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스타'로 데뷔 하는 배우는 없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 역시 저마다의 무명시절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다. 당시 그들의 활약상을 모아봤다.

p.s. 이 목록에는 여자 배우가 없다. 공교롭게도 여성들의 경우, 드라마 등으로 충분히 인지도를 확보한 후에 영화를 시작해 이렇다 할 무명시절의 영화랄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역을 거쳐 이른바 '주연급'으로 올라선 경우도 남자 배우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구색상 소수의 인원을 끼워넣는 것보다 아예 그들을 제외시키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해 남자 배우들로만 채웠다.  


송강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쁜영화
(1997)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송강호는 1997년을 대표하는 영화 <초록물고기>와 <넘버 3>로 단숨에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실제 조폭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그해 최고의 신인으로 손꼽혔다. 그의 첫 영화는 따로 있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다. 주인공 효섭(김의성)이 미술관에 갔다가 만나는 대학 동기 역을 맡았다. 일행을 뒤로 한 채 혼자 어색하게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효섭과 이따 저녁에 모임이 있을 거라는 대화를 나눈다. 에디터 개인적으로는 장선우 감독의 문제작 <나쁜영화>(1997)에서 노숙자를 연기한 송강호를 특히 좋아한다. 서울역 앞 풍경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은 시퀀스에서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노숙자 그 자체다.

나쁜영화

김윤석

범죄의 재구성
(2004)

최동훈 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러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김윤석은 <타짜>(2006)부터 <전우치>(2009), <도둑들>(2012)까지 연속으로 최동훈 영화의 얼굴이 됐다. 그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에서도 이 형사 역의 김윤석을 만날 수 있었다. 중심에선 많이 벗어난 캐릭터라 좌중을 압도하는 무게를 드러내지 않지만, "아 그 형사가 김윤석이었어?" 정도의 반응을 끌어낼 만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시실리 2km>(2004), <야수>(2005) 등을 거친 김윤석은 <천하장사 마돈나>(2006)의 폭력적인 아버지, <타짜>의 매력적인 악역 아귀를 만나 도약의 길에 섰다.


최민식

구로 아리랑
(1989)

1989년은 최민식이 영화계에 데뷔한 해다. 당시 충무로의 신성으로 평가받던 박종원 감독의 <구로 아리랑>이 그 시작. 연극만 하던 그가 대학선배였던 조감독의 제안을 받고 출연한 첫 영화다. 구로공단의 젊은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에서 최민식은 주인공 종미(옥소리)를 짝사랑하는 동료 진석 역을 맡았다. 그는 모 인터뷰에서 <구로 아리랑>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3년 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박종원 감독과 다시 만났다. 1989년에 작업한 또다른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선 주인공 형빈(손창민)의 친구로 나왔다.


황정민

장군의 아들
(1990)

황정민의 첫 주연작은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장군의 아들>(1990)이 보인다. 영화의 주요 공간인 우미관의 지배인으로 나왔다. 깡패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곳이라 그런지 잔뜩 주눅든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 황정민의 얼굴을 짤막하게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과 <와이키키 브라더스> 사이엔 11년의 텀이 있는데, 대학을 졸업한 뒤에 줄곧 연극에만 매진했던 까닭이다. 1998년 <쉬리>에 잠깐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하정우

슈퍼스타 감사용
(2004)

영화와 드라마에서 단역을 맡았던 하정우는 2004년 <슈퍼스타 감사용>에 출연했다. 감사용(이범수)이 맹활약한 전설적인 경기에서 그에게 결국 패배를 안겨주는 OB의 김우열 선수 역을 맡았다. 하정우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강력한 타자'라는 걸 내세우기라도 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확 눈에 띈다. 이듬해 대학 동문이었던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분대장 유태정 역으로 한국영화계를 놀래켰다. 


