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첫 작품을 내놓은 창작자가 두 번째 작품(혹은 그 작품의 진행 상황)이 시원찮을 때, 보통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대개는 첫 작품이 뛰어나면 두 번째 작품도 뛰어나고, 첫 작품이 엉망이면 두 번째 작품 또한 비슷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드물게 뛰어난 영화로 데뷔했으나 두 번째 작품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부진했던,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하지 못한 할리우드의 감독들은 누가 있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데니스 호퍼

<이유없는 반항>(1955)의 단역으로 경력을 시작한 데니스 호퍼는 수년간 잘 활동하다 유난한 성격과 반골 기질로 할리우드에서 미움을 사게 되었고 어떤 배역도 맡지 못해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뉴욕으로 가 연기를 더 공부하고 할리우드로 간 데니스 호퍼는 직접 돈을 끌어 모으고, 각본을 쓰고, 배우로도 출연하고 연출까지 맡은 <이지 라이더>(1969)로 감독 데뷔했습니다. 미국 영화사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로드무비,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지 라이더> 40만 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을 들여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지 라이더>(왼쪽)와 <라스트 무비>(오른쪽)

그 무렵의 개인사는 불행했습니다. 결혼 생활에 파경을 맞았고, 알코올을 비롯한 약물 중독에 시달립니다. 훌륭한 데뷔작을 내놓은 덕에 스튜디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페루로 가 찍은 두 번째 영화 <라스트 무비>(1971)는 지나친 자기 위안이라는 혹평을 들었습니다. <라스트 무비>의 실패로 또다시 그는 할리우드에서 잊히게 됩니다. 천만다행으로 빔 벤더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다시 배우로 일하게 되었지만 심각한 수준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당시 머물던 멕시코에서 추방돼 미국에서 3년간 재활을 시도합니다. 데니스 호퍼는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1986)에서의 호연으로 완벽히 부활했고, 감독 겸 배우로서의 명성을 모두 회복했습니다. 평생을 관습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그는 유감스럽게도 2010, 지병인 전립선암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지 라이더

감독 데니스 호퍼

출연 피터 폰다, 데니스 호퍼

개봉 1969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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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코스트너

데니스 호퍼와 마찬가지로 케빈 코스트너도 배우로 먼저 알려졌습니다. 1980년대 말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이자 지적인 호남형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침략사를 비감 어린 시선으로 그린 <늑대와 춤을>(1990)로 감독 데뷔했습니다. 남북전쟁 시기, 낭만을 간직한 군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들 지역에 고립되고 그들과 어울리며 인간애를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시적으로 연출한 수작이었습니다.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연기, 신화적이고 아름다운 로케이션까지 두루 훌륭했고, 63회 미국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음향상, 촬영상, 편집상을 휩쓰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늑대와 춤을>(왼쪽)과 <포스트맨>(오른쪽)

케빈 코스트너의 두 번째 영화 <포스트맨>(1997)은 온 문명이 파괴되고 인류가 뿔뿔이 흩어진 2013년 미래(!), 독재자에게서 탈출한 남자가 우체부 행세로 신분을 숨기고 연명하며 인류를 연결하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하며,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 서사로 점철돼있던 탓에 흥행과 비평에 참패했습니다. ‘전형적이라는 말이 꼭 나쁜 뜻만은 아닙니다만 <포스트맨>은 지나치게 안일한 연출이 영화의 발목을 붙든 격이 됐습니다. 다행히 전형적이지만 뚝심을 갖고 성실히 만든 서부영화 <오픈 레인지>(2003)가 다시 케빈 코스트너를 일으켜세웠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제작자이자 배우로 활동 중입니다. 최근 <히든 피겨스>에서도 근사한 캐릭터를 보여줬죠.

