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예술에는 DNA라도 있는 걸까? 한 집안에 한 명만 나오기도 어려운 영화인을 두 명이나 배출하는 집이 있다. 더군다나 형은 스크린 뒤편의 촬영 현장을 장악하는 뛰어난 감독이 되었다면, 동생은 스크린 앞을 에너지로 가득 메우는 매력적인 배우가 되었다. 감독 형에, 주연 동생이라니. 포스터의 가장 큰 이름은 두 형제가 차지하는 셈이다. 게다가 형이 자신의 영화에서 동생을 계속 페르소나처럼 사용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두 형제의 미친 케미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형제가 담당하는 위대한 네 쌍의 형제를 지금 바로 만나보자!


형 류승완 - 동생 류승범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한국에서 감독 형 - 배우 동생 조합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바로 이 형제의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충무로의 액션/활극의 거장 류승완 감독과 충무로에서 가장 개성 강한 배우 류승범 형제다. 류승범이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연기를 시작한 데뷔작 역시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이었다. 사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이전에 류승완 감독이 만들었던 단편 <패싸움> (1998)과 <현대인> (1999)에 새로 <악몽>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총 4편의 단편을 이어 붙인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다. 앞선 세 단편에서 류승완 감독은 스스로 주연을 맡았지만, 마지막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석환 (류승완 역)의 동생인 상환 역에 자기 동생 류승범을 캐스팅하며 형제의 위대한 동행은 시작되었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항간에 류승범 배우가 배우로 입문하게 된 계기를 다룬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양아치 역이 필요하던 참에 집에 들어와 보니 웬 양아치가 앉아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는 류승범이 어린 시절부터 춤, 악기, 디제이 등 끼가 많고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동생을 배우로 데뷔시킨 것을 꼽을 정도로 그는 동생의 연기에 대한 애정이 크다. 형제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을 시작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 (2002),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주먹이 운다> (2005),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2007), <부당거래> (2010), <베를린> (2012)에 이르기까지 총 7편에 함께 했다. 이는 류승완 감독 필모그래피 11편 중 8편에 출연한 안길강 배우 다음으로 많은 출연 횟수이다. 특히나 <부당거래>에서 ‘호의가 반복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검사 주양 역은 류승범의 인생 캐릭터 중 하나로 꼽힌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12년 이후엔 형제가 함께한 작품이 없다. 두 형제가 10년 만에 다시 만나 새로운 작품을 함께 하기를 한 사람의 영화 팬으로 꿈꿔본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감독 류승완

출연 류승완, 박성빈, 류승범, 배중식, 김수현

개봉 2000.07.15. / 2019.10.10.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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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엄태화 - 동생 엄태구
엄태화 감독 엄태구 배우 (자료 제공: 뉴스 1)

 충무로에서 가장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엄태구를 고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허스키한 음색에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가 큰 키로 상대를 내려다본 채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그 순간 서늘함에 모두가 얼어붙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엄태구의 모습은 수줍고 과묵한 편이다. 형 엄태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전화로 ‘동생이 집에서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며’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형제는 과묵하고 술도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형은 독립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섬세한 연출을 보여주고, 동생은 나오는 영화마다 스크린을 휘어잡는다. 두 형제가 <잉투기> (2013)을 통해 평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 언론에서는 제2의 류승완 - 류승범 형제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했다.

영화 <잉투기>

 하지만 류승완 감독이 류승범을 영화의 세계로 인도한 것과 달리 두 형제는 이미 서로 연출과 배우의 진로를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밝힌다. 실제로 엄태구 배우는 2003년 <계절의 끝>을 통해 단역으로 데뷔했고, 엄태화 감독은 2002년 <선희야 놀자>를 처음 연출했다. 하지만, 2010년 단편 <유숙자>를 통해 형제가 처음 만나 작업한 이래로, <하트바이브레이터> (2011), <숲> (2012)의 단편과 장편 <잉투기> (2013), 상업영화 입봉작인 <가려진 시간> (2016)까지 함께했다. 그중 2012년 발표한 <숲>은 평단의 극찬과 함께 감독 엄태화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아쉽게도 엄태화 감독의 차기작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두 형제가 함께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엄태구 배우가 없는 엄태화 감독의 차기작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잉투기

