 영화의 제목처럼 싸구려 단편소설의 표지처럼 만들었다. 10센트라는 가격까지 붙었다. <펄프 픽션>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쇼걸 (1995)
<쇼걸>의 포스터는 ‘역대 가장 멋진 포스터 10’에도 들어갈 만큼 파격적이다. 개봉 당시 남자 중학생들은 저 포스터만 보고 온갖 상상을 했을 것이다. 에디터 이야기는 아니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1995)
팀 버튼은 확실히 1990년대가 전성기였다. 특히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포스터 역시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국내 포스터와 원본 포스터는 비슷한 듯 다르다. ‘다른그림찾기’를 해도 될 정도다.
쇼생크 탈출 (1995)
<쇼생크 탈출> 포스터는 1990년대 영화 포스터에서 빠질 수 없다. 국내에서는 <그랑블루>(1993), <세 가지 색:블루>(1993)의 포스터와 함께 커피숍에 많이 걸린 포스터로 기억된다. 물론 미국 버전의 포스터다. ‘인디와이어’는 미국 영화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랑블루> 등 프랑스 영화 포스터는 언급하지 않았다.
인디펜던스 데이 (1996)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포스터는 외계인의 거대한 우주선과 뉴욕의 마천루를 나란히 배치했다.
유주얼 서스펙트 (1996)
국내에서 아마도 최초로 스포일러라는 단어를 쓰게 만든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포스터는 용의자를 한 자리에 세워뒀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포스터에 등장하는 다섯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범인이다.
파고 (1996)
코엔 형제 감독의 <파고> 포스터는 카펫, 러그 등 직물의 질감이 느껴진다. 이 영화를 원본을 제작한 드라마 <파고>(2014)의 포스터도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었다.
타이타닉 (1998)
포스터가 썩 아름답다거나 감각적이라거나 훌륭하다는 생각이 마구 샘솟는 건 아니지만 <타이타닉>은 1990년대를 다루는 어떤 주제라도 리스트에서 빠지면 섭섭할 듯하다.
위대한 레보스키 (1998)
코엔 형제의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는 제프 브리지스와 줄리언 무어를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제프 브리지스는 ‘화이트 러시안’이라는 칵테일을 물처럼 마시는 대책 없는 백수, 듀드(dude) 레보스키를 연기했다. 그는 엄청난 볼링 덕후다. 포스터만 보면 어떤 영화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잘못 만든 포스터인가? 어쨌든 <위대한 레보스키>는 골때리는 코미디 영화다.
트루먼 쇼 (1998)
<트루먼 쇼>의 포스터는 수많은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모아서 만든 트루먼의 얼굴을 담고 있다. 이제는 이런 디자인 기법에 익숙해졌다.
아메리칸 뷰티 (1999)
<아메리칸 뷰티>는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남우주연상(케빈 스페이시)을 포함한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제목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는 포스터 속의 장미를 이르는 말이다.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장미의 한 품종이다. 영화 속에서 이 장미는 상징적인 요소로 자주 등장한다.
매그놀리아 (1999)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 포스터는 영화 속 한 장면을 가져왔다. 국내 포스터에서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원본 포스터의 개구리를 작게 넣어주긴 했다.
스크림 (1999)
<스크림> 포스터 역시 제목과의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쉽게 잊기 힘든 디자인이다. 한국판 포스터의 상단 카피가 인상적이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한 바로 그 영화!”
인상적인 199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
사의 찬미 (1991)
“아름다운 밤이에요.”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미희는 이렇게 외쳤다. 그녀의 (당시로선) 파격적인 수상 소감만큼 포스터도 인상적이다.
그대 안의 블루 (1992)
이현승 감독은 <그대 안의 블루>와 <시월애> 등에서 세련된 영상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스터 역시 1990년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매우 세련된 느낌이다.
결혼 이야기 (1992)
<결혼 이야기> 포스터는 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카피가 눈에 띈다. <결혼 이야기>는 대기업 자본이 들어간 최초의 기획영화다. 영화 포스터를 위한 사진 촬영이 이때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는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과 부합하는 것 같다. 홍경인의 눈빛이 매섭다.
개 같은 날의 오후 (1995)
주연 배우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국내 영화 포스터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유미, 정선경, 손숙 등이 출연한 <개 같은 날의 오후> 포스터는 개들이 점령했다. 영화는 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게 함정이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에어컨도 고장난 뜨거운 여름날 한 아파트의 여성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소동을 그린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5년 영화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의 원제에서 제목을 빌어왔다. 사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오역이다. ‘Dog Day’는 1년 중 가장 더운 여름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복날’ 같은 단어다. 고대 로마에서 한여름, 큰개자리의 별 시리우스가 가장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역과 상관없이 <개 같은 날의 오후>라는 제목이 썩 와닿긴 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개 같은 날의 오후>에 이어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포스터에도 동물이 등장했다. 제목을 그대로 포스터 디자인에 활용한 경우다. 역시 이 영화도 돼지와 별 상관이 없다.
악어 (1996)
<개 같은 날의 오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이어 <악어>에서도 제목에 동물이 등장했지만 다행스럽게 포스터에 악어는 없었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는 한강에서 자살한 사람들의 지갑을 훔치고 시체를 숨겼다가 유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악어’(조재현)가 주인공인 영화다.
나쁜영화 (1997)
<나쁜영화> 포스터는 한국영화 포스터에 최초로 등장한 ‘키치’(Kitsch)인 듯하다.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디자인했다. 그는 <나쁜영화>에 미술감독으로도 참여했다.
접속 (1997)
포스터보다는 영화 삽입곡인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가 먼저 떠오르는 <접속>의 포스터는 PC통신 채팅을 통해 알게된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이 서로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를 담았다. <접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 앞 커피숍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에서 왜 <클래식>(2003)이 떠오를까. 2013년 재개봉 버전의 포스터가 더 마음에 든다.
약속 (1998)
두 글자 제목의 멜로영화의 정점을 찍은 <약속> 포스터는 엽서 등으로도 제작돼 크게 인기를 끌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8)
임상수 감독의 도발적인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포스터도 꽤 도발적이다. 이 영화는 여성들의 주체적 섹슈얼리티를 다뤘다.
조용한 가족 (1998)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배우들이 포스터에 단체로 등장한다. 송강호, 최민식이 뒷쪽에 배치된 게 조금 낯설기도 하다.
태양은 없다 (1999)
정우성, 이정재 주연의 <태양은 없다> 포스터에선 두 배우의 존재감이 빛을 발한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이 2012년 이 포스터에 쓰인 사진을 촬영한 장소인 잠수교에서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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