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페인 앤 글로리>가 절찬 상영 중이다. 중년의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페인 앤 글로리>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전적인 캐릭터 살바도르를 연기해,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강력한 후보로 거론됐고, 결국 트로피를 차지했다. 2019년까지, 지난 20년간 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들을 소개한다.
2000년, 양조위 <화양연화>
왕가위는 전작들을 통해 편애를 드러냈던 두 배우 양조위, 장만옥과 함께 <화양연화>를 작업했다. 같은 날 한 건물에 이사 온 이웃으로 만난 초 모완과 수 리첸 사이의 로맨스를 극도의 섬세함으로 완성했다. 격정적인 감정 표현에 기대지 않은 채 사랑의 긴장을 터질 듯 증폭시키는 두 배우의 앙상블로부터 <화양연화>의 아름다움이 작동한다. 양조위가 2000년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장만옥은 2004년 <클린>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1년, 브누아 마지멜 <피아니스트>
2001년의 남/여우주연상은 모두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피아니스트>의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과잉 통제에 시달려온 중년의 피아니스트 에리카가 젊고 잘생긴 제자를 만나 어렵사리 마음을 열고 피학적인 성향까지 드러내면서 관계가 부서지는 걸 잔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에리카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완전하게 드러낸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야말로 위대했지만, 이 뒤틀린 로맨스를 고스란히 감당하는 브누아 마지엘의 반응 역시 놀라웠다.
2002년, 올리비에 구르메 <아들>
1999년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의 에밀리 드켄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칸영화제는 3년 만에 발표된 신작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에게 남우주연상을 바쳤다. 다르덴 형제의 첫 장편 극영화 <약속>(1996)으로 연기를 시작해 <로제타>에도 출연한 바 있는 올리비에 구르메는, <아들>에서 소년원에서 가구 제작을 가르치다가 5년 전 자기 아들을 죽인 소년을 만난 사내의 어지러운 심경을 끄집어냈다.
2003년, 무자페르 오즈데미르 & 에민 토프락 <우작>
2003년 남우주연상은 두 배우가 받았다. 처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한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의 <우작>의 두 주연이다. 자신의 삶과 이상의 괴리에 괴로워 하는 사진가(무자페르 오즈데미르)와 어느 날 문득 시골에서 그를 찾아온 젊은 친척(에민 토프락)을 연기했다. 두 배우는 각자 세일란의 초기작 <5월의 구름>(1999)과 <작은 마을>(1998)에 출연한 바 있다. 세일란은 <우작> 이후 발표한 모든 작품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윈터 슬립>(2014)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2004년, 야기라 유야 <아무도 모른다>
2004년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의 말. "매일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인상에 남은 건 야기라 유야의 얼굴이었다."야기라 유야는 난생 처음 카메라 앞에 서서, 어머니에게 버려져 기약도 없이 세 동생들과 살아가야 하는 소년 아키라가 되었다. 칸영화제는 중간고사 때문에 일찍 귀국해야 했던 14세의 배우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했다. 당시 역대 최연소 수상이었고,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2005년, 토미 리 존스 <쓰리 베리얼>
이듬해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쉰아홉에 첫 감독작 <쓰리 베리얼>을 내놓은 토미 리 존스다. 멕시코인 친구를 잃은 피트는 그의 죽음이 국경수비대원의 오발사고라는 걸 알게 되고, 그 대원을 납치해 친구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존스는 연출과 주인공 피트 역까지 겸임해 성공적인 감독 신고식을 치렀다.
2006년, 사미 나세리 외 4명 <영광의 날들>
알제리계 감독 라시드 부샤렙이 연출한 <영광의 날들>은 알제리 토착민 병사들이 프랑스 군인들에 비해 형편 없는 대우를 받아가며 전쟁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저마다 다른 성향을 가졌지만 알제리인의 권리를 찾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하나의 희망을 품은 병사들로 분한 5명의 배우가 공동수상했다. 그해 여우주연상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 속 여섯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2007년, 콘스탄틴 레브로 <추방>
<추방>은 데뷔작 <리턴>으로 2003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두 번째 영화다. <리턴>에서 아버지를 연기했던 콘스탄틴 레브로는 다시 한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출연해,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의 집에 가던 중에 화목한 줄로만 알았던 가정이 부서져 있음을 깨닫는 이의 심정을 처절하게 보여줬다.
2008년, 베네치오 델 토로 <체 게바라>
<트래픽>(2000)에서 베네치오 델 토로의 명연을 이끌어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델 토로의 육체를 빌려 아르헨티나 민중의 영웅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그려냈다. 델 토로는 말년의 체 게바라까지 구현하기 위해 15kg을 감량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7년 동안 그의 삶을 연구한 결과, 마치 체 게바라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감흥을 안겼다. 2009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를 연기한 <밀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숀 펜은 <체 게바라>의 베네치오 델 토로가 후보에도 오르지도 못한 걸 믿을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09년, 크리스토프 왈츠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상의 가치는 숨어 있던 보석의 존재를 만방에 알릴 때 더욱 빛난다. 크리스토프 왈츠의 수상이 그러하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 유럽영화계에서 조연을 주로 맡던 오스트리아 배우 크리스토프 왈츠를 기용해, 교활한 웃음 뒤에 살기를 감춘 악역 한스 란다 대령을 완성했다.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순식간에 좌중의 공기를 뒤엎어버리는 장악력까지 갖춘 왈츠의 괴력은 세계를 들썩이기 충분했다.
