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007' 시리즈의 'M'이라고 하면 금세 얼굴을 떠올릴 배우, 주디 덴치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에서 건너온 청년과 친구가 된다는 내용의 드라마 <빅토리아 & 압둘>입니다. 주디 덴치와 <미세스 헨더슨 프레젠트>(2005), <필로미나의 기적>(2014)에서 함께 일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연출했습니다.<빅토리아 & 압둘>에서도 원숙한 연기를 보여준 영국의 노장, 주디 덴치의 지난 날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한가운데 있는 단발머리 어린이가 주디 덴치.

주디 덴치는 1934, 영국 요크의 히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배우였고, 어머니가 요크 극장의 의상 관리자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연극계와 지속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땐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으나 형제를 따라 스피치 앤 드라마 센트럴 스쿨에 다니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57, 올드빅 극단에서 활동하며 <햄릿>의 오필리아 역으로 공식 데뷔했습니다.

올드빅 극단에서 올린 <햄릿>의 오필리아.
<언 에이지 오브 킹스>의 '헨리 5세' 편 중 캐서린.
<햄릿>의 헤큐바.
햄릿

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케네스 브래너, 데릭 제이코비, 줄리 크리스티, 케이트 윈슬렛, 리처드 브라이어스, 니콜라스 파렐

개봉 1996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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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나이부터 영국국립극단, 로열셰익스피어극단 등을 거치며 쭉 연극계 스타로 각광받았고 1964, <더 써드 시크릿>으로 스크린에 데뷔합니다. 연극, 뮤지컬, 영화, TV에서 두루 활동했고 특히 TV시리즈 <언 에이지 오브 킹스>(1960), TV영화 <맥베스>(1979), 영화 <헨리 5>(1989), <햄릿>(1996) 등 셰익스피어극을 바탕에 두고 만든 작품들에 자주 출연했습니다. 

주디 덴치와 마이클 윌리엄스의 결혼식.
주디 덴치와 마이클 윌리엄스 부부.

1971, 동료 배우 마이클 윌리엄스와 결혼했고 이듬해 딸 핀티를 출산했습니다. 주디 덴치는 핀티를 낳고 가정에 전념하고자 연기를 그만둘 생각도 했으나 마이클 윌리엄스의 내조로 공백 없이 연기를 해나갈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가족들과 데임 훈장 수여 기념사진을 찍은 주디 덴치.

데뷔하고 30여년을 영국 연극 무대의 주역으로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1988년엔 데임’(Dame)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007 골든 아이>
<007 네버 다이>
<007 언리미티드>

(<햄릿>의 헤큐바가 예외적이지만) 현재의 주디 덴치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위엄과 권위는 <007 골든 아이>(1995) M에서부터 시작합니다. '007'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배우가 M을 연기한 사례로, 실제로 1992년부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정보기관 MI5 총수로 일했던 스텔라 리밍턴을 모델로 한 캐릭터였습니다. <007 골든 아이> 이후 <007 네버 다이>(1997), <007 언리미티드>(1999), <007 어나더데이>(2002), <007 카지노 로얄>(2006),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 <007 스카이폴>(2012)까지 총 7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M으로 인해 사건이 생겨나고, M의 퇴장으로 끝을 맺는 <007 스카이폴>은 주디 덴치에게 헌정된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007 스카이폴

감독 샘 멘데스

출연 랄프 파인즈,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개봉 2012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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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브라운>

첫 주연작인 <미세스 브라운>(1997)은 주디 덴치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1861, 남편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 비탄에 잠긴 빅토리아 여왕을 연기했습니다. 공허한 나날을 보내던 여왕은 마부 브라운에게 깊이 의지하게 되고, 세간에선 두 사람의 친분을 비난하며 여왕을 '미세스 브라운'이라는 치욕적인 별명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 작품 이후로 감독 존 매든과는 꾸준히 좋은 파트너로 작업을 이어갑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해 제7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2),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2015)까지 존 매든의 작품에서 활약했습니다.

미세스 브라운

감독 존 매든

출연 주디 덴치, 빌리 코놀리

개봉 199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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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인 러브

감독 존 매든

출연 기네스 팰트로, 조셉 파인즈, 제프리 러쉬, 콜린 퍼스, 벤 애플렉, 주디 덴치

개봉 199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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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 덴치와 하비 웨인스타인의 화기애애하던 한 때.

