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화들이 있다. 소위 시대를 잘못 만난 영화들. 개봉 시기가 블록버스터와 겹쳐 외면받았거나, 영화의 주제가 시대에 앞서 개봉 당시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불운의 명작들. 손익분기점으로 평가받는 혹독한 영화계에서 배우 정재영이 주연을 맡은 몇 개의 영화들이 그랬다. <아는 여자>가 그랬고, <김씨 표류기>가 그러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명작의 재발견은 필연이며, 망작과 명작은 관객 스코어 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늘은 배우 정재영의 작품을 훑어보겠다. 대중의 눈과 귀에서 잊히지 않고 훗날 재평가된 영화를 중심으로 정리했지만, 그저 내가 좋아해서 끼어 넣은 작품들도 있다.
"정재영이 죽는다면 영화를 그만하겠다."
장진, <퀴즈왕> 제작보고회에서
정재영이 한때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때 장진 감독은 ‘네가 만약 잘못되면 더 이상 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예의상'말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가슴으로도 같은 마음이었다'라는 진심도 마지막에 잊지 않고 덧붙인다.
장진은 서울예전 90학번인 정재영의 한 학년 선배로 둘은 연극, 영화 등 서른 편 이상의 작품을 함께 했다. ‘택시 드리벌’, ‘박수칠 때 떠나라’, ‘웰컴 투 동막골’ 등 90년대 장진이 히트시킨 연극 무대에는 정재영이 늘 함께했고, 장진 감독이 <킬러들의 수다>(2001)에 정재영을 캐스팅하기 위해 제작사 사무실에 드러누운 것은 유명한 일화다. <킬러들의 수다>는 정재영이 주조연급 역할을 맡은 첫 영화다.
절실함과 품위에서 출발하는 코미디의 정수 <아는 여자>(2004)
대중은 이 영화를 나중에야 더 좋아한 것 같아요.
(이나영, <아는 여자> 씨네21 인터뷰 중)
2004년 정재영은 장진이 감독한 영화 <아는 여자>를 통해 마침내 주연배우로 발돋움한다. “처음 보는 이상한 멜로를 보여줄게”라던 감독의 호언처럼, <아는 여자>는 호불호 갈리는 반응 속에서도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다.
영화는 자신에게 없는 세 가지를 자각하는 동치성(정재영)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에겐 내년이 없고, 아직 진정한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경험이 없으며, 아무리 술에 취해도 주사가 없다. 이런 그에게도 남들에겐 없고 그에게만 있는 게 있으니, 바로 10년 동안 동치성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한이연(이나영)이라는 존재다. <아는 여자>는 10년간 한 남자만을 흠모해온 한이연과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맨 동치성을 비추며 사랑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양하게 정의한다. 영화는 자신이 가진 세 가지를 자각하는 동치성을 비추며 수미상관으로 끝난다. 셋 중 하나는 ‘사랑’이니 나머지 두 개는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장진은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아는 여자>는 마치 N사의 S라면 같은 작품이다. 수많은 라면이 새로 나오지만 그 회사의 대표 라면은 언제나 그 라면인 것처럼 나도 계속 작품을 만들어도 <아는 여자>를 뛰어넘기 힘들 것 같다’라는 말을 한다. 감독의 자기 평가는 정확했다. 지금도 추가되는 호평 일색의 평점은 장진식 유머와 B급 감성이 2022년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 아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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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진
출연 정재영, 이나영
개봉 2004.06.25.
농촌 총각 연기 중 단연 발군! <나의 결혼 원정기> (2005)
'택배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짤.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사진 속 정재영의 모습은 택배를 받으러 나갈 때 기쁨과 반가움으로 상기된 우리들 그 자체다. 이 유명한 짤의 출처가 바로 영화 <나의 결혼 원정기>다. 서른여덟 모태솔로 시골 노총각 만택(정재영)이 그의 친구 희철(유준상)과 결혼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원정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정재영은 어수룩한 농촌 총각 역에 자신만의 페이소스를 담아낸다.
부동의 신뢰를 구축한 정재영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럽고 힘을 뺀 자연스러운 시골 총각 연기는 '진짜 시골 사람을 데려다 연기시키면 어떡하냐!' 감탄하며 보게 된다. 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들 때마다 정재영이 연기한 우둔할 정도로 정직하고 순수한 만택을 보며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위로 받는다.
<나의 결혼 원정기>와 같은 해 개봉한 <웰컴 투 동막골>에서 정재영은 인민군 장교 ‘리수화’로 분해 전국 800만 관객을 불러오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후 <거룩한 계보>, <강철중: 공공의 적 1-1> 등 장진이 연출했거나 각본, 제작으로 참여한 작품들에 꾸준히 출연했고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도 거두며 충무로의 실력파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 나의 결혼 원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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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황병국
출연 정재영, 수애, 유준상
개봉 2005.11.23.

- 웰컴 투 동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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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배종
출연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개봉 2005.08.04.

- 거룩한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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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진
출연 정재영, 정준호, 류승룡, 민지환
개봉 2006.10.19.

