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빌런이 히어로보다 매력적일 때가 있다. 그저 타고난 성격이 악독해서,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히어로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공고히 했을 때 우린 빌런의 서사에 설득 당한다. 맨날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는 히어로는 지겹지 않은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현실에서도 많은 것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데, 영화에서까지 뻔한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가끔은 빌런들의 남 눈치 보지 않는, 제 욕망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부러울 때가 있다. 빌런의 행보에 설득 당하거나, 매료 당하거나, 쾌감을 느끼거나. 빌런에게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만든 빌런 캐릭터는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준비했다. 히어로가 아닌, 빌런이 주인공인 영화들. 히어로의 이야기에 가려져 악한 부분만 강조되던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조명하는 영화들을 이제부터 소개한다.
<조커>
조커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완벽했다. 가장 매력적인 빌런을 꼽으라면 단연 ‘조커’를 꼽을 만큼, 조커는 탄탄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캐릭터였으며 히스 레저는 이를 완벽하게 표현해 낸 배우였다. 그렇기에 영화 <조커>가 나온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기대 반 우려 반인 목소리를 표현했다. 어쩌면 <조커>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조커’였을 지도 모른다.
뚜껑을 열어보니, 광기와 혼돈의 아이콘이었던 조커는 저 뒤에 있고, 병적이며 처절한,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조커가 선봉에 서 있었다. 기존 배트맨 영화에서 등장했던 조커의 광기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폭력을 조장하고, 도시의 붕괴를 원하는 조커의 욕망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광기의 연쇄 고리를 끊을 수 없었고 이것이 조커의 매력적인 포인트였다. 그러나 <조커>에서는 어떻게 사회적 약자가 빌런이 되었는지에 대해 굉장히 친절하게 설명한다. 감독 토드 필립스와 각본가 스콧 실버는 1970년대 살인 광대로 악명을 떨쳤던 연쇄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의 범죄까지 연구하며 조커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동기가 없었기에 매력적이었던 조커는 동기가 생김으로써 설득력을 지닌 캐릭터가 되었고, 그에게 ‘동감’을 느끼는 관객들을 만들어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을 거라 예상했던 인물이 사실은 나와 매우 비슷하고, 발화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는 식의 스토리텔링은 조커의 이야기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로써 <조커>는 빌런의 프리퀄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영화로 인정받았다.

-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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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토드 필립스
출연 호아킨 피닉스
개봉 2019.10.02.
<베놈>
베놈
<베놈>은 마블 최초로 빌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솔로 영화다. 베놈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요 빌런 중 하나로, 숙주를 집어삼키는 심비오트와 결합된 존재다. 코믹스에서 스파이더맨의 최강 숙적으로 그려진다. 영화 <베놈>은 그중 1대 베놈, 에디 브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원래 열혈 기자였던 에디 브록은 거대 기업인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뒤를 캐다가 외계 생물체 심비오트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된다. 심비오트와 공생을 하게 된 에디 브록은 베놈이 되고, 호전적이고 악한 성정의 심비오트와 정의로운 에디 브록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모에서부터 남다른 이미지의 베놈은 마블 최초 빌런 메인 영화로 주목을 받았으나, 악당 특유의 ‘끝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시도는 과감했으나, 대중을 의식해 안정적인 노선을 탄 게 마이너스라는 의견. 다만, 적은 제작비였음에도 베놈 캐릭터를 활용한 액션 신만큼은 화려했다. 또한 베놈의 ‘귀여움’은 분명 당황스러웠지만, 분명한 매력 포인트였음은 확실하다.

