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배우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 “아직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다”고 말하던 그를 우리는 서둘러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배우 김주혁은 1998년 S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수의사가 되길 꿈꿨다. 김주혁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불현듯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맹활약하던 김무생이었지만, 김무생은 오히려 아들이 배우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드라마 <흐린 날에 쓴 편지>와 <카이스트>의 명환 역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그는 2001년 개봉한 영화 <세이 예스>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1990년대까지 최고의 스타인 박중훈과 함께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박중훈의 연기 변신이 크게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기도 했다.

- 세이 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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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성홍
출연 박중훈, 추상미, 김주혁
개봉 2001 대한민국
이때부터 김주혁은 2000년대를 바쁘게 달려나갔다. 영화 <YMCA 야구단>에서 일본 유학생 오대현 역으로, 그리고 드라마 <라이벌>의 민태훈 역으로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점차 각인시켜갔다. 두 인물은 성격이 다르지만 극의 중심에서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다. 김주혁은 그의 성격대로 착실하게 극에 녹아내려 탄탄한 버팀목이 됐다.

- YMCA 야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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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현석
출연 송강호, 김혜수
개봉 2002 대한민국
배우 김주혁의 장점이 딱 그랬다. 엄청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고, 연기 방식도 튀는 편이 아니었다. 인물과 상대방의 성격을 조화시켜 화면에 드러내는 게 그의 무기였다.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 이야기인 <싱글즈>에서 그의 장점은 명백하게 빛났고, 바로 뒤이어 2004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주연으로 발탁돼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강자로 떠올랐다.

- 싱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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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권칠인
출연 장진영, 이범수, 엄정화, 김주혁
개봉 2003 대한민국

-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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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석범
출연 김주혁, 엄정화, 김가연
개봉 2004 대한민국
그 이미지의 정점을 찍은 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다.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작가와 <별을 쏘다>,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전도연과의 만남이었다. 말단 형사 최상현 역으로 분한 김주혁은 성실하거나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를 뒤집고 열혈 형사로 변신했다. 시청률 30%를 넘어 3년 만의 드라마 복귀에서 성과를 거뒀다.

- 프라하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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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신우철, 김형식
출연
방송 2005, SBS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김주혁은 연기 욕심을 쏟아내듯 작품을 찍었다. <광식이 동생 광태>에선 소심하게 짝사랑만 하다가 기회를 놓친 순둥이 광식 역으로 봉태규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일본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사랑따윈 필요없어>에선 호스트 줄리앙 역을 맡아 지금까지와 달리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청년이 변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 광식이 동생 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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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현석
출연 김주혁, 봉태규, 이요원, 김아중, 정경호
개봉 2005 대한민국

- 사랑따윈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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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철하
출연 김주혁, 문근영
개봉 2006 대한민국
가장 아쉬운 건 <싱글즈>의 장진영과 다시 만난 <청연>이다. 박경원이란 친일 인물을 미화한다는 비난이 쏟아져 대중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 채 물러가야 했다. 박경원을 연기한 장진영도, 한지혁을 연기한 김주혁도 이 영화에 애착이 있었기에 더 안타까운 결과였다.

- 청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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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윤종찬
출연 장진영, 김주혁
개봉 2005 대한민국
잠시 휴지기를 가진 김주혁은 2008년 <아내가 결혼했다>로 돌아왔다. 2006년 세계 문학상 수상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김주혁은 자유분방한 아내 주인아(손예진) 때문에 쩔쩔매는 남편 노덕훈 역을 맡았다. 사랑에 빠진 설렘부터 아내의 사랑관 때문에 무너지고, 그러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내를 어떻게든 잡고 싶어 애걸복걸하는 그의 연기는 현실적인 공감대를 모았다. 영화 출연 이후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2009년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에 오르기도 했다.

