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이그와 더불어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통해 시리즈에 작별인사를 고하는 중요한 배우가 또 하나 있다. 바로 CIA 요원 펠릭스 역의 제프리 라이트다. 한국 관객에겐 흔히 조연을 주로 맡는 흑인 배우로 알려진 제프리 라이트가 지난 30여 년간 스크린과 TV를 오가며 선보여 온 캐릭터들을 한데 모았다.

<바스키아>

1990년 뉴욕과 워싱턴 등지의 소극장에서 연기를 시작한 제프리 라이트는 <바스키아>(1996)로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화가 출신의 감독 줄리앙 슈나벨이 80년대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의 삶을 영화화했다. 실제 바스키아는 괴팍하기로 악명높았지만, 그의 기억을 토대로 바스키아를 그려내기로 한 영화 속 제프리 라이트는 유순하고 예민한 측면을 강조했다.

<라이드 위드 더 데블>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웨스턴 <라이드 위드 더 데블>(1999).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연출한 서부극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라이트가 연기한 캐릭터 대니얼이 완성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남군에 소속돼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이어가는 제이크(토비 맥과이어)와 대니얼의 인종을 아우르는 우정은 영화의 핵심적인 테마인 '해방'의 가치에 무게를 더한다.

<샤프트>

<샤프트>(2000)는 흑인 위주의 액션영화 '블랙스플로테이션'의 걸작 <샤프트>(1971)를 90년대 대표 흑인 감독 존 싱글턴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주인공 존 샤프트를 사무엘 L. 잭슨이 이어받은 가운데, 라이트는 부동산갑부의 아들인 백인 월터(크리스찬 베일)를 도와 샤프트를 공격하는 마약상 피플스 역을 맡았다. 도미니카 출신이라는 설정에 따른 독특한 억양이 특히 인상적인데, 평소 알고 지내던 도미니카인의 말투를 모사해 만든 것이다.

<미국의 천사들>

제프리 라이트는 할리우드 입성 이전, 연극 무대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펼쳐왔다. 토니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에서 흑인 게이 간호사 벨리즈를 연기해 1994년 토니 어워즈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졸업>의 마이클 니콜스 감독이 연출한 TV드라마 판 <미국의 천사들>(2003)에도 출연해 벨리즈를 비롯 1인4역을 소화하며 골든글로브와 에미 어워드를 휩쓸었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

1962년에 개봉한 정치 스릴러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를 <양들의 침묵>의 조나단 데미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 걸프전 참전용사인 벤 마르코 소령(덴젤 워싱턴)은 12년이 지난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고, 부하였던 알 멜빈이 찾아와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부대원들이 모두 세뇌당했다는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라이트가 짧은 시간 퍼트리는 불안이 영화 전체를 카오스에 빨려들게 한다.

<브로큰 플라워>

<브로큰 플라워>(2005)는 왕년에 바람둥이었던 돈 존스톤(빌 머레이)이 돌연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아들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편지를 받고, 아들의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옛 연인들을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옆집에 사는 이웃이자 여행을 시작하는 돈에게 여행 동선과 에티오피아 음악을 담은 CD를 주는 윈스턴을 라이트가 연기했다. 시종일관 유쾌한 라이트와 언제나 뚱해 보이는 빌 머레이의 오묘한 콤비플레이의 맛이 전반부의 묘미!

<007 카지노 로얄>

CIA 요원 펠릭스 라이터는 50년간 25편이 제작된 <007> 시리즈에 11편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다. 그동안 여덟 배우가 펠릭스 역을 거쳐갔는데, 제프리 라이트는 그 중 유일한 흑인 배우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007 카지노 로얄>(2006)로 처음 시리즈에 합류한 라이트의 펠릭스는, 카지노 현장에서 제임스 본드를 처음 만나 적재적소에서 구세주 노릇을 하며 본드와의 우정을 돈독히 한다. <퀀텀 오브 솔러스>(2008)에 이어 오랜만에 <노 타임 투 다이>(2021)로 시리즈에 참여해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다.

<W.>

<JFK>과 <닉슨> 등으로 미국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연출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오바마가 선출되기 한해 전인) 2008년 조지 W. 부시에 대한 영화 <W.>를 선보였다. 학부 시절 정치학을 전공했던 라이트는 영화 커리어 초기부터 꾸준히 실존인물로 분해왔는데, <W.>에선 부시 정부 국무장관이자 오바마 이전에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차지한 흑인 정치인이었던 콜린 파웰을 연기했다. 짧고 듬성듬성한 백발과 약간 발달한 하관 등 외모부터 파웰과의 싱크로율이 꽤 높은 편이다.