- 베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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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루벤 플레셔
출연 톰 하디, 미셸 윌리엄스
개봉 2018.10.03.
<크루엘라>
크루엘라
<크루엘라>는 가장 디즈니스럽지 않았기에 오히려 디즈니의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영화다. 언제나 빌런들에게 마음이 약해졌던 디즈니가 특유의 착함을 내려놓고 독한 마음을 품었다.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1961년작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라이브액션 버전으로, 빌런 크루엘라의 과거를 조명하고 있다. 101마리 달마시안들의 사랑스러움이 강조되었던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달마시안은 그저 사냥개라는 책무에만 충실한 조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디즈니가 사랑하는 동물영화 코드를 버리고 오로지 빌런 크루엘라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적당히' 하지 않았던 덕분에 디즈니는 디즈니 역사상 최강의 걸 크러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반반 나뉜 그의 머리 스타일처럼, 그의 내면은 때에 따라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로 나뉘어진다. 괴팍한 성격의 크루엘라는 정형화된 틀을 박차고 나온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해도, 그는 자신의 재능과 어머니의 응원을 믿었기에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의 선함을 믿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됐을 때 크루엘라는 감춰두었던 괴팍한 자아를 숨기지 않기로 한다.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그의 패션은 보수적인 영국 상류 사회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고, 이 칼날은 곧 어머니의 죽음에 연류된 남작부인을 향하게 된다. 엠마 스톤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크루엘라>. 비주얼과 연기, 서사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고 삼박자가 완벽하다. 오로지 착한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디즈니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 크루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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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
출연 엠마 스톤
개봉 2021.05.26.
<말레피센트>
말레피센트
디즈니의 고전,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마녀를 조명한 영화, <말레피센트>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스토리를 완전히 전복시키면서 시작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복수에 눈이 멀어 아이까지 해하던 마녀의 ‘진실’을 보여주어 선악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왜 숲을 수호하는 요정 말레피센트는 초대받지도 않은 아이의 생일에 저주를 퍼부으며 사라졌을까. 영화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 ‘왜’에 집중한다. 복수는 배신으로부터 시작한다. 맞다. 말레피센트는 인간의 사랑에 배신당했기 때문에 영원히 잠드는 복수를 감행한다.
과거 디즈니의 중심과도 같았던 공주와 왕자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이 쌓아왔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비틀고, 전복시키고, 무너뜨릴 수 있을지를 고심하고 있다. <말레피센트> 역시 진실한 사랑은 꼭 왕자의 키스로 증명되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잠깐 보고 열정이 인 필립 왕자보다 오로라 공주를 오랜 시간 지켜보고 보호해주던 말레피센트야말로 진실한 모성애를 보여주고 있음을 증명한다. 익숙한 선악을 뒤집은 <말레피센트>는 결국 속편까지 등장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 말레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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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로버트 스트롬버그
출연 안젤리나 졸리, 엘르 패닝, 샬토 코플리, 주노 템플
개봉 2014.05.29.

- 말레피센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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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요아킴 뢰닝
출연 안젤리나 졸리, 엘르 패닝, 미셸 파이퍼
개봉 2019.10.17.
<수어사이드 스쿼드>
할리 퀸
오늘 소개하는 영화 중 유일하게 제목이 인물 이름이 아닌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안티 히어로와 빌런들이 총출연한 영화다. 특별사면을 대가로 히어로들이 할 수 없는 특수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슈퍼 '빌런'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로, 빌런들 특유의 핀트가 어긋난, 그렇지만 오로지 직진만 하는 액션을 선보였다. 조커를 포함해, 데드샷, 캡틴 부메랑, 엘 디아블로, 킬러 크록, 카타나와 같은 빌런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단연 돋보였던 건 역시 할리 퀸이다.
할리 퀸은 혹평 가득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캐릭터다. 악당들의 도발적인 행보를 예상했던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캐릭터가 얄팍하고 혼란스러워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DC 전작들보다는 유머러스한 감을 강조했지만, 단발적인 유머로는 캐릭터의 매력과 영화를 살리기엔 부족했다는 평. 수위를 조절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당들이 너무 '착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타난 할리 퀸의 비주얼과 범접할 수 없는 미친(!) 모습은 미적지근한 다른 캐릭터들 사이에서 독보적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쳐 정신과 박사가 된 할리 퀸젤은 아캄 수용소에서 만난 조커와 사랑에 빠져 할리 퀸이 되는데, 그의 분열적 상태와 규범을 무시하는 태도가 오히려 갑갑한 스토리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할리 퀸 주연 영화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이후 실제로 할리이 주연인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2020)이 개봉하면서 캐릭터의 인기를 증명했다.

- 수어사이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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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이비드 에이어
출연 마고 로비, 윌 스미스, 자레드 레토, 카라 델레바인, 제이 코트니
개봉 2016.08.03.

-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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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캐시 얀
출연 마고 로비
개봉 2020.02.05.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