마동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지난 십수 년간 규모를 가리지 않고 스크린과 TV를 종횡무진 했던 마동석.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특유의 우락부락한 이미지로 좀체 다가서기 힘든 강한 캐릭터를 도맡았다. 많은 출연작 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창이(이병헌)파의 3인자 '곰'이 특히 인상적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웨스턴물에서 그는 드레드 머리, 선명한 흉터, 기괴한 틀니, 그르렁대는 목소리 등 강렬한 외모를 내세워 '또 다른 놈'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유

동갑내기 과외하기
(2003)

젠틀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익숙한 공유 역시 신인시절의 이미지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 4> 등 여러 드라마를 거쳐 처음 출연한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에서 지훈(권상우)에게 계속 깐족대는 양아치 종수를 연기했다. 지훈이 전학 오면서 '학교 짱' 자리를 빼앗기는 바람에 열등감에 온갖 악수를 다 두는 종수는 꽤 귀여워 보이면서도 딱 그만큼 얄미웠다. 현재 그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정말 옛날 얘기 같다. 하긴 15년 전이니.
 


송중기

쌍화점
(2008)

송중기의 캐릭터는 시작부터 꽃미남이었다. 파격적인 로맨스 <쌍화점>(2008)에서 왕의 친위부대 건룡위의 일원인 노탁 역을 맡았다. 심지호, 임주환, 여욱환 등 당시 주목받던 청춘스타들과 함께 나오긴 했지만, 딱히 그 안에서 두드러지진 않았던 게 사실. 영화와 드라마를 부지런히 작업했던 2009년을 지나, 이듬해 유아인, 박유천, 박민영 등과 출연한 퓨전사극 <성균관 스캔들>로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차승원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

배우 이전에도 차승원은 스타였다. 19살에 모델 활동을 시작해 10년 넘게 커리어를 쌓아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모델에서 배우로 영역을 옮기는 데에도 성공했다. 영화 데뷔작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에서는 현주(고소영)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젊은 라면회사 사장 지민 역을 맡았다. 연기에 아직 물이 오르기 전이라 살짝 어설픈 감은 있지만 모델 출신답게 범접할 수 없는 자태를 자랑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이후 진지한 캐릭터를 주로 맡던 차승원은 김상진 감독의 코미디 영화들에 연달아 출연하며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설경구

꽃잎
(1996)

2000년 1월 1일 <박하사탕>이 개봉하자마자 설경구는 한국 최고의 배우 반열에 올라섰다. '괴물 같은 신인'이라고 불렸지만 데뷔는 1996년이었다. 문제적 감독 장선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그린 <꽃잎>에서 '우리들' 역을 맡았다. 우리들이라고? 맞다. 장선우는 주인공 소녀(이정현)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련의 조연들에게 우리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아픈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더하길 꾀했다. 늘 심드렁하고 무기력해 보이지만 문득 드러나는 독기어린 눈빛이 영락없이 설경구다.


유해진

주유소 습격사건
(1999)

유해진은 주로 조폭, 양아치 역으로 절대적인 조연으로서의 존재감을 뽐내며 차근차근 입지를 다져왔다. 그의 얼굴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던 건 <주유소 습격사건>(1999) 때부터였다. 주인공 4인방에게 제압당해 러닝타임 내내 갖은 공격을 당하는 '양아치1'은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조연들 사이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캐릭터였다.


정재영

초록물고기
(1997)

정재영은 흔히 '장진 사단'이 배출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 장진 감독의 초기작들에 거의 대부분 출연했다. 하지만 정재영의 얼굴은 그 이전의 한국영화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박봉곤 가출사건>(1996), <산부인과>(1997), <조용한 가족>(1998) 등 여러 작품들이 있으며, <초록물고기>(1997)에서도 정재영을 볼 수 있다.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애(심혜진)가 무대 위에서 멀뚱히 있자 그녀에게 욕을 했다가 막동(한석규)에게 맞는 손님 역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재영은 역시 취한 사람을 연기할 때 빛을 발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