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 안에서 서로 맞붙으려면 2020년이나 되어야 가능한 얘기지만, 서로 다른 영화로 두 거대 괴수가 같은 주에 맞붙는 빅 매치가 성사되었다. 킹콩의 정통 후예를 자처하는 <: 스컬 아일랜드>12년 만에 일본 본토에서 부활한 <신 고질라>38일 동시 개봉 대진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레전더리 픽쳐스에선 몬스터버스의 일환으로 <: 스컬 아일랜드> 이후 고질라 속편을 2019년에 개봉시키고, 그 다음 작품에서 킹콩과 고질라의 대결을 준비 중이다. 이미 일본에선 1962년 고질라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킹콩 대 고질라>라는 작품이 나온 바 있는데, 2020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그 리메이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3월초 한국 땅에서 펼쳐지는 사전 승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는 <: 스컬 아일랜드>와 달리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을 맡은 <신 고질라>는 국내에 지각 개봉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작년 여름에 개봉해 <너의 이름은.>과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어낸 바 있고, 82억엔으로 실사영화 부문 흥행수익 1위를 기록했다. ‘쇼와 고질라헤이세이 고질라’, 그리고 밀레니엄 고질라를 거쳐 이번에 다시 새롭게 재정비한 이 거대 괴수 특촬물은 007도 울고 갈 만큼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다. 지난 60여년간 고질라는 끊임없이 다양한 적들과 미생의 인간들을 상대해왔다. 무려 30여편(정확히는 이번의 <신 고질라>29번째 작품이다)에 달하는 작품 수도 방대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제작 노하우를 고수해오며 시리즈를 진행/발전시켜왔다는 장인 정신과 아동물/장르물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계층에게 어필해왔다는 대중성과 흥행성은 무엇보다 높이 살 만하다.
 

재난과 원폭의 공포, 고질라

태풍과 쓰나미, 지진이 잦은 일본이란 특수한 국지적 상황과 유일하게 원폭을 당한 나라라는 국제적, 역사적 맥락이 결합돼 고질라라는 독특한 괴수를 탄생시켰는데, 이는 인간이 수습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재난을 상징하는 동시에, 과학과 지식을 맹종한 채 이성적이라 자처하는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고질라는 불가항력적인 재앙신이자 파괴신처럼 다뤄지며, 압도적인 힘과 분노로 일본의 핵 트라우마와 망령처럼 짙게 배인 2차 대전의 광기를 슬쩍 환기시킨다. 재난에 닥친 서민들의 일면을 통해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대처하는 국가나 자위대의 모습을 통해 풍자와 애국심을 곁들이며 일개 오락물을 넘어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와 군사력에 대한 함의도 노골적으로 품고 있다.

츠부라야 에이지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런 요소들은 옅어지며 각종 대괴수들의 태그매치 장으로 변질되었다. 안기라스, 모스라와 킹기도라, 라돈, 헤도라, 가이강, 메가로, 메카고지라와 스페이스고지라, 비오란테, 디스트로이어, 메가기라스 등 각종 강력한 상대들을 차례로 출연시키며 원래 의도와 달리 파괴의 스펙타클과 대전에 방점을 찍고 오락물로 소비되어졌다. 이런 <고질라>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일본 특촬의 대부 츠부라야 에이지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고집 그리고 정성이 이뤄낸 특수효과들인데, 이를 드라마틱하고 박력있게 잘 살려낸 혼다 이시로의 연출이 어우러지며 시리즈의 초석을 다졌다. 그들은 1970년 츠부라야가 타계한 후 1975<메카 고질라의 역습>으로 잠시 멈출 때까지 쇼와 고질라의 신화를 완성시켰다.
 

