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물기가 차오르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큰했던 겨울 냄새는 사라지고, 포근한 봄 향기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누군가는 ‘미세먼지 냄새’라며 툴툴대겠지만, 그럼에도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길어진 햇살과 차오르는 꽃들을 보면 드디어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봄소식을 알리는 여러 가지 시그널 중 가장 아름다운 건 역시 ‘벚꽃’ 아닐까. ‘삶의 아름다움’이란 꽃말을 갖고 있는 벚꽃은, 꽃말처럼 팍팍한 삶에 한 줌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래서일까, 유독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진 일본 영화들이 보고 싶어 진다. 오늘은 랜선 벚꽃 놀이를 할 수 있는 일본 영화들을 소개한다. 유독 벚꽃이 아름다웠던, 그래서 영화마저 아름답게 보였던 감성적인 영화들로 추려보았다.


초속 5센티미터
감독 신카이 마코토
출연 미즈하시 켄지, 하나무라 사토미, 오노우에 아야카

<초속 5센티미터>(2007)

‘이제는 정말 봄이구나’를 실감할 즈음 꺼내보는 영화, <초속 5센티미터>다. 한국에서는 <너의 이름은.>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표작으로, 흰 설원 위에 갇혀버린 기차, 벚나무길을 걸어가는 어린 두 사람 등 계절의 아름다움을 완연하게 담아낸 영상미로 유명하다. ‘빛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빛을 현실보다 아름답게 사용해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하나가 풍경화처럼 보일 만큼 영상미 하나만으로도 그의 작품을 볼 이유는 충분하다. 현실적이지만,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과장된 빛의 질감 표현 덕분에 그의 작품은 아무 장면에서 멈춰도 그 자체로 풍경화가 된다.

<초속 5센티미터>는 신카이 마코토 골수팬들을 양성해 낸 작품으로, 벚꽃이 배경이 아닌 주인공이 된다. 과학시간 같은 ‘초속 5센티미터’라는 제목은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속도’라고. 실제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와는 다르지만, 영화의 애틋함과 아련함을 담기엔 충분해 보인다. 영화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두 남녀의 관계를 보여주는 감성적인 작품이다. 지극히 영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말 덕분에 첫사랑의 아픔을 잊고 지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그때의 감정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지루한 일상은 잊히지 않을 순간을 동경한다고 했던가. 찰나의 순간 피고 지는 벚꽃과 같은 첫사랑이지만, 그럼에도 잊을 수 없는 관계를 영화는 아주 천천히,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벚꽃을 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영화.

초속5센티미터

감독 신카이 마코토

출연 미즈하시 켄지, 하나무라 사토미, 오노우에 아야카

개봉 2007.06.21. / 2017.11.0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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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감독 츠키카와 쇼
출연 하마베 미나미, 키타무라 타쿠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살벌한(?) 제목과는 달리 일본 특유의 애틋한 감성을 담고 있는 로맨스 영화다. 포스터에서부터 물씬 느껴지는 봄내음 가득한 청춘 로맨스물로, 원작은 250만 부 이상이 팔리며 대히트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시한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외톨이가 편한 나(키타무라 타쿠미)는 우연히 췌장이 망가져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야마우치 사쿠라(하마베 미나미)를 알게 된다. 괴상한 제목의 의미는 ‘옛날 사람들은 아픈 부위와 똑같은 동물의 부위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쿠라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시한부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쿠라를 만나면서 나는 조금씩 그에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를 만나고 누구든 상관없던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 생긴 인생으로, 췌장을 먹듯, 그의 마음이 조금씩 옮겨져 간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시한부 삶, 이라는 다소 전형적인 소재를 섬세하게 다룬 작품으로 유사 소재의 청춘 로맨스 영화의 대표 격이 되기도. 말랑하기만 한 작품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기 때문에 눈물샘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감독 츠키카와 쇼

출연 하마베 미나미, 키타무라 타쿠미

개봉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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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야기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마츠 다카코, 다나베 세이치

