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편의 영화에서 조/단역을 거쳐 이제는 한국영화의 대표 조연배우로 떠오른 김기천이 코미디 영화 <해치지않아>에 출연했다. 입봉작 <달콤, 살벌한 연인>부터 꾸준히 김기천을 캐스팅 해 편애를 드러내온 손재곤 감독이 근 10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지난 27년간 김기천 배우가 거쳐온 캐릭터들을 돌이켜보자.

<서편제>, 1993

김기천의 영화 데뷔작. 서른셋 되던 해에 '극단 아리랑'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한 그는 3년 후 극단의 연출가였던, 유봉 역의 김명곤의 소개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서 캐스팅 됐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유봉과 송화(오정해) 가족을 소리꾼으로 고용한 약장수 역이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소리 타령을 하는 유봉에게 윽박을 질러 결별하게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정원(한석규)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시비에 걸려 경찰서에 끌려온다. 김기천은 시끌벅쩍한 경찰서에 소음을 보태는 취객으로 출연했다. 자신을 민정당 조직층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조사를 받던 사람에게 인상이 X같다며 시비를 걸다가 구석에서 꾹꾹 참고 있던 정원의 분노를 터트린다.

<소름>, 2001

<아름다운 시절>(1998)에서도 이발사를 연기한 김기천은 윤종찬 감독의 데뷔작 <소름>에서도 이발사 역을 맡았다. 주인공 용현(김명민)의 집주인이기도 한 이발사 송씨는 와이프에게 유흥업소에서 밤새 술 마셨다고 혼나다가, 30년 전 504호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려준다. 그렇게 <소름>의 미스터리가 증폭된다.

<지구를 지켜라>, 2003

강만식 사장(백윤식) 납치사건을 캐던 추 형사(이재용)는 병구(신하균)의 어머니가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 병원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다. 김기천이 연기한 수납 과장은 병구가 어머니가 식물인간인 채로 5년을 지내는 동안 병원비를 지불했다고 알려준다.

<주먹이 운다>, 2005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한테 매맞는 걸로 돈을 버는 태식(최민식)은 원태(임원희)의 꼬임에 넘어가 TV에 출연했다가 목돈을 벌기는커녕 그동안 피해다녔던 빚쟁이들에게 발각된다. 태식이 처음 맞닥뜨리는 일수쟁이를 연기한 배우가 김기천이었다. 태식이 그 날 번 돈을 몽땅 수금해가면서 힘내라며 드링크제를 건넨다. <주먹이 운다>부터 김기천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간간이 출연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 2006

손재곤 감독의 데뷔작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는 처음부터 김기천이 등장한다. 대우(박용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는 용달 기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냉장고를 받쳐들면서, 그가 들으라는 듯 "신경쓰지 마요" 중얼거린다. 결국 대우는 냉장고를 대신 옮겨주고 허리를 다치게 된다. 냉장고가 도착한 곳은 미나(최강희)의 집이다.

<짝패>, 2006

카지노 사업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고향 사람들을 거리로 나앉게 만드는 필호(이범수)는 청년회장(김병옥)을 협박하기 위해 텅빈 목욕탕에 데려간다. 노래를 부르며 칼을 갈던 살수는 "아예 다 쎗바닥을 다 잘라버리는 게 어뗘?", "발목이 안 나아요? 손이야 이거 하나 없어봤자 팔 한짝이 저기 허지먼 발은 없으면은 목발을 짚어야 하니께~" 같은 살벌한 말들을 내뱉어 청년회장을 떨게 만든다. 목욕탕 바닥에서 삐끗 하는 연기는 보너스.

<전우치>, 2009

<전우치>는 500년 전 조선시대와 현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믹 활극이다. 김기천은 전우치(강동원)와 초랭이(유해진)가 납치해온 서인경(임수정)을 범하려는 대감 역을 맡았다. 부적을 떼자 이천댁(이숙)으로 변한 걸 보자 김기천 특유의 어벙한 표정으로 당황해하지만, 방안에 들어온 전우치를 날려버릴 정도의 괴력을 발휘한다. 사실 대감은 쥐 요괴였던 것.

<부당거래>, 2010

<부당거래>에선 주인공 최철기(황정민)를 압박하는 감찰반을 연기했다. "사람이 얘기를 하면 인간적으로다가 눈은 좀 맞춥시다. 긴장도 좀 푸시고. 우리가 가족이잖아요 가족~" 실금실금 웃으면서 불쾌한 너스레를 떤다. 최철기가 회유에 넘어오지 않자 오늘부터 직위해제니까 신분증은 놓고 가라고 말하면서도 한시도 미소를 풀지 않는다.