<캐딜락 레코드>

음악영화 <캐딜락 레코드>는 전설적인 블루스 레이블 '체스'의 수장 레너드 체스(애드리언 브로디)의 삶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체스의 최고 인기 아티스트 머디 워터스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제프리 라이트. 에타 제임스 역의 비욘세와 더불어 라이트 역시 직접 해당 아티스트의 노래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보드워크 엠파이어>

1920~30년 금주법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HBO 시리즈 <보드워크 엠파이어>엔 4번째 시즌부터 합류했다. 발렌틴 나르시스는 당시 박사 학위를 가진 극히 드문 흑인으로, 흑인의 뿌리를 고려해 그들을 리비아인으로 칭하고 권리 높이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마약 근절은커녕 오히려 교묘하게 판매를 북돋는 등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을 파고드는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핵심을 강조한다.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 시리즈는 지난 우승자들이 참여하는 75회 경기가 펼쳐지는 2편 <캣칭 파이어>(2013)부터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캣칭 파이어>부터 시리즈에 합류한 제프리 라이트는 35회 우승자였던 비티 역을 맡았다. 전투력보단 천재적인 지능으로써, 캣니스 일행과 연합해 문제를 해결하는 캐릭터. 부상당해 휠체어 신세가 된 채로 피날레 <모킹제이 파트 2>(2015)까지 등장해 평화를 추구한다.

<굿 다이노>

제프리 라이트의 커리어 가운데 목소리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2012)의 영어 더빙판으로 목소리 연기를 시작한 그는 한국계 감독 피터 손이 연출한 픽사 애니메이션 <굿 다이노>에서 프란시스 맥도맨드와 함께 주인공 알로의 부모 역을 맡았다. 아버지 공룡은 중간에 죽지만, 알로의 무의식으로 계속 등장해 아들에게 지혜를 일깨워준다. 라이트의 목소리가 이렇게 진중하고 믿음직스럽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될 것.

<웨스트월드>

제프리 라이트는 J.J. 에이브럼스가 제작, <다크나이트>의 작가 조나단 놀란이 시나리오를 맡은 HBO 시리즈 <웨스트월드>(2016~)를 '하드캐리' 하고 있다. 웨스트월드의 프로그래밍 부서장 버나드 로는 시즌1에서 그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앞으로 진행된 웨스트월드의 세계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시즌3까지 진행된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늑대의 어둠>

HBO가 서비스하는 TV영화 <보이콧>(2001), <O.G>(2018) 등에서 주연으로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저력을 증명해온 라이트는 <늑대의 어둠>(2018)을 시작으로 넷플릭스 작품들에서도 맹활약 중이다. 은퇴한 늑대 전문가 러셀(제프리 라이트)은 늑대와 함께 아이가 실종됐다고 믿는 여자의 요청을 받아 비밀을 파헤친다. 구출을 향한 의지와 눈앞에 현실을 맞닥뜨리는 공포가 뒤엉킨 라이트의 낯선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왓 이프...?>

세상의 온갖 명배우를 섭렵하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제프리 라이트도 합류했다. MCU의 네 번째 TV시리즈이자 첫 번째 애니메이션 시리즈 <왓 이프...?>의 왓처의 목소리를 담당한다. 멀티버스가 진행된다는 설정 아래 기존 MCU 히어로들이 대거 등장하는 가운데, 왓쳐는 이 멀티버스를 해설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프렌치 디스패치>

발표하는 작품마다 어마어마한 캐스팅 파워를 갈아치우는 듯한 웨스 앤더슨이 드디어 제프리 라이트를 초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잡지를 만들던 이들에게 존경을 바친 <프렌치 디스패치>의 세계에서 라이트는 음식 칼럼니스트 뢰벅 라이트를 연기한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작가로 추앙 받는 제임스 볼드윈에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다.

<더 배트맨>

마블에 이어 DC 역시 제프리 라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트맨> 세계관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 제임스 고든 역에 캐스팅 됐다. 게리 올드만, J.K 시몬스 등 수많은 배우들이 고든 역을 거쳐갔지만, 흑인 배우가 고든을 연기한 건 제프리 라이트가 처음이다. <클로버필드>와 <혹성탈출> 시리즈의 맷 리브스 감독이 라이트의 퍼포먼스를 빌어 구현할 고든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는 것만으로 <더 배트맨>에 대한 기대치가 치솟는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