고질라 사운드의 대부
이후쿠베 아키라

여기에 화룡점정이 된 건 바로 이후쿠베 아키라가 작곡한 음악이다. 그가 매만진 전설적인 테마는 한번 들으면 쉬 잊혀지지 않는 장중하고 강렬한 선율을 가지고 있다. 홋카이도의 토착 민족인 아이누의 전통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스트라빈스키나 버르토크, 그리고 단기간 사사받은 체레프닌 등의 현대적인 시각이 가미돼 리드미컬하면서도 박력 있는 것이 특징인 이후쿠베의 사운드는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저음의 선율로 고질라의 위압감과 공포, 전율과 충격을 단박에 안겨준다. 거기에 합창과 행진곡 스타일도 적절히 가미하며 휴머니즘과 희망적인 요소도 내비친다. 이후쿠베의 음악은 츠부라야의 특촬과 혼다의 연출과 함께 고질라 시리즈를 상징하는 세 요소가 되었다.
 

이후쿠베 아키라 / <킹콩 대 고질라> OST

그는 1954년 초대 <고질라>를 시작으로 <킹콩 대 고질라>, <모스라 대 고지라>, <삼대 괴수 지구 최대의 결전>, <괴수 대전쟁>, <괴수 총진격>, <지구공격명령 고질라 대 가이간>, <메카 고지라의 역습>, <고질라 vs 킹기도라>, <고질라 vs 모스라>, <고질라 vs 메카 고지라>, <고질라 vs 디스트로이어> 등 총 29편의 작품들 중 절반에 가까운 12편의 음악을 담당했다. 007시리즈에서 존 배리가 많은 작품을 담당하며 스파이 음악의 초석을 다졌듯이 이후쿠베 아키라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고질라 시리즈의 스타일과 비전을 제시한 건 물론, 토호의 다른 다수의 특촬물 음악들을 책임지며 일본 SF장르 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이 특촬물이야말로 영화음악이 가진 자율성과 효용음악으로서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며 자신이 왜 그렇게 특촬물에 지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피력한 바 있다.
 

다양한 일본 정상급 영화음악가들의 참여
사토 마사루 / <괴수 섬의 결전 고질라의 아들> OST

이후쿠베 아키라 외에도 다양한 일본 굴지의 정상급 영화음악가들이 <고질라> 시리즈에 참여했는데, 모두 네 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토 마사루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질라의 역습><고질라·에비라·모스라 남해의 대결투>, <괴수 섬의 결전 고질라의 아들>, <고질라 대 메카 고질라>의 음악을 담당하며 이후쿠베 외에 가장 많이 고질라 시리즈에 참여했다.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음악적 파트너로 더 잘 알려진 사토 마사루는 이후쿠베 아키라와 친했던 하야사카 후미오의 문하로, 온갖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들을 소화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간단한 모티브의 반복적인 전개와 강렬한 저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직선적인 이후쿠베와 달리, 사토는 재즈 사운드를 기반으로 삼아 유연하면서도 미키마우징화된 스코어들로 또 다른 고질라의 모습들을 투영시켰다.

오시마 미치루 / 마나베 리이치로

그 뒤를 이어 여성 영화음악가론 유일하게 오시마 미치루가 세 편의 음악을 맡으며 자신의 주특기인 섬세하고 호쾌한 오케스트럴 사운드를 선사하고 있다. 그리고 일드 작곡가로 더 잘 알려진 핫토리 타카유키와 이후쿠베 아키라에게 사사받은 마나베 리이치로가 각각 2편씩, 그 외 <울트라맨> 시리즈 음악의 아버지인 쿠니오 미야우치, 드라마와 애니·대중음악에서 활동한 코로쿠 레이지로, <드래곤 퀘스트>의 대부이자 우익 작곡가로 알려진 스기야마 고이치, 고질라의 라이벌이자 괴수물의 걸작 헤이세이 <가메라> 삼부작의 음악을 맡은 바 있는 오오타니 코우도 각각 1편씩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마지막 작품이었던 <고질라 파이널워즈>에선 감독인 기타무라 류헤이의 음악적 파트너 모리노 노부히코에, 야노 다이스케와 무려 키스 에머슨이란 희귀한 조합으로 음악을 매조지었다.
 