<이층의 악당>, 2010

김기천이 연기한 성식은 얼핏 보면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아저씨 같은데, 사실 한탕을 노리는 도굴범 창인(한석규)을 돕고 있다. 고서와 고미술품에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방에서 창인과 작당모의를 하는 게 주 역할이다. 악당인 주인공의 유일한 동료지만 결국 대단한 도움은 되지 않는다.

<이웃사람>, 2012

경비 아저씨. 김기천이 자주 연기한 캐릭터 중 하나다.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웃사람>에서는 경비실 앞에 꽃을 키우는 천하태평한 경비 황재연 역을 맡았다. 일을 똑바로 안 한다고 부녀회장 하태선(장영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분리수거를 하다가 음식 썩는 냄새가 나는 봉투가 102호의 것이라는 걸 따지러 갔다가 봉변을 당한다.

<7번방의 선물>, 2012

<7번방의 선물>은 김기천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지 20년 만에 처음 장편영화의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각설탕>(2006), <챔프>(2011) 등 꾸준히 김기천을 기용한 이환경 감독이 연출했다. 자해공갈로 들어온 60세 서 노인은 주인공 용구(류승룡)가 생활하게 되는 7번방의 최고령 수감자다. 7번방 멤버들 중 가장 온화해 보이는 캐릭터.

<미스터 고>, 2013

고도의 CG로 만든 고릴라 캐릭터를 내세운 김용화 감독의 야심작 <미스터 고>에선 웨이웨이(서교)가 몸 담은 서커스단의 불뿜기 단원 기예할아버지를 연기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답게 김기천은 영화 내내 중국어 대사만 소화했다.

<롤러코스터>, 2013

하정우의 감독 데뷔작 <롤러코스터>는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서로 핑퐁처럼 주고 받는 말장난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짜사이 그룹의 허승복 회장은 남에게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비서와 주로 합을 맞춘다. 고령이라 몸이 아주 예민한 회장은 이 말썽 많은 비행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태평한 건지 불안한 건지 헷갈리는 김기천 특유의 말투가 캐릭터의 특징을 더욱 빛나게 한다.

<화장>, 2014

김기천의 첫 영화 <서편제>로 연을 맺은 임권택 감독은 <축제>(1996), <천년학>(2007), <달빛 길어올리기>(2010) 등 꾸준히 그를 캐스팅 해왔다. 현재까지 임권택의 최근작으로 남아 있는 <화장>에선 오상무(안성기) 부부의 별장을 관리하는 이거사 역을 맡았다.

<곡성>, 2016

나홍진 감독의 공포영화 <곡성>에서는 종구(곽도원)가 일하는 곡성파출소장으로 나왔다. 사건 현장에 늦게 도착한 종구에게 윽박을 지르면서 처음 등장한다.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이 마을을 둘러싼 흉흉한 기운에 점점 사로잡히는 와중에도 파출소장은 그나마 평화로워 보인다.

<조작된 도시>, 2017

<조작된 도시>는 억울하게 살인자로 몰린 권유(지창욱)가 평소 빠져 있던 게임 속 길드원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그렸다. 권유가 대장이었던 길드는 털보(심은경), 데몰리션(안재홍), 용도사(김민교), 그리고 여백의 미가 그 멤버다. 게임 속에선 장발을 휘날리는 여백의 미는 실제론 모발의 여백이 완연한 '자칭' 지방대 건축학과 교수다.

<기묘한 가족>, 2018

대한민국 농촌에서 펼쳐지는 좀비영화 <기묘한 가족>에선 무려 좀비를 연기한다. 준걸(정재영) 남매의 아버지 만덕(박인환)은 좀비인 쫑비(정가람)에게 물리고도 살아남은 데다가 젊어지기까지 해서 온 동네 노인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좀 있으면 결혼을 앞둔 가발노인도 그 중 하나다. 가발노인의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던 때, 쫑비에게 물린 노인들이 좀비로 변하면서 본격적인 난리통이 시작된다.

<해치지않아>, 2020

<해치지않아>는 돈이 없어 동물을 죄다 팔아버린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직원들이 직접 인형을 쓰는 속임수로 동물원을 살리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다. 이 인형이 황당무계한 설정을 가능케 한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김기천이 연기한 고대표가 바로 이 인형들을 만들어내는 캐릭터. 생각은 하고 말을 하는 건지, 무조건 "됩니다"라고 내뱉는 고대표는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일까?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