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의 오프닝 크레딧엔 오프닝 크레딧엔 'WITH YUH-JUNG YOUN'에 이어, 'AND WILL PATTON'이 뜬다. 데이빗 가족의 농사를 돕는 백인 중년 남성 폴을 윌 패튼이 연기했다. 요즘 젊은 관객에겐 다소 낯설 수 있는 이름이지만, 지난 40년간 윌 패튼이 쌓은 필모그래피를 보면 친숙한 영화들도 솔찬히 눈에 띈다. 윌 패튼이 그동안 거쳐온 영화들을 소개한다.

수잔을 찾아서, 1985

윌 패튼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983년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마돈나의 스크린 데뷔작으로 알려진 <수잔을 찾아서>는 패튼의 초창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외투 때문에 수잔(마돈나)이라고 오해받는 주인공 로버타(로잔나 아퀘트)를 뒤쫓는 악랄한 갱을 연기했다.

노 웨이 아웃, 1987

윌 패튼이 제대로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 작품은 탄탄한 정치 스릴러 <노 웨이 아웃>이다. 해군 소령인 주인공 톰(케빈 코스트너)의 친구이자 국방장관 브라이스(진 해크먼)의 보좌관 스캇을 연기했다. 본인이 직접 악행을 저지르진 않지만, 톰과 브라이스에게 개입하면서 문제를 점점 더 나쁘게 만들어놓는다. <노 웨이 아웃>의 첨예하게 꼬여 있는 스릴러 구조가 스캇으로부터 비롯되는 셈이다.

의뢰인, 1994

엄마와 동생과 함께 트레일러에 사는 11살 소년 마크는 마피아가 죽인 상원의원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안다는 남자의 자살을 목격하고 이를 신고해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된다. 윌 패튼이 연기한 하디 경사는 마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보다가 급기야 마크가 범죄자라고 가정한 채 그를 겁박한다. 마크가 워낙 당돌하고 영특해서 하디의 태도가 아주 위협적이진 않지만, 그의 존재는 아이를 보듬을 수 없는 공권력의 무용함을 역설한다.

카피캣, 1995

경찰은 윌 패튼이 꾸준히 연기해온 직업군 중 하나다. 다만 그들은 유능함과 충직함과는 거리가 멀다. <카피캣>의 니콜레티도 마찬가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 연쇄살인범의 수법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는 와중, 니콜레티는 수사책임자 모나한(홀리 헌터)에게 치근덕대고, 심문하다가 서랍을 열쇠를 꽂아 넣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범인이 총을 쥐게 해 결국 동료가 목숨을 잃게 된다.

포스트맨, 1997

<노 웨이 아웃>에서 호흡을 맞췄던 케빈 코스트너가 <늑대와 춤을>(1990) 이후 7년 만에 감독을 맡은 작품. 주인공 포스트맨(케빈 코스트너)이 대적하는 베들레헴을 윌 패튼이 연기했다. 3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2013년 지구에서 베들레헴은 '홀니스트'라는 무리를 흉포한 독재정치를 펼쳐나간다. 케빈 코스트너가 보여준 영웅상이 그랬듯 포스트맨이 과묵하고 건조한 것과 반대로, 베들레헴은 악역의 면모를 한껏 드러내 윌 패튼의 퍼포먼스가 도드라져 보인다.

아마겟돈, 1998

1998년 전세계 최고 흥행을 거둔 영화 <아마겟돈>에서도 윌 패튼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브루스 윌리스, 벤 애플렉, 스티브 부세미, 오웬 윌슨 등과 함께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걸 막는 NASA 대원 칙 역이다. '부성애'를 상징하는 해리(브루스 윌리스)의 오른팔인 칙 역시, 헤어진 아내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설정이 더해지면서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됐다.

엔트랩먼트, 1999

많은 이들이 <엔트랩먼트>를 <마스크 오브 조로>로 얼굴을 알린 캐서린 제타 존스가 스타덤을 공고히 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 옆에 윌 패튼도 있었다. 렘브란트의 명화가 도난당하자 보험회사 간부인 헥터(윌 패튼)은 진(캐서린 제타 존스)을 유력한 용의자인 맥(숀 코너리)을 미행하라고 보낸다. <엔트랩먼트>의 재미는 진이 범죄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특히 멀끔한 행색으로 등장하는 <엔트랩먼트>에서 윌 패튼은 그저 두 주인공을 쫓(고 번번이 실패하)는 역할로만 기능한다.