- 아내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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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윤수
출연 손예진, 김주혁
개봉 2008 대한민국
드라마 <떼루아> 이후 선택한 영화는 <방자전>. 이몽룡 옆에서 촐싹대던 고전적인 방자는 '현대 소심남'의 대표 배우였던 김주혁으로 인해 우직하고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방자로 탄생했다. 그 자신도 "당연히 이몽룡일 줄 알았"지만 시나리오를 읽은 후엔 방자 역으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 방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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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대우
출연 김주혁, 류승범, 조여정
개봉 2010 대한민국
<방자전>을 시작으로 <적과의 동침> 인민군 김정웅, <투혼>의 야구 선수 윤도훈, <커플즈>의 유석으로 연기 폭을 넓혀나갔고 자신의 연기 활로를 드라마로 향했다. 50부작, 135부작의 <무신>과 <구암 허준>이란 사극 대작으로 얼굴을 비치면서 긴 호흡을 가지고 작품과 캐릭터를 챙기는 법을 익혀나갔다.
두 해를 사극으로 보낸 김주혁의 차기 행보는 유별났다. 스스로 "낯을 가린다", "내성적이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으면서도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 합류했다. 그동안 '배우 김주혁'으로만 대중에게 알려졌던 그가 '인간 김주혁'으로 대중 앞에 섰다.
성실해 보이는 이미지 뒤로 유쾌하면서도 멤버들을 챙기는 맏형의 모습, 실수나 불운도 잦았던 인간적인 모습은 그에게 '구탱이형'이란 별명을 안겨줬다. 그동안 '광식이'나 '허준' 등 배역 이름으로 불리던 김주혁이 대중에게 친근한 배우가 된 순간이었다. 2015년 11월 29일 마지막 방영분에서 그는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참아진다. 그 순간에 내가 이 팀에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배우이자 예능인으로서의 딜레마를 진솔하게 밝혔다.
<나의 절친 악당들>과 <뷰티 인사이드> 출연 이후 스크린으로 돌아온 작품은 <좋아해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에서 김주혁은 최지우, 강하늘과 호흡을 맞췄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김주혁은 유독 빛났다.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뭔가 내려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자신의 설명처럼 '1박 2일' 출연 이후 김주혁은 완전히 달라진 연기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 '시즌 2'를 쌓아갔다.

- 좋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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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박현진
출연 이미연, 최지우, 김주혁, 유아인, 강하늘, 이솜
개봉 2015 대한민국
정치인 김종찬 역으로 출연한 <비밀은 없다>는 손예진과 김주혁 모두 대중에게 '배우'라는 인장을 확실히 새기게 한 작품이었다. 김주혁은 딸의 실종에도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려는 정치인 캐릭터를 자신의 기존 톤을 내려놓으며 완성했다.

- 비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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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경미
출연 손예진, 김주혁
개봉 2015 대한민국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당신자신의 것과 당신의 것>에선 한바탕 다투고 사라진 여자친구를 찾아 헤매는 화가 영수 역을 맡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배우 자신과 인물이 기묘하게 얽힌 연기(김주혁은 실제로 발을 다쳐 깁스를 하고 나온다)로 전과는 다른 '집착남'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이유영을 만나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

-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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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홍상수
출연 김주혁, 이유영, 김의성, 권해효, 유준상
개봉 2016 대한민국
2017년은 시작부터 좋았다. 이유영과의 공개 연애와 차기성 역으로 출연한 <공조>가 780만 명을 돌파하면서 그의 필모그래피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북한 범죄조직의 수장 차기성은 악역에 갈증이 있던 김주혁에게 알맞게 찾아온 기회였다. 김주혁은 차기성이 지닌 명분을 중심에 두고 태닝과 운동으로 외면을 만들어갔다. 액션에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매 장면마다 카리스마를 발산해 긴장감의 밀도를 높였다.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이전 작품을 놓쳤던 사람에게도 "김주혁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어?"라는 놀라움을 안겨줬다.

- 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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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성훈
출연 현빈, 유해진, 김주혁
개봉 2016 대한민국
5월엔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남도진 역으로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극의 긴장감을 좌지우지하는 존재감을 다시 드러냈고, 4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찾아온 <아르곤>은 호평을 받으며 데뷔 20년이 다 돼가는 배우의 가능성을 다시 짚어줬다. 10월 27일 '더 서울 어워즈'에서 <공조>의 차기성 역으로 영화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도 <흥부>와 <독전>(가제)의 주연으로 스크린에 찾아올 예정이었다. 제2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순간, 10월 30일 김주혁은 우리 곁을 떠났다.

- 석조저택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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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식, 김휘
출연 고수, 김주혁, 문성근, 박성웅
개봉 2017 대한민국
이렇게 김주혁의 출연작을 정리하면서야 비로소, 이 배우가 얼마나 묵묵히, 성실하게 연기를 펼쳤는지 새삼 알게 됐다. 올해를 무사히 보내고 내년을 맞이했다면, 배우 생활 20년에 묵직한 연기를 다시 보여줬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주혁은 <아르곤> 종영 인터뷰에서 "연기하는 게 굉장히 재미있다. 이제야 조금씩 연기에 대해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매일 연기에 대해 고민한다. 연기 고민을 하지 않는 순간 배우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연기를 즐기며 관객들을 사로잡은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이 눈물짓게 만든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