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공포영화라는 공식 때문인지 여름만 되면 쏟아지는 공포 영화들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둑어둑한 포스터에 ‘본죽’ 글씨체를 닮은 빨간 제목들, 어디를 그렇게 가지 말고, 하지 말라고 하는 문구와 못 볼 걸 본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주인공들. 실제로 ‘포토샵으로 공포영화 포스터 만들기’ 강좌가 있을 만큼 공포영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정적이다. 공포영화 클리셰들만 쳐도 수십 개의 글들이 주르륵 나오는 걸 보면, 비약적 사고도 아닌 듯하다. 심상치 않은 2021년의 더위를 뻔한 거로는 물리칠 수 없기에. 소재와 설정, 배경부터 독특한 공포영화 다섯 편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중 가장 취향저격한 영화는 무엇인지 댓글로 이야기해 보자!
청각적 요소 통제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
비명 소리는 공포 영화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하나의 클리셰였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여성의 비명 소리는 영화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껏 그 누구도 이 비명소리를 없앨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공포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청각적인 요소를 제거했다.
의도와는 달리,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완벽히 컨트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소리 내면 죽는다!’ 라는 카피처럼 청각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 생명체를 피해 아이들과 함께 소리 내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번에 개봉한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역시 배경은 동일하다. 다만, 상황은 조금 더 안 좋아졌다. 그나마 안전하게 보호해주던 집은 무너졌고, 가족이 희생됐으며, 아이들까지 지켜야 한다. 실제로 주인공 에블린 애보트 역을 맡은 에밀리 블런트는 “급박한 순간이 쉼 없이 찾아온다. 지금까지 해본 연기 중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힘들고 벅찬 경험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 콰이어트 플레이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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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존 크래신스키
출연 에밀리 블런트, 노아 주프, 밀리센트 시몬스, 킬리언 머피
개봉 2021.06.16.
시각 통제에서 오는 공포
<버드 박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목소리, 즉 청각의 부재를 통해 공포를 극대화 하고 있다면 <버드 박스>는 시각이 통제당할 때의 두려움을 미지의 존재라는 새로운 소재를 통해 풀어나간다. 미지의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인 채 결국 자살하고 마는 아포칼립스 세계. 그것의 등장으로 세상은 망하고, 사람들은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시각을 천으로 차단하고 있는데, 이는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과는 또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때론 일말의 가능성이 더욱 잔인한 법이다. 타의에 의해 시각이 제거된 게 아닌, ‘내가’ 직접 가린 눈은 오히려 더 답답하게 만든다. 감각을 직접 통제하는 게 괴롭고 동시에 그 감각이 제 구실을 할까 걱정스럽다. 이런 딜레마가 <버드 박스>의 긴장감을 만든다.
볼 수 있지만, 보아선 안 된다. 세상은 소리로 넘쳐나고 소리가 들린 곳엔 시선이 가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인다. 차라리, ‘시각이 아예 없다면’ 이런 유혹에 흔들릴 필요도 없을 거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든다. 미지의 존재로 시각은 존재의 당위성을 의심받는다. ‘사실은 없어야 됐던 게 아닐까?’, ‘저게 없어도, 저게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라는 사고는 결국 견고하게만 보였던 정상의 기준을 바꾼다.

- 버드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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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수잔 비에르
출연 산드라 블록, 존 말코비치, 트래반트 로즈
개봉 미개봉
일상적인 인종차별 속 숨겨진 공포
<겟 아웃>
발목을 옭아매고, 폭력과 죽음을 이끄는 존재. 이런 게 일상에 도처에 깔려 있다면 그야말로 공포 영화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갖고 있는 ‘공포성’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는 아주 오랜 시간 사회문화현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다. 영화 <겟 아웃>은 인종차별이 갖고 있는 잔인한 성질과 공포성을 전면에 드러낸 영화다. 누구도 인종차별과 공포영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지만, 조던 필 감독은 자신이 일상에서 겪었던 공포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깊숙이 파헤치고, 이를 장르적인 요소를 통해 풀어냈다.
<겟 아웃>의 큰 줄기는 백인 여자친구 부모 집에 놀러 간 흑인 남자친구가 겪는 온갖 수모로 이루어져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는 다양한 차별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의 깊게 볼만한 부분은 칭찬 역시 차별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이다. ‘흑인은 빠르지’ 라는 언어는 인간의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단순히 인종을 통해 거칠게 분류한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들이 진출할 수 있는 여러 영역을 한정 짓는 언어로 쓰이기도 한다. 결국, 제목처럼 ‘겟 아웃’ 되는 흑인들은 일상이 공포스럽다. 운전 하나를 해도, 주인공 크리스(다니엘 칼루야)의 운전면허증만을 요구하는 경찰. 손가락 거스러미처럼 약간의 불편함으로 시작된 공포는 최면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점점 폭력의 수위를 높여 간다.

