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미인’. 배우 김혜수를 대표하는 수식어입니다.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외모를 지칭하는 한편, 몇몇 작품에서 뚜렷하게 보여준 쾌활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상당 부분 ‘어두운’ 인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굿바이 싱글>은 오랜만에 ‘밝은’ 김혜수를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드라마 <시그널>에서 미제사건담당팀 차수현 팀장보다 말단 형사 차수현을 좋아했던 이들이 더욱 반길 만한 작품입니다. 왕년의 톱스타 고주연(김혜수)은 어린 남자친구의 외도에 충격 받고 ‘영원한 내 편’이 될 아이를 갖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의사에게 폐경을 통보 받고,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은 중학생 단지(김현수)에게 그 아이를 자신이 키우면 안 되겠냐고 제안합니다. 마흔을 넘기고도 철들 가능성은 요만치도 없는 왕년의 톱스타 고주연을 연기한 최근작 <굿바이 싱글>과 더불어 ‘밝은’ 김혜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 네 편을 소개합니다.
첫사랑의 모든 감정
<첫사랑>의 영신
김혜수는 1986년 배우 데뷔 이래 오랫동안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그늘진 사연을 품고 있는 역할을 많이 맡아왔습니다. <첫사랑>(1993)은 그녀가 자기 또래를 연기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첫사랑> 속 영신은 제목 그대로 첫사랑을 경험하는 여자입니다. 극장이나 다방을 드나드는 걸로 어른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미대 신입생 영신은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연극 연출가 창욱(송영창)을 짝사랑합니다. 영화는 첫사랑의 설렘을 동화적인 터치로 그립니다. 자연스러움보다는 극적인 연출을 강조한 방향에 맞춰, 김혜수 역시 다양하고 도드라지는 표정 연기에 힘을 실어 영신의 마음을 ‘눈에 띄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더해,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는 김혜수의 내레이션은 볼빨간 표정과 엷게 떨리는 몸짓으로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죠.
김혜수는 청룡영화상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첫사랑>을 두고 “한해에 적어도 2,3번은 보며 스스로를 다잡는 영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에도 불구하고, 서울 관객 5천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비운의 걸작으로 남았습니다. ▷<첫사랑> 네이버 DB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신라의 달밤>의 주란
주란은 동생 주섭(이종수)이 잡혀온 파출소에 들어와 다짜고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으로 <신라의 달밤>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사히 동생을 빼낸 후엔 가차 없이 동생을 때려눕히죠. <신라의 달밤>에서 두드러지는 김혜수의 장기는 주란의 다채로운 매력을 능글맞게 그려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녀는 정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홀로 동생을 키운 주란은 주섭을 물심양면으로 아낍니다. 식사 때만 되면 식당 안을 가득 채우는 여학생에게도 가족처럼 살갑죠. 그런 유쾌한 매력에 생판 다른 성격의 친구 기동(차승원), 영준(이성재) 모두 마음을 뺏깁니다. 또한 주란은 매순간 당찹니다. 그녀의 강인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그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납치당해 살해 협박을 받는 와중에도 바득바득 말대꾸를 해서 상대방의 복장을 터트리는 강철멘탈과 사랑하는 남자를 확실하게 사로잡을 줄 아는 여자여자함까지,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신라의 달밤>은 한국에서 드물게 코미디 영화만을 고집하는 김상진 감독의 2001년 작입니다. 서울에서만 160만 명을 동원한 <신라의 달밤>은 <조폭마누라>의 흥행과 더불어 '조폭 코미디'는 성공한다는 속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달밤> 바로보기
기묘한 구심점
<좋지 아니한가>의 미경
데뷔작 <말아톤>으로 단숨에 흥행감독이 된 정윤철 감독은 차기작으로 자신의 개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좋지 아니한가>(2007)를 연출했습니다. 이 작품은 톱 여배우의 자리를 고수해온 김혜수의 경력에서 꽤 이질적인 작품입니다. 상업영화 평균제작비에 못 미치는 작은 규모의 영화였고, 역할도 조연에 가깝습니다. 미경의 모습 또한 낯섭니다. 보일러가게 경리로 일하다가 갑자기 무협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백수인 미경의 후줄근한 행색은 섹시한 드레스로 매해 화제를 모은 배우 김혜수의 이미지와 생판 다릅니다. 물론, 아무리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어도 김혜수의 미모는 여전하지만.
가족 구성원 중 이모의 존재처럼, 미경은 서사의 구심점에서 살짝 벗어나 있습니다. 심창수(천호진)와 그의 아내(문희경), 아들(유아인), 용선(황보라)이 모두 집 바깥에서 자신의 사건을 키워나갈 때 미경은 룸펜처럼 집구석에 누워 시간을 죽입니다. 그럼에도 미경은 그 사건들의 바깥에서 기묘하게 중심을 붙듭니다. 주인공 가족이 처해 있는 처지를 정확히 은유하는, 전기밥통이 터지는 장면에 미경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작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걸 증명합니다. ▷<좋지 아니한가> 바로보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이층의 악당>의 연주
사실 <이층의 악당>(2010)의 연주는 유머러스한 인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코미디를 전면에 내건 <신라의 달밤>의 주란과 비교하면 연주는 한없이 어두운 사람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남편을 잃고 찾아온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는 여태까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여자입니다. 어린 딸을 지키지 못할망정 늘 자신이 늙었다는 망상을 토로하며 어리광을 부리죠.
김혜수 스스로도 연주를 “자기가 맹한 줄도 모를 만큼 맹한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연주의 맹함 자체는 그다지 우습지 않습니다. 손재림 감독 역시 그녀에게 “코미디를 의식하지 않은 연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층의 악당>에서 한석규, 김기천, 이용녀 등이 열심히 유머를 만들어낼 때, 연주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헤맵니다. 연주라는 캐릭터가 주는 기묘한 유머는 그 지점에서 만들어집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기에도 갈팡질팡 하며 현실을 도피하려는 연주의 모습은 끝내 <이층의 악당>의 또 다른 유머 코드가 됩니다.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독특한 화법의 코미디를 만든 바 있는 손재림 감독은 이와 같은 별난 유머를 곳곳에 새겨놓은 <이층의 악당>으로 한국 코미디의 독보적인 재능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이층의 악당> 바로보기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