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추석 열차표는 구했는지. 명절을 앞둔 기차역의 모습은 건조한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다. 저마다가 짊어진 짐에는 각자의 인생과 일상이 담겨 있다. 명절 열차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짐을 보자기에 싸서 구루마(수레가 맞는 말이지만 맛이 안 살아서 구루마로 대체한다)에 실은 할머니, 과자 하나를 쥐고 창밖을 구경하는 아이, 박스 안에서 머리만 삐죽 내밀고 있는 강아지, 무거운 짐을 들고 “그냥 차 타고 가자니까”라고 말하는 엄마와 “차 막힌다니까”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유독 명절을 앞둔 가을 기차는 일상의 냄새가 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기차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늘은 무작정 기차 여행을 떠나고 싶어 지는 영화들을 준비해 보았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마에다 코우키, 마에다 오시로, 오다기리 죠, 오츠카 네네, 키키 키린
개봉 2011년 12월 22일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동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큐슈 신칸센 개통을 계기로 탄생한 영화다. 2011년 3월 큐슈 신칸센 개통을 홍보하기 위해 큐슈 여객 철도인 JR규슈와 JR 동일본 산하의 광고 대행사의 기획으로 제작됐다. 신칸센이 개통할 즈음, 신칸센과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그 역시 철도를 좋아해서 흔쾌히 수락했다고. 재밌는 건, 큐슈 신칸센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등장한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포스터, 일본 규슈 신칸센 800 열차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마주 보고 달리는 신칸센이 엇갈리는 순간, 소원을 빌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믿은 아이들의 여정을 담고 있다. 기적은 특별한 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역설적이게도 일상 속 작은 기적들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티켓값이 부족할 때 우연히 발견한 동전, 하룻밤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노부부 등을 통해 작은 기적을 경험한다. 세계가 그들에게 보내는 긍정의 신호는 아이들의 길을 환하게 비춰준다. 그리고 스스로 이러한 작은 기적들은 곧 성장의 씨앗이 되어 아이들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준다.

기적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마에다 코우키, 마에다 오시로, 오다기리 죠, 오츠카 네네, 키키 키린

개봉 2011.12.22. / 2021.04.2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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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개봉 1996년 3월 30일

<비포 선라이즈>(1996)

기차 여행을 이보다 낭만적으로 그린 영화가 있을까. 유럽 횡단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순식간에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비포 선라이즈>는 많은 이들에게 기차 여행의 낭만을 심어 주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유럽의 환상을 고스란히 담은 멋들어진 풍광도, 마치 CG같은 드넓은 초원도 없다. 무척이나 현실적인 배경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관객은 “나도 혹시”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위해 필요했던 건 오직 언뜻 스치는 눈빛과 말을 틀 수 있는 계기, 그리고 계속해서 달리는 열차 뿐이었다. <비포> 시리즈를 모두 본 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비포> 시리즈의 핵심은 대화다.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기차처럼 그들은 빠른 시간 안에 가까워지고 하룻밤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들의 소리를 자막을 끈 채 듣고 있으면, 마치 기차가 굴러가는 소리와도 같다. 규칙적으로 나오는 소리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기적과 같은 웃음 소리. <비포 선라이즈> 속 사랑은 기차와 꼭 닮아 있다. 

(왼쪽부터) <비포 선라이즈>, 실제 비엔나 서역

두 사람이 탄 열차는 스트라스부르, 슈튜트가르트, 뮌헨을 거쳐 파리와 비엔나를 연결하는 급행열차였다. ‘코로나가 끝나면 나도?’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겐 아쉬운 소식이지만 2007년에 운행을 종료해 현재는 운행하지 않고 있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이 내린 곳은 비엔나 서역으로 서유럽과 헝가리 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다니는 곳이다. 서사가 없는 그곳은 그저 기차역일 뿐이지만, <비포 선라이즈> 팬에게는 그냥 기차역이 아니다.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제시와 셀린의 시작이 새겨져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한때 많은 <비포> 시리즈 팬들이 그들의 행보를 그대로 밟으며 영화 기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토록 낭만적인 기차 여행이라니
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개봉 1996.03.30. / 2016.04.07.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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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감독 이장훈
출연 박정민, 이성민, 윤아, 이수경
개봉 2021년 9월 15일

<기적>(2021)

한때 철로 위를 걷는 건 기차 뿐 만은 아니었다. 1986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기적>은 철로를 걸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차를 세울 수 있는 간이역이 없어 그들은 기차의 뒤를 따라 걷는다. 주인공 준경(박정민)은 기차를 세우기 위해 간이역을 세우고 싶어하는 고등학생으로 청와대에 54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간이역은 세워지지 않는다. 아버지 태윤(이성민)은 규정에 따라만 열차를 운영하는 엄격한 사람이기에 그에게 무언갈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 그럼에도 준경은 누나 보경(이수경)과 함께 마을에 남는 걸 고집하며 왕복 5시간 통학을 감수한다. 그런 준경을 좋아하는 라희(윤아)는 간이역 세우기 프로젝트에 동참하며, 이야기는 기찻길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명확한 끝을 향해 달려나간다. 

영화는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됐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양원역은 실제로 경북 봉화의 양원역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데, 이는 지자체 지원 없이 주민들이 직접 만든 한국 최초 민자역사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양원역은 1988년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정선 유천리 일대에 오픈 세트를 제작해 촬영한 것이다. 높은 리얼리티를 위해 1988년 설립 당시와 유사한 공간에 오픈 세트를 제작했는데, 대합실부터 승강장, 이정표 등 디테일을 살려 영화에 향수를 더한다. 