2010년, 하비에르 바르뎀 <비우티풀> & 엘리오 게르마노 <우리의 인생>
2010년 남우주연상은 다른 영화의 두 배우가 받았다. <비우티풀> 속 하비에르 바르뎀은 마약을 거래하고 밀입국자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브로커로 살던 중 3개월 시한부를 선고 받는 남자를 연기했다. 한국 관객에겐 낯선 이탈리아 배우 엘리오 게르마노는 셋째 아이를 가진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는 건설노동자 역을 맡아, 공사현장에서 불법체류자들을 발견하면서 피어나는 불안을 담아냈다.
2011년,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이행기를 배경으로 삼은 <아티스트>는 소리도 없고 서사도 단순화 한 무성영화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코미디 연기로 정평난 프랑스 배우 장 뒤자르댕은 환경의 변화에 설 곳을 잃어가는 무성영화 시절의 최고스타 조지를 연기했다. 쇠퇴로 인한 좌절과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향한 희열까지 아우르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목소리에 기대지 않고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뒤자르댕은 칸에 이어 이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2012년, 매즈 미켈슨 <더 헌트>
<007 카지노 로얄>(2006), 드라마 <한니발>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매즈 미켈슨은 하나같이 위험한 캐릭터였다. 그가 고국인 덴마크에서 작업해 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쥔 <더 헌트>는 달랐다. 한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한순간에 아동 성범죄자로 몰려 마녀사냥 당하는 이를 그린 작품이다. 아무리 결백을 증명하려 해도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존재하지도 않는 걸 사실인양 부풀려 퍼트릴 뿐이다.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매순간 맞닥뜨려야 하는 매즈 미켈슨의 눈빛은 한없이 처연했다.
2013년, 브루스 던 <네브래스카>
브루스 던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부지런히 필모그래피를 확장하고 있다. 잭 니콜슨과 함께 작업한 나이든 남자의 로드 무비 <어바웃 슈미트>(2002)를 만든 바 있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70대 중반의 브루스 던과 또 다른 로드 무비를 연출했다. 알콜 중독과 알츠하이머를 앓는 우디는 잡지사가 보내준 100만 달러 당첨 증서를 품고 700마일이나 떨어진 네브래스카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아들과 동행하게 된다. 브루스 던의 담담한 연기는 막무가내 고집불통 노인에게서 곡절 많은 세월을 잊어가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2014년, 티모시 스폴 <미스터 터너>
<미스터 터너>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추앙 받는 윌리엄 터너의 황혼기를 영화에 옮긴 작품이다. <킹스 스피치>에서 영국의 저명인사 윈스턴 처칠을 연기한 바 있는 티모시 스폴은, 터너가 그려온 아름다운 그림과 달리 고독하고 비천했던 삶을 견디면서, 자신이 이룩한 화풍마저 기꺼이 부수고 낭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터너의 대쪽같은 태도를 고스란히 쏟아냈다. 스폴은 터너 역을 소화하기 위해 2년간 그림 그리는 걸 익혔다.
2015년, 뱅상 랭동 <아버지의 초상>
<아버지의 초상>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뱅상 랭동은 수상의 영광을 스테판 브리제 감독에게 돌렸다. 브리제는 <마드모아젤 샹봉>(2009)부터 꾸준히 랭동을 주연으로 캐스팅해 신작을 발표해오고 있다. 부당해고 2년 만에 대형마트 보안요원으로 일하게 됐다가 동료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부딪히는 남자를 그린 <아버지의 초상>은 뱅상 랭동 이외의 모든 캐릭터에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 해 자본주의 시장의 비정함을 꼬집었다.
2016년, 샤하브 호세이니 <세일즈맨>
분노. 샤하브 호세니이가 연기한 <세일즈맨>의 주인공 에마드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 중이던 에마드와 그의 아내 라나는 아파트로 이사한다. 에마드가 집을 비운 날 라나는 정체 모를 괴한에게 폭행당하자 범인의 정체를 추적한다. 호세이니는 아내가 맞았다는 걸 넘어, 노인인 가해자가 자신이 연기하는 세일즈맨과 닮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 큰 분노에 휩싸이는 에마드의 상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2017년, 호아킨 피닉스 <너는 여기에 없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주인공 조는 무적과도 같은 킬러다. 하지만 참혹한 유년기와 참전의 경험에 시달리는 멘탈은 말이 아니다. 불안한 남자의 컴필레이션이라 할 만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해온 호아킨 피닉스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마음을 부여잡고 상원의원의 딸을 구출하는 수퍼히어로적 면모를 선보였다. 돌이켜보면 <조커>의 아서와 정반대에 있는 듯한 캐릭터다.
2018년, 마르첼로 폰테 <도그맨>
마테오 가로네 감독은 로베르토 베니니를 <도그맨>의 주인공에 캐스팅 하려 했다. 결국 마르첼로 폰테가 연기하게 된 마르첼로가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선한 인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마르첼로는 마피아인 친구에게 휘말려 범죄에 가담하게 되지만 세상의 작은 것들을 향한 사랑을 결코 놓는 법이 없다. 폰테의 커다란 눈망울은 명백히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강아지와 딸을 끌어안는 이의 것이었다.
2019년, 안토니오 반데라스 <페인 앤 글로리>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데뷔작 <정열의 미로>(1982)부터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여덟 작품을 함께 했다. 알모도바르는 자전적인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속 자신에 해당하는 캐릭터 살바도르 역을 반데라스에 맡기면서 강한 편애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한때 마초의 아이콘이었던 반데라스는 슬럼프에 빠져 유년시절의 어머니와의 시간, 남자를 향한 사랑에 눈 뜨던 순간을 자꾸만 돌이키면서 희망을 더듬는 살바도르를 통해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 2019-2020 시즌 남우주연상을 양분하는 지지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