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였습니다. 배우나 감독이 아닌, '영화' 자체를 덕질하는 그들입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건 기본이고 영화 관련 굿즈를 제작해 팬들끼리 공유하고 자체적으로 모여 영화관을 대관하기까지 합니다. '아갤러', '아수리언' 그리고 '불한당원'까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해당 영화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요? 다양한 이유가 섞여있을 테지만 굵직한 이유들을 모아봤습니다.


<아가씨> 아갤러
아갤의 큰 특징 아벤져스 (출처: 영화 아가씨 마이너 갤러리)

N차 관람, 떡밥 정리는 필수
'아갤러'는 인터넷사이트 디시인사이드 내 '영화 아가씨 마이너 갤러리'(이하 아갤)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은 오직 영화 속 캐릭터와 영화에 집중합니다. <아가씨> 출연 배우에 관한 이야기라도 영화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금지됩니다. 아갤러는 N차 관람(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할 때마다 떡밥을 정리한 글과 관람 포인트를 공유합니다. 극장에서만 103차를 찍었다는 팬의 포토카드 티켓 인증 글이 올라온 적도 있습니다. 아갤러들은 <아가씨>를 토대로 그림, 만화, 글 등 2차 창작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아가씨

감독 박찬욱

출연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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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차를 찍은 아갤러. 결국 111차를 찍었다고 한다. 출처: 아갤 미니시(MINISI)

무엇보다 그들이 이뤄낸 가장 큰 성과는 OST 음반과 시나리오 단행본 발간을 성사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애초 계획에 없던 OST 음반과 시나리오 책을 내달라고 제작사에 요청했고, 결국 OST 음반과 <아가씨 각본>이 발간되기에 이릅니다. <아가씨> 감독판의 경우 블루레이로만 출시할 예정이었지만 아갤러들의 요청으로 극장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표지로 실린 'magazine M' 잡지는 품절되어 창간 이래 최초로 재발행하는 사례를 남겼습니다.

아갤러들은 왜 <아가씨>에 열광하는가
일방적인 덕질이 아닌 쌍방향 소통인 점이 아갤러 팬덤을 더 활발히 불태웁니다. 아갤러가 <아가씨>의 제작사 모호필름과 용필름에게 조공(선물을 전달)을 하면, 제작사는 감사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정성스런 후기글을 아갤에 올립니다. 단행본 <아가씨 각본> 발간 직전 용필름 측은 '실제로 영화화된 시나리오와 이번에 발간하는 <아가씨 각본>과는 4가지의 다른 점이 존재한다'고 아갤러에게 미리 찬찬히 설명해주기도 하죠. <씨네21>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도 "(아갤에 들어가는 걸) 참는 게 힘들다. 와이프가 재미있는 글을 엄선해 보여주니까 겨우 산다"며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아갤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제작사 용필름의 인증글 (출처: 아갤)

무엇보다 여성들이 연대하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더 큰 환호를 이끌어내는 듯합니다. <아가씨>는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 두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다른 보통의 영화 서사와 큰 차별점을 보입니다. 아갤러들은 이런 차별점에 더욱 열광합니다.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떡밥을 발견하는 재미도 영화를 보고 또 보게 만듭니다. 아갤러들은 <아가씨>의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한 해석본을 공유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아가씨>의 새로운 해석이 궁금하다면 아갤의 공지 '관람포인트 모음' 글을 보시길 추천합니다.

출처:트위터 @neys0125 / 아갤러 정그림 / hamjooo

아갤 용어 정리
아벤져스 (아가씨+어벤져스) 박찬욱 감독, 하정우, 김민희, 김태리, 조진웅
수키데코 (숙희+히데코) 김민희, 김태리
아갓시 (아가씨+시간) 2016년 6월 1일에 개봉한 <아가씨>에 맞춰 오전·오후 6시 1분마다 '아갓시', 'ㅇㄱㅅ'라는 글을 게시한다.
배운변태, 우리욱 박찬욱 감독
내인망구타숙 영화 속 대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의 줄임말


<아수라> 아수리언
아수리언들의 등급표, 영화 관람횟수에 따라 직급이 부여된다

안남시의 매력
'아수리언'은 지난해 9월 28일 개봉한 영화 <아수라>의 열혈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수리언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허구의 장소, 안남시라는 공간을 실제처럼 여긴다는 게 특징입니다. 그들은 안남시를 적극적으로 구체화시킵니다. 한 아수리언이 만든 안남시청 홈페이지(http://www.iannam.net)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엄청난 디테일을 자랑합니다. '수원 전통 육개장 안남점 프랜차이즈 점주님을 모십니다' 같은 재치있는 글들도 올라와 있고요. 트위터엔 안남시체육회, 안남시 여성회관, 국립 안남대학교, 안남수도사업본부, 안남 시민일보 등의 이름을 내건 계정들도 존재합니다.

