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갚아."


350만 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1년 만에 구남친 병운(하정우)을 만난 희수(전도연)의 이 한 마디로 영화의 하루가 시작된다. 배경은 스크린 경마장, 병운의 행색은 꾀죄죄하다. 병운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걸 아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희수 역시 영화의 말미에 "돈이 없다고 하면 욕이나 하고 돌아오려 했다"고 밝힌다. 어디에도 쉽게 하소연할 수 없는, 사는 것의 답답함이 병운을 찾아간 이유였다. 진한 스모키 화장으로 강한 인상을 주지만 속내까지 그럴 순 없다.

희수의 짐작처럼 병운에겐 갚을 돈이 없다. 하지만 그는 욕을 먹는 대신 돈을 갚겠다며 희수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연상의 여사장부터 스키를 가르쳤던 제자, 술집 아가씨, 사촌 형, 이혼한 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까지, 돈을 꿔서 돈을 갚아가는 여정이다. 이 기묘한 로드무비는 서울의 강남부터 강북까지 곳곳을 훑는다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능청스러운 캐릭터를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을 병운의 변죽은 영화 내내 계속된다. 제자에게 돈을 꿔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돈 빌리는 게 어때서 그래? 없으면 있는 사람한테 빌리는 거고, 생기면 갚고, 내가 있으면 남도 좀 도와주고 그게 사람 사는 맛이지"라며 기어이 10만 원을 꾼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흔한 양아치 가운데 하나일 거라 생각한 병운이지만 영화가 계속되면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변하게 된다.

그가 찾아가는 이들 모두 그에게 어떻게든 돈을 꿔주려 한다. 100만 원부터 40만 원, 10만 원, 이렇게 350만 원을 만들어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40만 원을 꿔주려 하는 초등학교 동창은 "저 어려울 때 병운이도 많이 도와줬다"며 기꺼이 돈을 꿔준다. 병운은 철이 없을 뿐이지 정말 악의가 없는, '선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없으면 빌리고 내가 있으면 남도 도와주"며 살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도, 차갑게 대하던 희수의 마음도 영화의 전개와 함께 조금씩 변해간다.

하지만 그 변화의 폭은 그리 크지 않다. 둘 사이 감정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이야기의 갈등이나 절정이라 할 부분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감정 사이에서, 또 서울 곳곳의 골목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혹은 새어 나오는 음악은 영화에 생기를 한껏 불어넣어 준다. 팝 재즈 밴드 푸딩의 리더이며 푸디토리움이라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김정범의 음악은 희수가 짜증을 내는 순간에도, 하정우가 능청의 끝을 달리는 순간에도 각자의 기분에 맞춰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각각의 곡들이 짧은 소품처럼 느껴지지만 많은 품을 들였다. 재즈의 본토인 미국에 가서 현지 연주자들과 엔지니어를 기용해 가벼운 스윙의 곡부터 고색창연한 옛날 음악 분위기가 나는 곡까지 다양한 색을 입힌 음악을 만들었다. 비밥부터 모던 재즈까지 다양하다. 클라리넷과 트럼펫, 트롬본 같은 관악기는 운치와 낭만을 영화에 흩뿌리고 기타와 관악기가 어우러지는 '2:10 PM' 같은 곡은 나른함과 함께 예스러움을 물씬 풍긴다


일반적인 제목 대신 희수와 병운이 함께하는 시간을 각각의 곡 제목으로 쓴 것도 특별하다. 오전 10 12분부터 밤 11 59분까지의 멋진 하루가 음악으로 기록돼있다. 그리고 이 음악은 나온 지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하루의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있다.

김학선 / 대중음악 평론가

재밌으셨나요? 내 손 안의 모바일 영화매거진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더 많은 영화 콘텐츠를 매일 받아볼 수 있어요. 설정법이 궁금하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