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한 편의 영화를 내놓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데뷔작 이후 차기작까지 훌륭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데뷔작이 그저 소 뒤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여겨져 다시는 세 번째 작품을 만들지 못할 수 있으니까. 두 번째 작품이 첫 번째 작품에 미치지 못하는 '소포모어 징크스', 그걸 이겨낸 영화 감독들. 외신 '인디와이어'에서 소개한 35명의 감독 중 대중적으로 친숙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소포모어 징크스를 물리친 5명을 골라 소개한다. 

'인디와이어' 기사에서 소개한 감독 35

루카스 돈트(걸-클로즈)
쥘리아 뒤쿠르노(로우-티탄)
코엔 형제(블러드 심플-아리조나 유괴 사건)
벤 애플렉(가라 아이야 가라-타운)
샤카 킹(뉼리위즈-유다와 블랙 메시아)
그레타 거윅(레이디버드-작은 아씨들)
토마스 빈터베르그(뒤로 걷는 소년-셀레브레이션)
캐스린 비글로우(사랑없는 사람들-죽음의 키스)
데이빗 핀처(에이리언 3-세븐)
폴 토마스 앤더슨(리노의 도박사-부기 나이트)
웨스 앤더슨(바틀 로켓-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안드레아 아놀드(붉은 거리-피시 탱크)
대런 아로노프스키(파이-레퀴엠)
아리 애스터(유전-미드소마)
봉준호(플란다스의 개-살인의 추억)
쉐인 카루스(프리머-업스트림 컬러)
라이언 쿠글러(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크리드)
소피아 코폴라(처녀 자살 소동-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알폰소 쿠아론(러브 앤드 히스테리-소공녀)
에바 두버네이(아이 윌 팔로우-미들 오브 노웨어)
로버트 에거스(더 위치-라이트하우스)
데브라 그래닉(절망의 끝-윈터스 본)
마리엘 헬러(미니의 19금 일기-날 용서해줄래요?)
배리 젠킨스(멜랑콜리의 묘약-문라이트)
스파이크 존즈(존 말코비치 되기-어댑테이션)
데이빗 린치(이레이저 헤드-엘리펀트 맨)
테렌스 맬릭(황무지-천국의 나날들)
스티브 맥퀸(헝거-셰임)
크리스토퍼 놀란(미행-메멘토)
조던 필(겟아웃-어스)
린 램지(쥐잡이-모번 켈러의 여행)
쿠엔틴 타란티노(저수지의 개들-펄프 픽션)
에드가 라이트(피스트풀 오브 핑거스-새벽의 황당한 저주)
클로이 자오(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로데오 카우보이)
사프디 형제(아빠의 천국-헤븐 노우즈 왓)

데이빗 핀처
<에이리언 3> → <세븐>

데이빗 핀처
<에이리언 3>(왼쪽), <세븐>

데이빗 핀처는 소포모어 징크스가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유명한 일화지만, 그의 데뷔작 <에이리언 3>는 전적으로 제작사의 터치가 너무 많았다. 오죽 넌더리가 났으면 훗날 <에이리언> 시리즈를 복원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연출작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다. 어쩌면 그래서 다음 작품 <세븐>을 더욱 이 악물고 연출했을지 모른다. CF감독 출신, 영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데뷔작, 이 모든 걸 뛰어넘어야 앞으로도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결판을 낼 수 있었다. 익명의 연쇄살인마와 그를 쫓는 두 형사를 그린 <세븐>은 데이빗 핀처를 거장의 떡잎이 보이는 감독으로 낙점짓게 했다. 음습한 공기로 가득찬 도시와 인간의 죄를 되묻는 영화의 태도는 현대 누아르의 이정표를 세웠다. 

에이리언 3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시고니 위버

개봉 199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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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먼

개봉 1995.11.11. / 2016.10.26.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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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플란다스의 개> → <살인의 추억>

봉준호
<플란다스의 개>(왼쪽), <살인의 추억>

영화는 결과적으로 팔려야 한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눈에 띄더라도 흥행에 실패한다면 차기작을 언제 만들 수 있을지는 하늘(과 같은 투자자)의 뜻에 맡겨야 할 때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능수능란한 블랙 코미디와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돋보였다. 하지만 사라진 반려견을 찾는다는 스토리나 예상치 못하게 불쑥 튀어나오는 유머는 관객들에게 낯선 것들이었다. 