감독 엄태화

출연 엄태구, 류혜영, 권율

개봉 20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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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조슈아 사프디 - 동생 베니 사프디
형 조쉬 사프디, 동생 베니 사프디 (출처: imdb)

 이젠 할리우드로 조금 눈을 돌려보자. 사실 사프디 형제는 공동 연출에 더 가깝다는 측면에서, 제2의 코엔 형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굿 타임> (2017)을 통해 흡입력 있고 파격적인 연출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두 형제는 각본은 형이, 편집과 연기는 동생이 맡고 감독은 두 형제가 공동으로 작업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보스턴 대학교 영화과에 나란히 입학한 이래로 2009년 <Daddy Longlegs (아빠의 천국)>이라는 작품으로 공동 연출을 시작한다. 이후에도 여러 작품을 함께 작업한 이들은 2017년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굿타임>을 통해 할리우드의 떠오른 신예로 자리 잡는다. 이 작품에서 동생 베니 사프디는 주인공 코니의 동생 지적장애인 닉을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문 너머로 보여주는 베니 사프디의 연기는 먹먹함을 넘어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충격을 준다.

영화 <굿타임>

 이후 형제는 애덤 샌들러와 함께 2020년 <언컷 젬스>를 발표하며 자신들의 재능을 폭발시켰다. 애덤 샌들러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 (2002)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이며 자신이 그저 그런 코미디 배우가 아님을 증명했다. NBA 스타였던 케빈 가넷이 출연한 것으로도 알려진 <언컷 젬스>는 506회의 F Word가 등장하면서 7번째로 그 비속어를 많이 쓴 영화로 유명하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아무런 상도 지명받지 못했지만, 2022년에도 애덤 샌들러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동생 베니 사프디의 연기 인생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었던 <리코리쉬 피자> (2021)에서 촉망받는 시장 조엘 왝스 역을 맡았던 그는 프랑스의 거장 클레어 드니의 차기작 <스타스 앳 눈>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차기작 <오펜하이머>에 캐스팅되며 연기자로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굿타임

감독 베니 사프디, 조슈아 사프디

출연 로버트 패틴슨, 베니 사프디

개봉 20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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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제임스 건 - 동생 숀 건
제임스 건 감독 (중앙)과 숀 건 배우 (오른쪽에서 두번째)

 할리우드의 사고뭉치 감독 제임스 건은 마블에서 가장 팬을 많이 보유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연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히어로 무비를 찍기 이전부터 B급 영화와 특유의 익살스러운 유머가 가득한 그의 영화의 페르소나는 단연 그의 동생 숀 건이다. 1996년 제임스 건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프로 Z급 영화 제작사 ‘트로마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트로미오와 줄리엣>의 각본을 맡을 당시에도 그의 동생 숀 건은 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제임스 건이 처음으로 만들었던 히어로 물 (이라 쓰고 블랙코미디라고 읽는) <슈퍼> (2010)에서도 숀 건은 토비 역을 맡아 영화의 한 페이지를 담당했다.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위즐

 하지만, 두 형제가 빛이 나기 시작했던 때는 단연 MCU에 합류해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연출했을 때다. 욘두 휘하의 라바저스 멤버 중 하나인 크래글린 역을 맡은 숀 건은 점차 그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에서 욘두가 사망하면서 그의 화살을 물려받는 존재가 바로 크래글린이다. 아직 지느러미 조작이 서툴어 드랙스 목에 꽂기도 할 정도지만, 욘두의 뒤를 이어 가오갤 멤버들의 조력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제임스 건이 회생시킨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시리즈에선 말도 할줄 모르는 반인반수의 위즐 역을 맡기도 한다. 시종일관 짐승 울음소리만 내질러대면서 유리창을 핥기도 하는 털복숭이 족제비 위즐의 모션 캡쳐를 담당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

감독 제임스 건

출연 크리스 프랫, 조 샐다나, 데이브 바티스타, 빈 디젤, 브래들리 쿠퍼

개봉 20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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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