그리고 사가스 시로의 <신 고질라>
히구치 신지와 사가스 시로

그렇게 시리즈가 멈춘 지 12년 후, 레전더리 픽쳐스에서 제작한 할리우드산 <고질라>에 감화되었는지(혹은 자극받았는지) 토호에서 새롭게 <고질라> 리부트를 선언한다. 감독으로 안노 히데아키와 히구치 신지를 내정하는데, 그 순간 음악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1990<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때부터 안노의 음악 파트너로 사기스 시로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비롯해 <블리치>, <변덕쟁이 오렌지 로드>, 실사 버전 <진격의 거인> 등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사기스 시로는 애니나 영상뿐만 아니라 아이돌과 아티스트들에게 곡을 주며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굳힌 중견 작곡가다. 아버지가 특촬 쪽에서 일하며 앞서 언급한 츠부라야 에이지와 사제 및 동업 관계를 맺었던 사이였기에 이번 작업은 그에게 더욱 의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고질라' 시리즈 OST 박스세트

안노 히데아키는 각본을 쓰며 고질라가 나오는 장면에 이후쿠베 아키라의 오리지널 (그것도 모노) 음원을 사용하길 원했는데, 고질라를 표현하는 데 있어 원곡만큼 그 압도적인 무게감이나 원초적인 공포를 담아내기 힘들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에서 역대 시리즈 중 <고질라><킹콩 대 고질라>, <메카 고지라의 역습>, <삼대 괴수 지구 최대의 결전>, <괴수 대전쟁>, <고질라 vs 메카 고지라> 등의 음원이 쓰였으며, 토호의 특촬물인 <우주 대전쟁>의 곡도 특별히 삽입되었다. 대신 인간 쪽 상황을 다룰 때 사기스 시로의 오리지널 큐들이 배치됐으며, 특히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흘러나왔던 ‘Decisive Battle’가 여러 버전으로 편곡돼 빈번하게 흘러나온다. 이 곡은 <007 위기일발>에 실려있던 존 배리 작곡의 ‘007 Takes The Lektor’와 유사해 상당히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긴박한 팀파니 리듬에 강렬한 기타 리프가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사가스 시로

에반게리온에서 사도들이 네오 도쿄를 공격해 올 때 네르프(Nerv)의 급박한 상황을 다루며 흘러나왔던 곡이라, 관객들이 더욱 더 고질라 대 에반게리온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사도가 고질라로 바뀌었을 뿐, 본질적인 지향점이나 구조는 유사하기에 안노의 의도된 선곡이자 요구였는지 슬쩍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상에서 무려 6번이나 흘러나오며 이게 고질라인지 에반게리온인지 조금 헛갈리게 만든다. 그 외 미친 듯이 폭주하며 폭발하는 ‘Defeat is no option’이나 박력 넘치는 오케스트럴 사운드로 코스믹 호러를 경험하게 만드는 ‘Under a Burning Sky’‘Black Angels’, 비애와 절망의 감성에 물드는 합창이 일품인 ‘Who will know’ 그리고 라운지 느낌의 ‘Early morning from Tokyo’ 등 사기스 시로가 선보이는 신 고질라의 색채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다.

이런 풍경이 떠오를 수밖에



새로운 도전
30번째 고질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그리고 올해 <고질라>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아직 개봉 날짜가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30번째 영화판으로 고질라 역사상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준비중에 있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연출을 담당해온 시즈노 코분 감독을 수장으로, 절망의 끝(?)을 보여주는 걸로 유명한 각본가 우로부치 겐까지 합류시켜 팬들의 기대감과 패배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아직 음악은 누가 맡을지 공개되지 않았는데, 역대 고질라 시리즈에 누가 되지 않는 작곡가가 참여해 괴수들의 스펙타클을 선율로 구현해주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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