영화는 (저예산이어서 다행이었을 정도로)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당시 봉준호의 재능을 믿은 차승재 제작자는 '이어하기'를 제공했다. 봉준호 감독은 실제 범죄, 그 범죄를 무대에 올린 연극을 영화화했다. 이성적인 형사와 동물적인 육감을 가진 형사, 근데 이제 80년대 한국을 곁들인. <살인의 추억>은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봉준호 감독은 '흥행 실패'에서 '흥행 감독'으로  타이틀을 바꿀 수 있었다. 단 한 편 만에. 전작의 '우리 시대 독한맛'을 80년대 풍경으로 순화한 <살인의 추억>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깬 것을 넘어 거장 봉준호의 첫 축포를 쏘아올렸다.

플란다스의 개

감독 봉준호

출연 이성재, 배두나

개봉 200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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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김상경

개봉 200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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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아 뒤쿠르노
<로우> →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로우>(왼쪽), <티탄>

한 번 자극적인 맛을 내면, 그 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더 자극적이게 하거나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자극을 찾거나. 어느 쪽이든 선택은 쉽지 않다. 그래서 쥘리아 뒤쿠르노는 데뷔작 <로우> 에서 차기작 <티탄>까지 4년이나 걸렸는지 모른다. <로우>는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나 생고기를 맛보고 인육까지 손을 댄 소녀의 이야기였다. 자신 안에 숨겨진 욕망에 휘둘리는 한 사람의 심리와 '육식'이란 일상적인 것을 폭력적으로 승화시킨, 고어와 예술의 절충안 같은 영화였다. 

<티탄>은 이보다 더 괴상한데, 자동차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여성이 실종자로 신분을 위장해 그의 아버지과 산다는 내용을 그린다. 폭력성은 유지하되 모호하고 비정상적인 전개와 이미지로 메시지를 강화시켰다. 그러니까 <로우>와 <티탄>은 육체와 폭력이란 소재에서 똑같이 자극적인 맛이지만, 전개 양상이나 스타일은 '다른 자극'을 지향했다. 쥘리아 뒤쿠르노는 <티탄>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들어올리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렸지만.

로우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

출연 가렌스 마릴러, 엘라 룸프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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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

출연 아가트 루셀, 뱅상 랭동, 가렌스 마릴러

개봉 20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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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미행> →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오른쪽)
<미행>(왼쪽), <메멘토>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을 사로잡은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시간을 뒤섞고 뒤집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돋보인다. 이건 그의 '수공업 데뷔작' <미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을 미행하는 취미를 가진 남자가 다른 남자를 미행하던 도중 겪는 일을 그린 <미행>은 조촐한 제작 환경(주말에만 촬영할 수 있어 촬영에 1년이 걸렸다)에도 독창적인 구성으로 주목 받았다.

이후 놀란은 상업 영화 <메멘토>로 본격적으로 데뷔했는데, <미행>의 시간을 뒤섞는 스타일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설정을 '10분마다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규칙으로 승화시켜 관객들에게 좀 더 많은 단서를 남겨두는 식이었다.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재배치해 복선을 암시하는 놀란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매번 신선한 도전을 곁들인 작품으로 호평을 받는 그에게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걱정했던 때가 있다니, 그게 오히려 낯설다. 

미행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제레미 데오발드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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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조 판톨리아노

개봉 2001.08.25. / 2020.08.19.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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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필
<겟 아웃> → <어스>

조던 필
<겟 아웃>(왼쪽), <어스>

한국에선 화제성에 비해 작품 반응이 모호한 조던 필 감독.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작품은 지극히 미국적인 요소를 전재로 하고 있기 때문. 데뷔작으로 역대급 가성비를 보여준 <겟 아웃>은 흑인들이 겪은 인종차별적 순간들과 역사를 응축한 작품이었고, <어스>는 '인간띠 잇기'란 캠페인을 교묘하게 비튼 우화였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선 여러 모로 낯선, 두 영화가 추구하는 일상적인 공포가 조금은 멀게 느껴졌던 것. 그에 비해 미국 본토에선 조던 필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 호평을 받았다. 특히 <겟 아웃>의 은유적 문법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스케일을 키우고 묵직한 분위기를 가미한 <어스>는 <겟 아웃>이 조던 필의 '초심자의 운'이 아니었단 걸 입증했다. 은유와 상징으로 메시지를 전하되 맛깔나는 전개도 놓치지 않는 조던 필은 차기작 <놉>을 준비하고 있다.

겟 아웃

감독 조던 필

출연 브래드리 휘트포드, 앨리슨 윌리암스, 캐서린 키너, 다니엘 칼루야

개봉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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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

감독 조던 필

출연 엘리자베스 모스, 루피타 뇽, 야히아 압둘 마틴 2세, 애나 디옵, 윈스턴 듀크, 팀 헤이덱커

개봉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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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