주디 덴치가 '여성적 권위'를 상징하는 배우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때 미라맥스의 하비 웨인스타인은 <미세스 브라운>을 감명 깊게 보고 미국에 소개했습니다. 이 일로 미국에서 <미세스 브라운>이 뜻밖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뒀고, 50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듬해 주디 덴치는 제7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로도 올랐습니다. 주디 덴치는 몇 년 뒤 "하비에게 대단히 고맙다. 그날 이후 나는 하비의 이름을 내 엉덩이에 문신으로 새겼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 최근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이후 주디 덴치는 공식 성명을 내 "웨인스타인의 행각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매우 충격적"이라고 밝히며, 성추문을 폭로한 여성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웨인스타인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표했습니다.

<아이리스>

2001년엔, 배우자인 마이클 윌리엄스가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주디 덴치는 곧장 <초콜릿>(2000)에서 함께 일했던 라세 할스트롬의 신작 <쉬핑 뉴스>(2001)를 촬영했습니다. 동시에 <아이리스>(2001)에서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노년을 연기했습니다. 주디 덴치는 "슬픔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든다. 나는 연기를 하며 그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그 말이 적확했던지, <아이리스>에서 주디 덴치는 알츠하이머로 무너져가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리스를 무시무시하게 연기합니다. 알츠하이머 노인을 곁에서 가까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공허하고 순수한 얼굴이 어떤 것인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이리스를 연기하고 있는 베테랑 배우 주디 덴치에게서 어린아이 같은 그 순진한 표정이 나타났을 때,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리스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편은 짐 브로드벤트가 연기하는데, 세월과 관록이 만들어 낸 노년 배우들의 앙상블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빚어냅니다.

현재까지도 무대와 스크린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연기에 매진하는 진정한 노장, 주디 덴치의 최근작 중 에디터가 특별히 좋아하는 세 편을 꼽았습니다. <아이리스>를 넣고 싶었지만, 이미 관련 내용을 위에 적었으니 참고해 주세요! 주디 덴치의 아름다운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노트 온 스캔들>(2006)

조이 헬러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주디 덴치와 <아이리스>를 작업한 바 있는 리처드 이어가 연출했습니다. 고독한 역사교사 바바라(주디 덴치)가 젊고, 예쁘고, 활달해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된 신임 미술교사 쉬바(케이트 블란쳇)의 약점을 잡아 쉬바를 통제하려다 실패하는 이야깁니다주디 덴치는 비이성적인 집착과 망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괴물을 섬뜩하게 연기합니다.

<J. 에드가>(2012)

FBI를 창설하고 48년간이나 국장 자리에 앉았던 수수께끼의 인물, 존 에드가 후버를 조명한 전기 영화입니다. 주디 덴치는 에드가 후버의 어머니 앤 마리를 연기합니다. 정치과학적으로 공과가 매우 선명한 에드가 후버는 정치인, 학자 등 권력과 지성을 가진 자들을 그들의 사생활 정보로 쥐락펴락했던 비선실세였으며, 매카시즘 광풍의 막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심약한 동성애자이기도 했던 에드가 후버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어머니 아래서 굉장한 심적 압박을 느끼며 자랐고 그 영향으로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영민하고 여린 아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려 들며 아들을 끝내 비정한 야심가로 키워내는 데 성공하는 앤 마리에게서 어쩐지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주디 덴치의 분량은 매우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깁니다.

<필로미나의 기적>(2014)

주디 덴치가 연기하는 필로미나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입양된 아들을 늘 마음속에 품고 사는 여인입니다. 필로미나는 작가 마틴(스티브 쿠건)과 아들의 자취를 쫓기 시작합니다. 필로미나는 주디 덴치가 그간 뛰어나게 연기해 온 까탈스럽고 엄격한 캐릭터와 몹시 다른, 낙천적이고 유연한 할머니입니다. 어쩐지 주디 덴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귀여움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셰익스피어 추종자(!)들의 뮤즈답게, 현재 주디 덴치는 아메리칸 셰익스피어 센터의 고문이자 영국 전역의 학생들이 셰익스피어극을 공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셰익스피어 스쿨 재단의 후원자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주디 덴치는 말했습니다. "나는 뭔가를 시도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쳤다. 사람들은 자주 내게 은퇴하지 않을 건지를 묻곤 하지만,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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