늑대와 춤을

감독 케빈 코스트너

출연 케빈 코스트너

개봉 1990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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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

감독 케빈 코스트너

출연 케빈 코스트너

개봉 199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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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니콜

앤드류 니콜 감독은 파격적이고 지능적인 스토리, 우아한 프로덕션디자인으로 주목 받은 영화 <가타카>(1997)로 데뷔했습니다. 유전자 조회로 앞으로의 살 날까지 미리 알 수 있는 세계에서 빈센트(에단 호크)는 헛된 꿈을 꿉니다. 31세에 죽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거스르고 우주비행사가 되고자 합니다. 빈센트는 유전자 중개인을 통해 완벽한 우성인자를 지닌 유진(주드 로)과 연결되고, 그와 결합해 완벽한 인간 제롬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당시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훗날 여러 가지 면에서 명작으로 재평가된 작품이지요. 앤드류 니콜은 직접 시나리오를 쓴 <트루먼 쇼>의 감독이 될 뻔도 하였으나 높은 금액의 제작비가 부담스러워 연출을 고사한 바도 있습니다.

<가타카>(왼쪽)와 <시몬>(오른쪽)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다루고자 하는 의지는 그가 연출한 두 번째 영화 <시몬>(2002)에서 더욱 명징하게 나타납니다. 프로덕션디자인에 대한 집착도 한층 강렬해졌고, 할리우드 현실에 대한 풍자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가타카> <트루먼 쇼>를 통해 이미 드러낸 바 있는 주제 의식이 <시몬>에서까지 비슷하게 반복되니 작가로서의 그가 지나치게 태만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화는 이미지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님에도 <시몬>은 이미지가 전부라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비슷한 예로 앤드류 니콜의 세 번째 연출작 <로드 오브 워>도 플롯에 비해 에너지가 모자란다는 평을 들었고 <인 타임>(2011), <호스트>(2013), <드론전쟁: 굿킬>(2014) 등 후속작이 나올수록 더 이상 앤드류 니콜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식의 참담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가타카> <트루먼 쇼>에서 보았던 앤드류 니콜의 인간적이고 참신한 SF적 에너지를 언젠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가타카

감독 앤드류 니콜

출연 에단 호크, 우마 서먼

개봉 199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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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감독 앤드류 니콜

출연 알 파치노

개봉 2002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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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켈리

리처드 켈리가 불과 스물여섯에 내놓은 <도니 다코>(2001)는 세상이 28일 안에 멸망해버릴 것이라 믿는 십대 소년 도니(제이크 질렌할)가 토끼 인간 프랭크와 벌이는 기행을 그립니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이자 심리 스릴러, 에너지가 폭발하는 청춘영화이기도 한 이 괴작은 제17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와 각본상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각본상은 <메멘토>가 차지했고, <도니 다코>는 인기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정신분열을 앓는 소년의 혹독한 내면을 훌륭히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도 굉장한 호평을 들었습니다.)

<도니 다코>(왼쪽)와 <사우스랜드 테일>(오른쪽)

평단이 리처드 켈리의 두 번째 작품에 거는 기대는 당연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사우스랜드 테일>(2006)은 단연 화제였습니다. 독립기념일에공공의 적인 이라크, 이란, 시리아, 북한으로부터 텍사스가 폭격당하며 시작하는 이 작품엔 스타 드웨인 존슨, 사라 미셸 겔러,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참여해 관심이 높았고, 200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까지 후보로 올랐습니다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평단으로부터는 엄청난 혹평을 들었고, 지나친 러닝타임 때문이었는지 이해가 힘든 비선형적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는지 관객에게도 외면당했습니다. 영화의 불친절함과 복잡성이 호응을 얻지 못한 거라고 판단했는지 리처드 켈리의 세 번째 영화 <더 박스>는 중심 스토리가 간결한, 상당히 친절한 SF였는데 이마저도 형편없었습니다. 한때 컬트영화의 유망주로 불린 그는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좋은 영화를 내놓지 못하고 있네요.

