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박석영 감독의 ’ 3부작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들꽃>(2013), <스틸 플라워>(2014), <재꽃>까지 세 편의 영화는 모두 기댈 곳 없는 소녀들의 홀로서기를 그립니다. 박석영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들꽃>은 세 명의 가출 청소년이 살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두 번째 영화 <스틸 플라워>는 오갈 데 없는 소녀가 자립의 의지를 다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재꽃>은 제 한 몸 겨우 건사하게 된 소녀가 다른 연약한 존재를 품어 안게 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들꽃> Wild Flowers , 2014

겨울날, 홈리스 소녀 수향(조수향)과 은수(권은수)는 한 남성에게 마구 얻어맞고 있는 소녀 하담(정하담)을 구해냅니다. 수향은 하담도 자기와 같은 처지라는 걸 알고 하담을 데리고 다닙니다. 세 소녀는 몸 누일 곳을 찾기 위해 철거 직전의 빈집과 여관방을 전전합니다. 음험한 목적으로 소녀들을 노리는 어른들을 피해 도망도 다닙니다. 소녀들이 길을 헤매는 이유를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는 소녀들이 놓인 참혹한 현실만을 묘사합니다.

이때만 해도 <들꽃>엔 날선 기운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메마르고 차가우며, 어른들은 소녀들을 이용하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찬 악인들로 그려집니다. 온전히 때묻지 않은 소녀들은 서로를 성심껏 돕다가도 살기 위해 종종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조력자는 어디에도 없기에 관객은 죄책감을 안고 소녀들을 보아야 했습니다. 냉골에서 서로를 껴안고 잠드는 소녀들의 품에서만 삶의 온기를 겨우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들꽃

감독 박석영

출연 조수향, 정하담, 권은수, 이바울, 강봉성

개봉 2014 대한민국

상세보기

<스틸 플라워> Steel flower , 2015

<스틸 플라워>의 하담은 <들꽃>의 하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 바다를 앞에 둔 하담은 제 몸만 한 짐을 안고 어쩔 줄 모른 채 휘둘립니다. 바다를 보며 하담은 무엇을 다짐한 것일까요. 그 뒤로 영화는 하담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어설프게라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운동화 밑창이 떨어지면 본드로 꼭꼭 다시 붙인 뒤 걸음을 재촉합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탭댄스 학원에서 춤추는 학생들의 몸짓을 따라해보기도 합니다.

<스틸 플라워>에서도 하담을 착취하려는 악인이 등장하지만, 이제 하담은 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같습니다. 다만 그때 하담은 가슴을 꼿꼿이 펴고 무섭게 마주 오는 거센 파도를 견디어냅니다. 세상의 위협과 냉기를 꿋꿋이 이겨내는 강철 같은 꽃’, 박석영 감독의 영화는 이때부터 희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스틸 플라워

감독 박석영

출연 정하담

개봉 2015 대한민국

상세보기


<재꽃> Ash Flower , 2016

여름날, 하담은 외딴 마을에서 조용히, 편안히 지내는 중입니다. <재꽃>의 하담이 <스틸 플라워>의 하담임은 그가 가진 물건들로 알 수 있습니다. 전기세라도 보태겠다며 부득불 손에 봉투를 쥐어줘도 네가 무슨 돈을 내냐며 손사래치는 집주인 아주머니는 마음씨가 좋습니다. 하담은 작지만 깨끗한 방에서 홀로 지내며 집 청소와 블루베리 농사를 돕는 등 일도 합니다. 한편 하담이 사는 마을에 해별(장해금)이 당도합니다. 해별은 아버지가 어느 동네 누구이니 찾아가라는 엄마의 말을 따라 아버지 명호(박명훈)를 찾기 위해 온 것입니다.

자신의 옛 모습이 생각난 건지 하담은 마을에 흘러 들어온 해별을 각별히 여깁니다. 하담은 자신의 방에 해별을 재우고, 일도 가르쳐줍니다. 가끔 한적한 곳으로 해별을 데리고 놀러 나가기도 합니다. 해별은 하담을 잘 따릅니다. 어느 날,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일에 해별이 다치는 일이 발생하자 하담은 어른들을 향해 꾹꾹 눌러놓았던 분노와 진심을 터뜨립니다. 연약한 홀씨 같았던 하담은 어느새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자라나 자신보다 약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됐습니다.

‘꽃’ 3부작을 통해 하담이라는 인물의 성장을 지켜보는 동안 관객은 박석영 감독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마주해왔고, 해석했는지 느끼게 됩니다. 하담의 자립이 상처와 절망으로 시작해 희망과 긍지로 마무리된다는 것이 자못 흐뭇합니다. ‘’ 3부작은 결국 연민과 사랑, 연대가 인간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 거라고, 세상의 많은 연약한 존재들을 향해 하담과 박석영 감독이 띄우는 투박하고 진심 어린 편지입니다.

재꽃

감독 박석영

출연 정하담, 장해금, 정은경, 박명훈, 박현영, 김태희

개봉 2016 대한민국

상세보기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재밌으셨나요? 아래 배너를 눌러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영화 이야기, 시사회 이벤트 등이 가득한 
손바닥 영화 매거진을 구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