아수라

감독 김성수

출연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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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시의 마크들 (출처:트위터)

작년 11월 20일 CGV 대학로 상영관을 대관해 연 '안남시민의 밤'은 아수리언들의 큰 축제였습니다. 아수리언들은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 영화를 제작한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 주연배우 정우성과 함께 <아수라>를 본 뒤, 영화 속 대사를 함께 외쳐보기도 했죠. (열광적인 아수리언들을 보고 정우성이 "여러분, 다들 미쳤어요?"라고 말하기도...) 아수리언들의 열기에 감동받은 김성수 감독은 뒤풀이까지 참석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담아낸 <아수라>의 열혈팬답게 그들은 오프라인에서도 움직입니다.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광화문 촛불 집회 당시 '안남시민연대'라 적은 깃발을 들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온 아수리언 (출처: 트위터 kuma)

영화가 개봉한 지 한참 지났지만, 아수리언들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아수리언들은 '제1회 성수영화제'를 열어 김성수 감독의 작품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를 하루종일 틀 계획도 세웠습니다. 아쉽게도 비싼 저작권료 때문에 실제로 개최되진 못했지만, 대신 김성수 감독에게 영화제 포스터를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오는 9월 28일 <아수라> 개봉 1주년 행사를 하자고 과거 아수리언들과 한재덕 대표가 약속한 적도 있습니다. 이 약속이 실제로 이행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아쉽게 개최되지 못한 김성수 영화제 포스터 (출처: 트위터 아수라라랜드)

기존의 누아르 영화와 다르다
<아수라> 개봉 당시 극과 극의 평이 쏟아지고 있을 때, 밴드 '밤섬해적단'의 드러머 권용만이 <아수라>를 4번이나 봤다며 "정의로운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익숙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고 호평한 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당시 '권용만 때문에 아수라 보고 싶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죠. 이게 인연이 되어 최근 '밤섬해적단'의 다큐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개봉 당시 아수리언들의 적극적인 영화 홍보가 이어졌습니다. 영화 GV 현장에 <아수라> 김성수 감독과 권용만이 함께 참여하기도 했죠.

출처: 트위터 안남피드백받은고양OI

<아수라>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259만명에 그쳐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순 없지만, 아수리언에게는 그 어떤 걸작보다도 훌륭한 영화입니다. 그들은 <아수라>가 좋은 이유로 기존의 권선징악이 뚜렷한 한국영화와 다르게 '오로지 폭력과 악만 있는' 영화라는 점을 꼽습니다. 판에 박힌 권선징악의 엔딩이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파멸로 치닫는 파격적 엔딩을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으로 꼽습니다.

일부 아수리언은 기존 누아르 영화와 달리 여성을 도구화시키지 않았다는 점도 이유로 듭니다. <씨네21>이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아수리언 '님이럴'은 "기존의 누아르 영화와 달리 <아수라>는 남자든 여자든 총알 두 발로 깔끔하게 죽인다"는 이유를 들며 영화의 장점을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아수리언 '안남시 여성회관'은 "여성 대접이 아닌 인간 대접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악'만 존재하는 <아수라>를 표현한 짤 (출처: 트위터 아수라라랜드)

아수리언이라면 한 번쯤 외쳐봤을 멘트
성수는 화의 이다! 줄임말로 김영신이라고 부르기도
정우성은 연기의 신이다!
아수라는 최고의 폭력영화다!
박성배, 밖으로 나와! 영화 속 대사
무슨 동네요? = 부자동네!! / 안 들립니다. 무슨 동네요? = 부자동네요!!! 영화 속 대사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불한당원

흥행 참패 뒤에 불한당원이 있다
'불한당원'은 영화 <불한당>의 열성팬들입니다. 지난 5월 17일에 개봉한 <불한당>은 최종 관객수 93만명에 그쳐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불한당원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중입니다. 불한당원끼리 모여 대관 상영을 진행하면 2초 만에 1400석이 매진되는 건 기본이고요. 영화에 등장하는 '오세안 무역' 회사 수건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명함이나 '불한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옷, 배지, 맥주잔, 라이터 등 다양한 굿즈들도 제작합니다.