<기적> 촬영 현장 스틸
실제 양원역 대합실

실제 양원역은 국내에서 가장 작은 역으로 양원역이 생기기 전까지 원곡마을 주민들은 철길을 따라 승부역까지 나가 기차를 타야 했다. 터널과 철교 등을 걸어 오가느라 목숨을 잃은 주민들도 많았기 때문에 역을 세우고자 하는 주민들의 바람은 더욱 간절했다. 바람이 이루어진 건  1988년, 양원역이 공식적으로 임시 정차역으로 지정된 해다. 

영화의 주요 포인트 "윤아의 미모"
기적

감독 이장훈

출연 박정민, 이성민, 윤아, 이수경

개봉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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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감독 이정국
주연 최진실, 박신양
개봉 1997년 11월 22일

<편지>(1997)

가장 한국적인 기차 영화를 꼽자면, 역시 <편지>가 아닐까. 이제는 폐역이 된 춘천의 경강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편지>는 배우 박신양과 고(故) 최진실 배우를 주연으로 영원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환유(박신양)는 기차역에서 만난 정인(최진실)에게 호감이 있다.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단 하나의 계기가 필요한데 <편지>에선 바로 기차표다. 정인이 급히 뛰어가다가 떨어뜨린 지갑과 기차표를 돌려주는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순수한 사랑을 만들어간다. 풍족하진 않아도 서로를 애틋이 여기는 결혼 생활을 하던 두 사람에게 불현듯 불행이 찾아온다. 깨끗한 사랑과 시한부 판정, 죽음 등 클리셰적인 요소가 대부분이지만, 때론 이런 뻔함이 순수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오래된 것이 곧 낡은 건 아니니까, 오래된 것에는 시간의 흐름을 이겨낸 강인함이 있다. 

실제 경강역 사진
<편지> 속 경강역

굴봉산에서 내려 1.5킬로미터를 걸으면 나오는 작은 폐역, 경강역. 춘천행 기차는 ‘itx-청춘’으로 세련되게 바뀌었다. 속도가 훨씬 빠른 건 물론 뻐덕한 기차 시트 특유의 멀미 나는 냄새도 나지 않는다. 여러모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경강역은 비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아 아주 낡고 녹슬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강역엔 사람들이 찾아온다. 가평레일바이크 코스의 회차점이 된 경강역은 간이 역사에서 여행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체류 시간은 10분 남짓하지만, 얼룩얼룩한 벽이나 붉은 벽돌, 청색 기와, 굴뚝 등은 이곳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보여준다. <편지>의 시간으로부터 강산이 두어번 바뀌었다. 그간 수많은 훌륭한 멜로 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멜로퀸’을 자처하는 배우들이 언론에 보도됐다. 더 이상 경강선에는 기차가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경강역에 가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건너야 할 자신의 사막을 가지고 있다”는 정인의 내레이션처럼 경강역에는 사람들이 건너온 시간과 추억들이 자리하고 있다.

때론 순수한 사랑을 믿고 싶을 때가 있다.
편지

감독 이정국

출연 최진실, 박신양

개봉 199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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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즐링 주식회사
감독 웨스 앤더슨
주연 오웬 윌슨, 애드리언 브로디, 제이슨 슈왈츠먼, 아마라 카렌, 웰레스 우로다스키
개봉 2007년 12월 13일

<다즐링 주식회사>(2007)

<다즐링 주식회사>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재치가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굉장히 귀엽게 진행이 된다. 잿빛이었을 삼형제의 이야기를 웨스 앤더슨은 인도의 낡고 오래된 기차 위에서 화려한 색감을 통해 풀어나간다. <다즐링 주식회사>는 나사 빠진 형제들이 관계를 천천히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는 영화로 그들의 소동을 멀찍이서 바라보게 만든다. 자기부터 챙길 것인지 동생들에게 오지랖 부리는 첫째와 불쑥불쑥 화를 내고 아버지의 유품은 모조리 챙기고 다니는 둘째, 전 애인의 전화를 도청하는 셋째. 얼빠진 그들의 행보를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성숙해 있는 삼형제가 보인다. 성장은 곡선이 아니라 계단식이라고 하던가. 눈치를 채면 이미 늦었다. 인도에서의 기차 여행은 소동이 한바탕이었지만 종국엔 성장의 계기가 되어준다.

(왼쪽부터) 실제 다즐링 히말라야 트레인, 관광열차 토이 트레인

국내에선 다즐링 ‘주식회사’로 번역되었지만 원제 ‘The Darjeeling Limited’를 떠올려보면 ‘다즐링 특급 열차’가 조금 더 맞는 표현이다. 실제로 인도에는 세 개의 산악 철도가 존재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다즐링 히말라야 철도다. 1881년에 개통된 이 철도는 여전히 운행 중에 있으며 현재는 관광 열차 토이 트레인의 노선으로 활용되고 있다. 웨스 앤더슨은 실제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촬영하길 바랐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딛고 기차 안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는 “나는 언제나 기차에서 일이 벌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장소가 변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장소가 이야기와 함께 진행되는 그런 것 말이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찍은 이유에 대해 밝혔다. 인도 타르 사막을 가로지르는 다즐링 특급열차의 차창 밖은 변하지 않는 듯 어느순간 다른 곳에 도착해 있다. 엄마를 찾으러 떠났던 그들은 서로를 발견하며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처음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지만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린 기차를 탄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던 순간들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