-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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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던 필
출연 브래드리 휘트포드, 앨리슨 윌리암스, 캐서린 키너, 다니엘 칼루야
개봉 2017.05.17.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해피 데스데이> 시리즈
<해피 데스데이>는 공포 영화의 절대 불변의 법칙,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라는 클리셰를 반대로 이용해 만든 블룸하우스의 공포 영화다. 러닝 타임 내내 죽음을 반복하는 루프물 호러 영화로, 저예산 영화라도 기획력이 탄탄하다면 대박을 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낸 작품이다. 생일날이 무한히 계속되고, 참신한 방법으로 죽음이 반복되는 대학생 트리(제시카 로테)의 이야기를 보여주어,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체계적으로 ‘죽기’ 시작한 주인공은 나중에는 자신이 죽는 패턴을 학습하여 한층 더 강하게 발전해 나간다.
루프물의 재미는 처음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주인공이 나중엔 반복되는 시간을 역이용하는 데에 있다. 직전의 죽음으로 살인자에게 맞설 무기를 점차 갖춰 나가는 트리의 모습에서 관객은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특히, 남의 시선에 민감했던 과거 자신을 후회하며 오롯이 나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트리가 나체로 캠퍼스를 거니는 모습은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만든다. 관객의 심리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데에 집중하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해피 데스데이>에는 공포와 유머가 공존한다. “이것은 공포 영화가 아니다.”라는 카피처럼 <해피 데스데이>는 공포 영화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다.

- 해피 데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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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랜던
출연 제시카 로테, 이스라엘 브로우사드
개봉 2017.11.08.

- 해피 데스데이 2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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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랜던
출연 제시카 로테, 이스라엘 브로우사드, 피 부
개봉 2019.02.14.
무슨 '약'을 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더 보이스>
핑크색 배경에 강아지와 고양이, 순진한 얼굴의 라이언 레이놀즈까지. 공포영화 얘기를 하다가 도대체 이건 무슨 포스터인가 싶겠지만, 리뷰글을 보면 “절대 포스터에 속지 마세요”라는 게 대다수다. <더 보이스>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밝고, 잔혹한 일상을 보여주는 슬래셔 무비다. 말하는 강아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제리(라이언 레이놀즈)는 짝사랑하던 여자 피오나(젬마 아터튼)와 함께 꿈 같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의도치 않은 사고로 피오나가 죽고, 남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제리는 피오나의 머리를 잘라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동물과 이야기하는 제리인데, 잘린 머리와도 이야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피오니의 머리와도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약 한 알에 순식간에 어두침침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을 굉장히 능숙하게 포착해 낸다. 정신병으로 인해 동물, 시체와 대화를 나누던 제리가 약을 먹고 ‘정상’적인 세계에 들어오자 책임지지 못할 사건에 의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동물 친구들이 사라져 외로운 건 당연하다. 연쇄살인마를 이토록 유쾌한 톤으로, 잔인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었나. 약을 먹지 않았을 때의 화사한 효과는 오히려 극의 잔인함을 극대화한다. 아름다운 숲과 뮤지컬처럼 흘러가는 일상과 살인. 말도 안 되는 괴리감이 오히려 극의 에너지를 더한다. <데드풀>로 미친 라이언 레이놀즈에 입덕했다면 결코 놓치면 안 될 작품이다.

- 더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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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 안나 켄드릭, 젬마 아터튼
개봉 2018.08.29.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