도니 다코

감독 리차드 켈리

출연 제이크 질렌할

개봉 200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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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랜드 테일

감독 리차드 켈리

출연 드웨인 존슨, 숀 윌리엄 스코트, 사라 미셸 겔러, 맨디 무어, 미란다 리차드슨, 케빈 스미스

개봉 2006 미국, 독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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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티그

<브이 포 벤데타>(2005)로 제임스 맥티그는 데뷔했습니다. 워쇼스키 자매가 동명의 DC 코믹스 원작을 영화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체제를 전복하려는 의인 브이(휴고 위빙)가 독재 정부로부터 감시 당하는 시민들을 계몽한다는 내용의 근미래 SF, ‘전체주의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다룬 영화를 말할 때 매번 불려 나오는 작품이죠. 파시즘을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다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빅브라더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뉘앙스의 호평이 많았고,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 차례 지켰던 흥행작이기도 합니다.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3부작과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2002)의 조감독이기도 했던 제임스 맥티그는 <브이 포 벤데타>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브이 포 벤데타>(왼쪽)와 <닌자 어쌔신>(오른쪽)

그의 공식적인 두 번째 작품 <닌자 어쌔신>(2009)은 정지훈의 할리우드 첫 주연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높았죠. 워쇼스키 자매의 인장으로 마구 칠해진 국적 초월의 닌자 영화였습니다. 피투성이 액션은 취향이 맞는 관객이라면 흥미를 가지고 보았겠으나 서사와 에너지가 라이조(정지훈)의 칼날만큼 날카롭진 못했습니다. 국내외 모두 흥행 성적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제임스 맥티그는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의 <인베이젼>(2007) 크레딧에도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제작자인 워쇼스키 자매가 히르비겔 감독 버전을 마음에 안 들어해서 일부 장면을 제임스 맥티그가 재촬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독 연출작이 아니어서 제외했습니다. 데뷔작 이상의 호응을 얻은 영화는 이후로 없었습니다만 현재 새 영화를 촬영 중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

감독 제임스 맥티그

출연 나탈리 포트만, 휴고 위빙

개봉 2005 미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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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어쌔신

감독 제임스 맥티그

출연

개봉 2009 미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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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쉬 트랭크

<크로니클>(2012)은 십대 소년이 쌓아둔 울분이 초능력과 만나 폭발했을 때의 가공할 공포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예상치 못한 데뷔작이었습니다. 파운드 푸티지와 할리우드 클래식, 슈퍼히어로 장르를 한 덩어리로 결합한 신선한 시도, 현실을 순식간에 초현실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연출은 조쉬 트랭크를 할리우드의 야심차고 유망한 감독으로 발돋움케 했습니다. 신인이었던 데인 드한 또한 <크로니클>로 주류 영화계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크로니클>(왼쪽)과 <판타스틱 4>(오른쪽)

그의 두 번째 영화 <판타스틱 4>(2015)를 생각하면 <크로니클>의 성공은 재능 있는 시나리오 작가 맥스 랜디스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네요. <크로니클> 덕에 메이저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 영화까지 연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조쉬 트랭크는 프랜차이즈 슈퍼히어로 영화가 대중을 위해 갖추었어야 할 의무와 미덕을 모두 내팽개치기에 이릅니다. 판권 싸움 때문에 후딱 영화를 만들어 내놓길 원했던 스튜디오를 탓해야 할까요. 영화의 장르와 타깃 관객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감독의 자의식 과잉을 탓해야 할까요. 감독이 현장에서 약에 취해 미쳐 있었다는 루머도 있었습니다. 뭐가 됐든 <판타스틱 4>역대 최악의 슈퍼히어로 영화 리부트라는 평가와 함께 제36회 골든라즈베리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작품상, 최악의 속편상까지 수상하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할많하않….

크로니클

감독 조쉬 트랭크

출연 마이클 B. 조던, 알렉스 러셀, 데인 드한, 애슐리 힌쇼

개봉 2012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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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4

감독 조쉬 트랭크

출연 마이클 B. 조던, 케이트 마라, 마일즈 텔러, 제이미 벨, 토비 켑벨

개봉 2015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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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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