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씨네 21> 기자
메타포의 그물로 건져 올린 상실의 시대
★★★★☆
두 남자와 한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 가까운, 미스터리 스릴러를 골자로 한다. 공허, 무력감, 분노, 상실감 등 청년 세대들의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공기를 뭉쳐 세 인물로 빚어냈다. 죄의식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던 이창동이 다음 걸음을 디뎠다. 상태와 감정을 장면화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교본, 클래식이라 할 만하다. 간결한 스토리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밀도가 높은 장면들로 채워져 있고 빼어난 촬영에 대담한 음악이 더해져 뼛속까지 울린다. 다만 몇몇 지점은 다소 길고, 시대와 청년세대를 반영했다고 하기엔 인물도 공간도 어딘지 괴리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거장의 전진.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
있다가도 없고, 없는 것 같은 데도 있다. 비닐하우스, 우물, 고양이, 남산타워, 전화, 판토마임… 많은 것들이 메타포로 기능하는 <버닝>의 오리무중은 ‘물증’은 보여주지 않고 ‘심증’만 계속 흘리는 것에 기인한다. 마침표나 느낌표 대신 물음표로 남는 세계. 이 기기묘묘한 세계 안에서 이창동은 원인과 실체를 ‘알 수 없는’ 요즘 세대 청춘들의 무력감과 분노를 ‘손에 잡히지 않게’ 그려낸다. 이쯤이면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 미스터리 장르이기보다, 영화 자체가 수수께끼라서 미스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사 흡수율이 높지 않은 영화임에도,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매혹적으로 잡아낸 ‘영화적 순간들’이다. 특히 노을 진 파주의 벌판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여주인공 혜미(전종서)의 실루엣은 오래 두고 회자 될 명장면이다.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걸 선호하는 이창동 감독의 화법이 <마더>와 <곡성>을 매만진 홍경표 촬영감독의 영상을 만나 관객에게 던지는 호기심이라는 미끼.
심규한 <씨네플레이> 기자
시대를 덮은 불안과 허무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버닝>은 이런 물음으로부터 시작했다. 두 남녀와 이들 사이에 끼어든 낯선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일들은 바로 이 물음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군데군데 흔적을 남겨 어렴풋하게 짐작하려 하지만 이내 붉은 도화지에 검은 안료가 스미듯 어둠이 깔리는 벌판과 푸른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의 흐릿한 풍광처럼 영화적 황홀로 우리를 미로 속에 가둔다. 인간의 원죄를 심연까지 파고들며 질문을 던지던 이창동 감독이 이번에는 당신을 둘러싼 현실을 목도하라 한다. 전종서의 눈부신 데뷔와 스티븐 연의 변신도 의미 있지만, 연기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로 불안과 허무가 가득한 청춘을 완벽하게 그려 낸 유아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이 영화가 인생의 이정표로 남을 게 분명하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절망적 공감
★★★★☆
8년 동안 기다렸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그 기다림만큼 흥미로운 텍스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이 원작이라고는 하나, 이야기의 원형적 모티브를 가져왔을 뿐 한국이라는 맥락에 충실하다. 이전까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감독 자신이나 가족이나 스스로의 세대가 지닌 트라우마를 담았다면, <버닝>은 젊은 세대의 이야기. 감독은 그들에게 공감하지만, 그 밑바닥엔 깊은 절망과 좌절의 현실이 흐르고 있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화면은 최근 한국 영화의 비주얼 중 단연 눈에 띄는 진경. 주인공 유아인이나 신인 전종서가 주로 언급되지만, 스티븐 연의 미묘한 뉘앙스 연기가 없었다면 <버닝>의 긴장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