- 강철중: 공공의 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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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우석
출연 설경구, 정재영
개봉 2008.06.19.
묵직한 이야기를 정재영식으로 풀어낸 <김씨 표류기> (2009)
자살로 삶을 마감하려 했던 한 남자의 생에 대한 분투를 담은 영화 <김씨 표류기>는 개봉 당시에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손익분기점이 200만인데, 70만을 조금 넘긴 관객이 이 영화를 찾았다. 포스터가 흥행 실패의 원흉이라는 반응들도 있었지만, 좋은 작품은 언제라도 빛을 보게 마련. 10년도 더 지난 작품이지만 <김씨 표류기>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울고, 웃으며, 열심히 평점을 달고 있다. 영화는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밤섬에서 눈을 뜬 김씨(정재영)의 눈물겨운 무인도 생존기를 그린 영화는 은둔형 외톨이, 왕따, 소외 문제를 안고 사는 현대인의 외롭고 목적 없는 삶을 '웃프'게 은유한다. 정재영의 연기는 단연 압권인데 밤섬에서의 소소한 행동 하나 하나(예컨대 트렁크 팬티 윗 부분을 퉁 잡아 튕기거나 효소처리 스테비아에 입맛 다시는)에 혼이 담긴 열연을 펼친다.
이후 정재영은 <이끼>(2010)에서 이장 천용덕 역을 맡는다. 캐스팅이 발표된 날 원작 웹툰 팬들 사이에서 대파란이 일어날 정도로 미스 캐스팅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분장의 힘과 함께 기대 이상의 호연을 펼친 정재영은 이 영화로 부일영화제와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 김씨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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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해준
출연 정재영, 정려원
개봉 2009.05.14.

-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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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우석
출연 정재영, 박해일, 유준상, 유선, 허준호, 유해진, 김상호, 김준배
개봉 2010.07.14.
강박증, 결벽증이 이렇게 귀여울 일? <플랜맨> (2014)
전작 <김씨 표류기>에서 덥수룩한 수염에 가려져 있던 정재영의 멀끔함이 빛나는 영화다. <플랜맨>에서 정재영은 1초까지 계획하며 살아가는 남자 한정석으로 분한다. 예측불가능하고 무질서하며 세균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정석(정재영)은 모든 일에 알람을 맞추고 계획대로 사는 평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정석은 평생 처음 '무계획적인 삶'을 결심하고,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유소정(한지민)의 권유로 밴드에 들어간다.
땀에 절은 남자와 포옹하고 소독을 위해 세탁소로 냅다 뛰는 한정석, 헤어 캡을 착용하고 다소곳이 잠을 청하는 한정석, 장난감을 피하려다 기어코 쓰러지는 한정석, 고양이를 안아 들고 기절해 실려가는 한정석...강박적인 한정석을 완벽 표현한 정재영의 깨알 연기 포인트는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한정석과 케미 발하는 세탁소 아저씨, 도서관 직원들 그리고 고양이까지,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귀여움과 무해함으로 상처입은 한 어른을 쓰다듬어 준다.

- 플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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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성시흡
출연 정재영, 한지민
개봉 2014.01.09.
짜증의 의인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2015)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 정재영은 짜증의 총합 그 자체로 분한다. 햇병아리 연예부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에게 상사인 하재관(정재영)은 소리친다. “지금은 니 생각, 니 주장, 니 느낌 다 필요 없어!”. 첫 출근부터 찰진 욕이 오가는 가운데 손대는 일마다 사건사고인 도라희는 부장 하재관의 집중 타겟이 되어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쉴 새 없이 버럭 대는 하부장, 밉지만은 않다. 일견 악질 상사인 것 같지만, 사실 그의 그런 모습은 존폐가 위태로운 연예부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과 자신의 팀원들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더 미워할 수 없게 이 남자, 기러기 아빠로 불규칙한 식습관과 과로로 간경화에 시달리는 중이다. 라희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사실 라희를 자신의 후배로 눈여겨보고 있다고 넌지시 밝히며 기자로서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망설이는 라희를 일깨워준다. 츤데레 하부장. 이런 역 정재영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우연에 기대는 상황 전개와 연예기자의 리얼리티에 영웅 판타지를 끼얹은 후반부 전개는 다소 당혹스럽지만, 연예부 부장 역 정재영의 인간미 가득한 생활형 열연은 그런 전개쯤 눈 감게 해준다.
이후 정재영은 <어셈블리>, <검법남녀> 등에 출연하며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힌다. 특히 <검법남녀 시즌 2> 이후 약 2년 만에 출연한 MBC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2021)는 기존 오피스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중장년 서사를 깊이 있게 그려내 중년판 '미생'으로 호평을 받으며 MBC TV 미니시리즈 중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기도 했다.

-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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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기훈
출연 정재영, 박보영
개봉 2015.11.25.

- 미치지 않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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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최정인
출연 문소리, 정재영, 김남희, 이상엽, 김가은, 안내상, 박원상, 김중기, 조복래, 차청화, 천희주, 이서준, 정예나, 최윤정, 천영훈, 구민혁, 김규도, 송섭, 이삼우, 박진수, 이혜지, 정성훈, 손예지, 석하나, 차영우, 박동영, 추은경, 임일규, 김윤서, 김예은, 박성근, 임현수, 김진호, 정여준
방송 2021, MBC
그리고,, 드디어 <노량: 죽음의 바다> (2023)
정재영은 2023년, 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노량: 죽음의 바다>으로 다시 관객을 찾는다. 2019년 <기묘한 가족> 이후 약 4년 만의 극장 스크린 복귀라 더없이 반갑다. ‘왜군’을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과 철군을 해야 하는 ‘왜군’, 그리고 두 나라와 얽힌 명나라, 3국의 전투이자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다룰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정재영은 명나라 장수 '진린' 역을 맡았다. 개봉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노량: 죽음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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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한민
출연 김윤석, 백윤식, 정재영, 허준호
개봉 미개봉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