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해 더 애틋한 사랑,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고, 학창시절 순간의 치기어림으로 치부해 버리는 문구이기에 다분히 폭력적이다. 이성애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레즈비언들은 여러 시선을 받는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철저히 자신을 숨기려는 레즈비언도 있을 테고, 그 과정에서 헤어지는 연인들도 분명 있을 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사랑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닌 것처럼, 레즈비언의 사랑은 사회에 나온 우리 주변 곳곳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여성 퀴어 영화가 개봉했다. 이를 기념하는 마음으로 여성 퀴어 영화 5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캐롤>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캐롤>(2016)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지. <캐롤>의 프롤로그는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포착해낸다. 배경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1952년 뉴욕으로, 사진작가 지망생 테레즈(루니 마라)는 백화점에서 일하던 도중, 상류층 가정주부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보게 된다. 긴장과 설렘이 가득한 카메라의 시선은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포개어졌을 때, 서로는 직감했을까. 이 만남이 운명일 거라고. 소위 '트로피 와이프'라 불리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연기하는 캐롤과 한 번도 남자친구에게 '싫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테레즈. 캐롤은 외로움을, 테레즈는 욕망을 채우지 못한 채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사회적 지위는 다르지만, 결핍을 느끼던 두 여성의 사랑을 어떠한 자극적인 요소 없이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눈빛만으로도 감정을 온전히 표현해내어 로맨스 영화 특유의 애틋함을 완벽히 보여주었다. 영화는 제68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최다 부문 노미네이션 등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쓸었다. 77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노미네이트된 건 246회다. 이렇게 줄줄이 수상 이력을 소개했지만, 이 영화를 봐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대사 한 마디면 충분하다. "My angel, flung out of space(나의 천사,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서로의 세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운명적인 만남, 이보다 더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가 있을까. 

캐롤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카일 챈들러

개봉 2016.02.04. / 2021.01.27.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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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발레리아 골리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와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찰나 같은 만남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의 저택에 도착하면서 만나게 된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는 초상화에 실릴 포즈를 취하길 거부했고, 이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어머니의 요구로, 그의 친구가 되어 몰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멈춰있는 피사체를 응시하면서 그저 그림으로 옮기기만 했던 마리안느의 시선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면서 사랑을 느낀다.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던 두 사람의 마음은 이내 커다란 불꽃이 되어 그들 인생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으로 선연하게 타오르는, 영화 자체가 아름다운 불꽃같다." 이동진 평론가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남긴 한 줄 평이다. 시선으로 타오르는 불꽃, 이보다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맹렬하다. 마치 두 사람의 마음에 일었던 사랑이란 감정처럼. 그럼에도 영화는 놀라우리만치 고요하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을 비극으로 보는 '동정 어린 시선'도 거두고, 레즈비언의 사랑을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거두었다. 대중이 레즈비언을 바라보는 커다란 두 가지 시선을 거두니, 영화는 황홀하리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포착해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발레리아 골리노,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개봉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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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김소혜, 성유빈, 나카무라 유코, 키노 하나

<윤희에게>(2019)

<윤희에게>는 국내 여성 퀴어 영화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입소문만으로 12만 관객을 동원하는 결과를 거뒀다. 여태까지 퀴어 영화가 대개 청춘의 이야기였다면, <윤희에게>는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부모 세대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스토리는 간결하다. 영화는 10대 시절, 사랑을 인정받지 못했던 두 소녀가 세월이 지나 재회하는 이야기다. 영화 곳곳에는 여백이 많다. 마치 배경이 된 오타루의 설원 같다. 그 여백은 때로는 쓸쓸하고 외로웠다가, 때로는 차오를 무언가에 대한 희망을 넌지시 던져준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흰 배경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부시게 빛나는 공간인 것처럼. 영화는 동시에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냈다.

'아줌마'라는 이름 아래 살고 있던 윤희(김희애)는 편지에 의해 호명된다. 편지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호명하게 되어있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중년에게 생각보다도 더 낯선 일이다. 보편의 폭력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자신을 꺼내는 것이고, 먼지 쌓였던 진짜 나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꾸준히 '만월'로 불리던 이 영화가 결국 <윤희에게>가 된 이유지 않을까. 제목에 걸맞게, 영화는 아름다운 독백이 돋보인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그 여백 가득한 말은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때로는 사랑을 담을 때 기나긴 대화보다 짧은 독백 한 마디가 더 선명한 법이다.

윤희에게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김소혜, 성유빈, 나카무라 유코, 키노 하나

개봉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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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
감독 요아킴 트리에
출연 에일리 하보, 카야 윌킨스

<델마>(2018)

많은 여성 퀴어 명작들 중 굳이 <델마>를 고른 이유는, 장르의 확장성 때문이다. <델마>는 분명히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다만, 초능력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로맨스, 멜로에 한정되어 있던 퀴어 장르를 스릴러와 초자연적 SF로 저변을 넓혔다는 점에서 <델마>는 퀴어영화의 넓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어릴 적부터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을 내면에 지닌 델마가 힘의 비밀을 파헤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다. 노르웨이 출신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으로, <라우더 댄 밤즈>(2016)로 국내에서는 이름을 알렸다. 

주인공 델마(에일리 하보)는 친구 아냐(카야 윌킨스)에 대한 사랑을 억누르려 할 때마다 원인 모를 발작에 시달린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델마의 내면은 악마의 힘과 같은 것이었다. 파괴적이고 불온하기에 금기시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신경이완제와 기도로 자신을 억누르려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마치 '마녀사냥'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하지만 맹렬한 에너지를 언제까지고 가둘 수는 없는 법. 으레 그렇듯, 틀은 깨지기 마련이다. 델마는 초자연적인 힘의 정체를 찾아 나서고, 그 끝에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로맨스도 좋지만, 주인공의 특별한 성장기를 보고 싶다면 추천.

델마

감독 요아킴 트리에

출연 에일리 하보, 카야 윌킨스

개봉 201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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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
감독 오영산, 양조개
출연 담선언, 양시영

제목만 보고는 '대만영화인가' 싶었지만 홍콩 영화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는 홍콩의 학교 로맨스 영화로, 12년 내내 여학교 학생대표를 해오던 윙(담선언)과 그의 유일한 친구 실비아(양시영)의 애틋한 관계를 담고 있다. 영화는 29살이 된 윙이 전화 한 통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비아로, 윙의 첫 사랑이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학창 시절 두 사람이 나눴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여학교 다녀서 그래. 대학 가면 남자가 좋아질걸?", "네가 어려서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청소년 퀴어들이 용기를 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다. 사실, 이것도 꽤나 유한 반응이지만. 학창 시절,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은 알지 못해도 온 마음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건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기 때문이고, 서툴러서 무척이나 많은 아쉬움을 남겼기 때문이며, 그래서 결국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나긴 그 시절의 이야기를 끝으로 두 사람은 청춘과 작별할 수 있을까.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

감독 양조개, 오영산

출연

개봉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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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