불한당 굿즈들 (출처:트위터)


<불한당>은 칸 국제영화제에 진출했음에도 국내 개봉 당시 변성현 감독의 SNS 발언 논란으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영화 열혈팬들이 상영관 확보를 위해 뭉친 것이 불한당원들의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들은 개봉 2주차부터 꾸준히 대관 행사를 열었고, 배우들이 참석하기라도 하면 불한당원이 스스로 GV 사회자를 맡아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불한당원들의 열정에 보답하기 위해 CJ엔터테인먼트는 '<불한당> Thank You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죠. 이날 설경구는 영화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오기도 했습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감독 변성현

출연 설경구, 임시완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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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Thank You 상영회

촬영 장소였던 미림분식은 불한당원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는데요. 특히 설경구, 김희원이 떡볶이를 먹은 8번 테이블 자리를 차지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습니다. <불한당> OST와 배우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모두 품절됐습니다. 영화를 감명깊게 본 가수 안예은은 <불한당>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 '파아란'을 발표했습니다. 불한당원들은 변성현 감독을 '아버지'라 치켜세우고 설경구에게 '설경꾸꾸', 김희원에게 '희원애기'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미림분식 인증글 (출처: 트위터 @cbdangwon)

누아르를 가장한 멜로 영화
불한당원이 <불한당>에 꽂히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누아르를 가장한 멜로 영화'라는 점입니다. 얼핏 봤을 땐 대놓고 드러나지 않아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변성현 감독이 "둘 사이의 관계는 브로맨스 이상이다. 멜로에 가깝다"고 한 말을 염두에 두면 '사랑해선 안 될 이들의 사랑물'이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설경구는 한 인터뷰에서 "김희원은 나를, 나는 임시완을 사랑했다"고 언급하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재호(설경구)를 바라보는 병갑(김희원), 현수(임시완)를 바라보는 재호의 상황에 감정 이입되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불한당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죠.

팬이 만든 포스터 (출처: 트위터 송장)

불한당원에게 N차 관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불한당>은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는 서사를 가지기 때문이죠. 팬들은 여러 번 관람하며 숨은 의미를 찾습니다. 미장센과 조명을 분석하고 대사와 연출을 해석해 인물들을 파악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규정하지 않은 채 여러 가능성을 두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기도 하죠.

또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이 이전 영화들보다 덜하다는 점이 20~30대 여성을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불한당>에도 여성을 도구화하는 대목이 있긴 하나, 모성애 같은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끝까지 제 뜻을 펼쳐나가는 '천 팀장'(전혜진) 캐릭터를 <불한당>의 장점으로 꼽습니다.

<불한당> 대관행사 때 쓰인 플래카드들 (출처:트위터)

불한당원이라면 한 번쯤 외쳐봤을 멘트
우리가 남이가!

하라쇼! '잘했어'라는 뜻의 러시아어 대사
냉면은 평양냉면 병갑이 예전에 평양냉면이 아니라 함흥냉면을 시켰다는 이유로 삼촌(이경영)으로부터 맞았다고 재호에게 상처를 보여주며 하소연하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
감는다 재호가 현수를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한 영화 속 대사
지금 비가 엄청 내려요. 곧 가을일 것 같아요. 설경구가 불한당원에게 전하는 편지 중 일부, 이 멘트로 수많은 감성짤이 만들어졌다.


아갤러, 아수리언,  불한당원은 각기 다른 이유로 등장한 팬덤이지만, 그들은 모두 영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특히 <아수라>와 <불한당>의 경우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엄청난 팬들을 얻게 된 경우라 더 놀랍습니다. 에디터도 이번 기회에 세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인데요. 어쩌면 아갤러, 아수리언, 불한당원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씨네플레이 인턴 에디터 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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