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다. <더스트맨>의 태산이라는 인물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화물차 적재함에 그림을 그리는 태산을 볼 수 있다. <더스트맨>의 이야기는 단지 먼지 그림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우선 그림에 매료된다. 화가와 그림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를 떠올려봤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제목 그대로의 영화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부연하면 이렇다. 한 여인의 초상 즉 초상화가 불에 타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초상화가 어떻게 그려지고 어떻게 불에 타게 되는가가 영화의 전체 내용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이고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사람은 엘로이즈(아델 에넬)이다. 영화 속에는 두 개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처음 그린 것과 나중에 그린 것은 다르다. 나중 것이 훨씬 더 훌륭하다. 그 차이는 두 인물의 관계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019년 칸영화제부터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쟁 구도에 있던 작품이다. <기생충>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트로피 개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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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발레리아 골리노,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개봉 2020.01.16.
<대니쉬 걸>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가 인상적인 <대니쉬 걸>에도 그림이 등장한다. 1926년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화가들이 주인공이다. 풍경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초상화가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부부다. 예술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베게너는 아내의 모델 울라(엠버 허드) 대신 잠시 모델이 된다. 발 부분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그에게 장난삼아 발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순간, 잠깐 여성이 된 에이나르는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한다. 이후 그는 릴리라는 여성으로 살아간다. <대니쉬 걸>은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 화가의 이야기다. 릴리를 모델로 한 그림도 영화에 등장한다.

- 대니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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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톰 후퍼
출연 에디 레드메인, 앰버 허드, 알리시아 비칸데르
개봉 2016.02.17.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 소설은 그림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영화의 원작자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속 모델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영화에서 이 모델 그리트를 연기한 이는 스칼릿 조핸슨이다. 화가 베르메르는 콜린 퍼스가 연기했다. 앞선 두 영화처럼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 모델과 화가가 마주 보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이젤을 사이에 둔 시선의 교차는 감정의 교환과 같다. 대개 그 감정은 에로스의 영역이다. 베르메르의 부인은 남편이 그린 그리트의 모습을 보고 “음란하군요”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지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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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피터 웨버
출연 콜린 퍼스, 스칼릿 조핸슨, 톰 윌킨슨
개봉 2004.09.03. 2018.02.01. 재개봉
<내 사랑>
<내 사랑>은 화가 모드 루이스(1903~70)의 전기영화다. 샐리 호킨스가 모드를 연기했다. 그의 남편 에버렛 역은 에단 호크가 맡았다. 모드는 어려서부터 관절염을 앓았다. 불편한 몸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녀의 삶은 불행해 보인다. 어떻게든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그녀는 가정부 구인 광고를 보고 에버렛의 집에 찾아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그는 그렇게 에버렛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그가 살기로 한 그 낡고 작은 집은 캔버스가 됐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삶. 에버렛과 모드의 순수한 사랑. <내 사랑>의 주제가 무엇이든 모드의 그림은 영화의 주인공이다. 샐리 호킨스의 훌륭한 연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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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에이슬링 월쉬
출연 에단 호크, 샐리 호킨스
개봉 2017.07.12.
<미인도>
<미인도>는 실존 인물에 상상력을 더한 작품 팩션(faction)이다. <미인도>는 <다빈치 코드>와 같은 팩션의 열풍 속에서 제작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화가 신윤복(김규리)이 여성이라는 것이 그 상상력이다. 신윤복의 그림 ‘미인도’가 자화상이라는 가설에 상상력이 기반한다. 그렇게 남장여자 신윤복과 그가 사랑한 남자 강무(김남길)와 그의 스승 김홍도(김영호)의 치정이라는 전체 그림이 완성된다. 이 포스트의 주제에 맞게 그림에 초첨을 맞춰보자. 영화 속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속화 <단오풍정> <이부탐춘> <서당도> <씨름도> 등이 그려지는 과정이 등장한다. 자극적인 그림도 있다. 어쩌면 이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당시의 성풍속을 묘사한 춘화(春畵)가 그려지는 풍경도 영화에서 볼 수 있다.

- 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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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전윤수
출연 김규리, 김영호, 김남길, 추자현
개봉 2008.11.13.
<더스트맨>에서 시작해 <미인도>까지 영화 속에 등장한 그림, 화가 캐릭터 등을 간략하게 살펴봤다. 위에서 소개한 영화 말고도 <바스키아>, <폴락>, <프리다>, <반 고흐로부터 온 편지>, <미스터 터너>,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등이 화가의 삶을 다룬 영화다. 화가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림을 소재로 독특한 형식의 영화도 있다. <러빙 빈센트>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 등이 대표적이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