식스티 세컨즈, 2000

<식스티 세컨즈>는 제목처럼 스포츠카가 선사하는 스피드의 쾌감을 밀어붙이는 액션 영화다. 윌 패튼의 캐릭터 애틀리는 주인공 멤피스(니콜라스 케이지)의 친구이자 빌런 카펜터(크리스토퍼 에클스턴)의 부하다. 한쪽 다리를 저는 캐릭터라 직접 액션을 선보이진 않고, 자동차를 훔치라는 카펜터의 명령을 멤피스에게 전하고 내심 그를 걱정한다. 애틀리가 결국 멤피스 편에 서면서 영화도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리멤버 타이탄, 2000

덴젤 워싱턴과 윌 패튼이 투톱을 맡은 <리멤버 타이탄>은 1971년 미국 버지니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했다.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의 통합을 백인들이 반대하던 당시, 흑인인 교사 허먼(덴젤 워싱턴)이 풋볼팀 '타이탄즈' 감독에 부임하고, 인근 백인 학교의 감독이었던 빌(윌 패튼)이 학교 통합으로 수비팀 코치로 밀려난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윌 패튼의 전작들을 생각해보면 허먼과 빌이 대치하는 것 아닐까 싶은데, 빌은 물심양면 허먼과 협동해 타이탄즈를 승리로 이끈다.

퍼니셔, 2004

2004년, 그러니까 <아이언맨>(2008)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닻을 올리기 4년 전, 마블 캐릭터 '퍼니셔'를 내세운 <퍼니셔>가 개봉했다. 원작 만화에는 없는 캐릭터인 퀜틴 글래스(윌 패튼)는 영화의 메인 빌런인 마피아 보스 하워드 세인트(존 트라볼타)의 절친이자 오른팔. 악인보다는 동성애자 혹은 새디스트의 면모로 더 많이 회자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퀜틴의 최후가 꽤나 흥미진진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윌 패튼은 2000년대 들어 중년이 되면서 '흥행'과는 먼 배우가 됐지만 작품 활동을 부지런히 이어나갔다. 저예산의 작품으로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감독들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제는 미국 인디영화 신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 된 켈리 레이카트도 그중 하나. 처음 미셸 윌리엄스를 기용한 <웬디와 루시>에선 일자리를 구하러 알래스카로 향하는 주인공 루시가 여정 중에 만나는 카센터 주인을 연기했다. 친절하지도, 불손하지도 않은 태도로 루시의 망가진 차를 진단하고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을 말"을 전한다. 켈리 라이카트는 그다음 작품 <믹의 지름길>(2010)에서 윌 패튼과 미셸 윌리엄스를 부부로 캐스팅했다.

포스 카인드, 2009

40년간 1200명의 주민이 사라진 마을의 실화를 <파라노말 액티비티> 류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풀어낸 호러 영화. 사건의 공통점을 파고들어 최면치료를 감행하는 타일러 박사 역의 밀라 요보비치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가운데, 윌 패튼은 박사의 최면치료를 의심하는 보안관 어거스트를 연기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타일러 박사의 처지에 따라 밀라 요보비치는 갈수록 센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윌 패튼의 반응 역시 점차 격해진다.

폴링 스카이즈, 2011~2015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은 <폴링 스카이즈>는 외계인에게 점령당한 지구와 그에 맞서는 저항군을 그린 TV시리즈다. 데뷔 이래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 활동을 병행해온 윌 패튼은 작품의 주축이 되는 '메사추세츠 2연대'의 연대장 위버 대위 역을 맡아 다섯 시즌 모두 출연했다. 군인으로서 꽤 유능하지만 가족을 외계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나머지 종종 무리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아메리칸 허니, 2016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타(샤샤 레인)는 제이크(샤이아 라보프)와 말다툼을 하다가 옆에 지나가던 스포츠카에 차에 탄다. 차에는 흰색 카우보이 모자를 쓴 노인 3명이 있는데, 주로 대사가 많은 '뒷좌석 카우보이'를 윌 패튼이 연기했다. 가진 건 돈과 시간인 것 같은 이들은 갑자기 차에 탄 스타에게 호의를 보여주지만, 저택에 도착해서는 아주 독한 술을 계속 마시게끔 하는 시커먼 의도가 드러난다.

할로윈, 2018

2018년 판 <할로윈>은 이전의 <할로윈> 속편들을 거스르고, 존 카펜터가 연출한 1편의 적통을 이어가는 리부트다. 오랜만에 다시 한번 경찰 역할을 맡았는데, 나름 열심히 사건을 쫓아오긴 해도 마이클 마이어스를 제압하기엔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2018년 <할로윈>은 여성 캐릭터들의 승리를 그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남성 경찰의 존재는 밋밋할 수밖에 없었다.

미나리, 2020

정이삭 감독은 2012년 작 <아비가일>에 이어, 새 장편영화 <미나리>에 다시 한번 윌 패튼을 캐스팅했다. <미나리> 속 폴의 존재는 묘한 긴장을 퍼트린다. 아칸소에서 시작한 농사가 절박한 1세대 미국 이민자 가정에게 백인 남성, 그것도 종종 엑소시즘을 이야기하는 이 신실한 크리스천이 그들을 해하는 건 아닐까 관습적인 불안이 일기 때문이다. 폴이 일요일에 커다란 십자가를 이고 거리를 걷다가 "이게 내 교회예요"라고 말하는 걸 볼 때, 비로소 안도하게 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