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이제는 한국 문화가 들어간 작품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도리어 한국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그래서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판타지를 심어주는 작품마저 있다. 최근 개봉한 <엄마>를 비롯해 할리우드 작품 속 한국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했다.
~ 2000
일벌레에 수전노
200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한국 배경 영화는 대부분 6.25전쟁, 즉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한국을 배경이 아닌 문화로 묘사하는 건 타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 중심이었다. 짧지만 한국인을 강렬하게 묘사해 입방아에 오른 영화는 <택시>였다. 뤽 베송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초인적인 운전 실력을 가진 택시 기사가 경찰과 힘을 합쳐 범죄를 막는 액션 영화다. 영화에 한국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1분 남짓인데, 한국인 택시 기사는 한 사람이 운전할 때 다른 사람은 트렁크에서 자는 방식으로 2교대 근무한다는 묘사였다. 훗날 뤽 베송은 그저 코믹한 장면으로 넘었다고 하나(실제로 그는 내한도 자주 한 친한파다) 한국 관객들에겐 적나라할 정도로 돈을 밝히는 묘사로 충격을 줬다.
일을 (심하게) 열심히 하고 돈을 좋아하는 한국인에 대한 묘사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에서도 그려졌다. 브루클린의 흑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인종차별 갈등을 그리는 이 영화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상점 주인으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신랄한 논조의 영화라서 국내엔 한인을 조롱하는 영화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민자들의 환경(이를테면 차별받기에 점점 드세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던가)이 작중 풍부하게 묘사됐다는 쪽에 힘이 더 실렸다. 즉 20세기 말 해외 영화에서 한국인은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어떤 이유든 굉장히 돈을 밝히고 기가 센 부류로 그려지곤 했다.
2000~
여전히 전쟁의 나라
21세기에 들어섰을 때,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 묘사가 뿅하고 좋아지진 않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조차 한국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아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특히 2002년 <007 어나더 데이>가 대표적이다. <007 어나더 데이>는 냉전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러시아·KGB(러시아 정보기관) 외에 007에 대립할 적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눈을 돌리던 중 공산당, 세습,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007 어나더 데이>의 배경을 한반도로 삼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나 한국에 대한 고증이 허술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완성도까지 좋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오히려 역풍을 맞고 말았다. 이 무심한 고증은 꽤 오래 이어졌는데,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오>에서 파주를 밀림처럼 묘사한 것이 유명하다.
변화 1. 한국 드라마
할리우드가 무관심하게 한국을 소재로 취하는 동안, 상황은 조금씩 바뀌었다. 엄청나게 큰 사건 하나가 모든 걸 바꾸진 않았다.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점점 눈에 띄는 일이 늘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월드컵 개최 같은 국가적 행사, 미국 시장을 노린 배우와 가수들의 진출,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 드라마의 부흥 등 다양한 일이 조금씩 누적되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쌓였다. 그런 일을 크게 견인한 것은 아마 '한국 드라마'일 것이다.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듯 한국 드라마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비슷했다. 2011년 영화 <비스틀리>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비스틀리>엔 극중 카일과 린디가 한국 드라마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들어갔다. 슬쩍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네?"라고 구체적인 언급이 이어지는데, 그 장면을 위해 영화 속 한국 드라마를 별도로 촬영했다고 한다. 실제 한국 드라마와는 괴리감이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 속 집 구조나 패션을 보면 꽤 그럴싸하다.
한국 드라마가 특히 (한국 시청자들은 싫어하는) '기승전사랑'으로 귀결되는 특징을 반영한 작품도 있다. 2016년 <드라마월드>는 K-드라마에 빠진 덕후가 드라마 속 세계로 빠져든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한국 드라마 특유의 클리셰와 전개가 패러디됐고, 한-미-중 합작품답게 한국 배우들이 카메오로 얼굴을 비췄다. 메이저 방송사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드라마가 작품 테마로 사용되었다는 것부터 '한드'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변화 2. BTS 등 케이팝
201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 문화의 위상은 자국민인 우리들조차 믿기 힘들 정도로 높아졌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방탄소년단(BTS)을 위시한 K-POP(케이팝)이 있다. 그 결과 케이팝을 극중 요소로 활용하는 경우가 부쩍 증가했다.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건(<루시퍼>, <저스티스 리그>) 예삿일이고 소년소녀들이 케이팝 팬으로 그리기도 한다(<스파이 지니어스>). 아직 제작에 착수하지 못했지만 케이팝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내용의 영화까지 할리우드에서 제작이 논의되고 있다.
픽사 애니메이션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이런 추세를 정확히 보여준다. 주인공 메이와 친구들은 극중 보이밴드 '포타운'의 열성팬이다. 포타운은 도미 시 감독의 청소년기에 유행한 2000년대 초 보이밴드(백스트리트 보이즈, 엔싱크 등)와 케이팝 그룹을 혼합시켜 탄생한 캐릭터들이다. 특히 포타운 멤버 중 '태영'은 BTS에서 따왔다고 감독이 직접 밝히기도(BTS 뷔의 본명이 태형이다). 한국계 미국인로 설정된 메이의 친구 애비는 작중 종종 한국어로 감탄사를 하기도 한다(픽사의 한국인 스태프가 연기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커뮤니티에서 한국인이란 속성을 이렇게 자주 드러내는 것도 변화의 결실을 보여준다.
변화 3. 한국계 이민자 영화인들의 부상
K-드라마, K-팝, 이런 것들로 이 정도 입지가 가능하다…라고만 하면 다소 편협하게 보일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변화에 힘을 싣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배우의 미국 진출과 함께 한국계 이민자 배우들, 영화인들이 점차 늘어나 이런 문화적 현상을 빚었다고 봐야 적당하다. <로스트> 김윤진과 다니엘 대 킴, <클라우드 아틀라스> 배두나,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이병헌, <분노의 질주> 성강, <해롤드와 쿠마> 존 조, <워킹 데드> 스티븐 연, <메이즈 러너> 이기홍, <그레이 아나토미> 산드라 오 등 배우들의 활약과 <미나리> 정이삭, <푸른 호수> 저스틴 전, <아이 엠 우먼> 문은주 등 (앞서 얘기한) 한국계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성장해 영화인으로 자리매김한 것. 두 가지가 함께 아우러진 시너지라고 볼 수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