<4월 이야기>(2000)

올해 벚꽃 개화 시기는 3월 말에서 4월 즈음이다.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개화하는 시기, 4월엔 꼭 봐야 하는 영화, <4월 이야기>다. <4월 이야기>는 러닝타임이 67분으로 굉장히 짧은 편인데 마치 순식간에 사라지는 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짧아서 더 아쉽고, 여운이 남는 봄처럼 <4월 이야기>에는 처음이기에 느낄 수 있는 설렘과 불안들이 녹아있다. 이와이 슌지의 대표작으로 자연광을 이용한 은은한 영상미와 청춘의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을 잘 담아내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중 <4월 이야기>는 이와이 슌지의 밝은 감수성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러브레터>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 반대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에게 입덕한 사람이라면 ‘같은 감독 작품이라고?’ 싶을 만큼 다른 정서를 갖고 있어 당황할 수도 있다.

<4월 이야기>는 ‘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으로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하는 순간에 엔딩 크레딧이 뜬다. 주인공 우즈키(마츠 다카코)는 도쿄 근교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게 된다. 가족과 작별인사를 마친 뒤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은 그는 다소 한적한 무사시노라는 동네에 자리를 잡은 후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영화는 진한 핑크빛 로맨스를 담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어색한 첫 만남과 설렘을 담고 있다. 유화보단 수채화의 색감을 더 닮은 영화. 군더더기 없이 인생의 ‘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봄을 맞이하는 영화로 충분하다. 특히 영화 전반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벚꽃 잎이 휘날리는 장면들은 누구나 겪었던 그 시절의 봄을 추억케 한다.

4월 이야기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마츠 다카코, 다나베 세이치

개봉 2000.04.08. / 2013.04.25.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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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아오이 유우, 아라이 하나, 카쿠 토모히로

<하나와 앨리스>(2004)

또 하나의 ‘화이트’ 이와이 슌지 작품, <하나와 앨리스>는 열일곱 동갑내기 소녀들의 삼각관계를 풋풋하게 그려내고 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10대 시절의 사랑은 왜 그리 어렵고 엉망진창이었는지. <하나와 앨리스>는 그런 엉망진창이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아라이 하나)와 앨리스(아오이 유우)의 모습을 잘 담아냈다. 미야모토(카쿠 토모히로)를 좋아하는 하나는 그의 관심을 얻을 기회만 엿보다가 간 큰 거짓말을 하게 된다. 바로 ‘저한테 고백하신 일은요?’라며 그를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만들어 여자 친구 행세를 한 것. 앨리스는 하나의 거짓말에 가담하게 되지만 으레 관계가 그렇듯,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거짓말, 질투처럼 부정적인 것들을 이보다 더 사랑스럽게 보여준 영화가 있을까. <하나와 앨리스>는 10대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치기 어린 감정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지만, 10대니까. 거짓말도, 질투도 순수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시절을 <하나와 앨리스>는 수채화처럼 담는다. 어리숙하면서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어른인 관객이 보기엔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그들의 치기 어린 행동들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바로 그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걸 우린 알고 있기 때문인 걸까.

하나와 앨리스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아오이 유우, 스즈키 안, 카쿠 토모히로

개봉 2004.11.17. / 2014.07.10.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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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히로세 스즈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로맨스는 싫지만 랜선 벚꽃 놀이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카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언제나 새로운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또 다른 가족 영화다. 작은 바닷가 마을 가마쿠라시에 살고 있는 세 자매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나게 된다. 이미 어머니도 잃은 스즈는 계모와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영 미덥지 않았기에 세 사람은 스즈에게 가마쿠라에 와서 함께 살자고 권유한다.

15년 이상 만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에 덤덤히 반응하는 차녀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와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는 삼녀 치카(카호), 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장녀 사치(아야세 하루카), 그리고 그들을 떠난 뒤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막내 스즈. 그들에게 아버지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들의 공동생활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관해 영화는 묻고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히로세 스즈

개봉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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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