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단편들이 있다. 누군가는 대나무 사이를 가르는 무술을 떠올릴 테고, 다른 누군가는 뒷골목을 헤매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칠중주: 홍콩 이야기>(2020, 이하 <칠중주>)는 홍콩영화의 거장 감독 7명이 홍콩을 주제로 찍은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칠중주>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 나아가서는 근미래까지 홍콩의 타임라인을 각 감독의 시각으로 촘촘히 엮어 보여주어, 영화를 통해 홍콩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오늘은 <칠중주>로 모인 홍콩 영화 명감독 7명의 대표작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 칠중주: 홍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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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허안화, 두기봉, 서극, 임영동, 홍금보, 원화평, 담가명
출연 홍천명, 오진우, 제니퍼 유, 원화, 토니 쯔-텅 우, 임달화
개봉 2023.05.11.
홍금보 - 쾌찬차
홍콩영화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 아닐까. 홍콩의 전설적인 액션배우이자 감독으로 활동하는 홍금보는 100kg가 넘는 거구임에도 날렵한 쿵푸 액션을 선보이는 걸로 유명했다. 슬림하고 탄탄한 액션배우들 사이에서 홍금보는 단연 눈에 띄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배우 홍금보의 모습만 기억하지만, 감독으로서의 홍금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무술감독으로 영화판에 먼저 자리를 잡은 그는 <강시선생>(1985), <강시선생2>(1986) 등 홍콩식 호러물을 연달아 흥행시키면서 배우이자 유능한 제작자, 또 감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홍금보는 성룡, 원표와 함께 80년대 홍콩영화 대표 트리오 '가화삼보'로 불렸는데, 그들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이 바로 <쾌찬차>(1984)다. 쾌찬차는 지금으로 따지면 ‘푸드트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영화는 데이비드(원표)와 토마스(성룡)가 스페인에서 쾌찬차를 운영하다 우연히 아름다운 여성 실비아(로라 포너)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홍금보는 감독 겸 배우로 사설탐정 사무소에서 일하는 모비 역을 맡았다. 홍콩 영화지만, 스페인 올 로케이션이라 꽤나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 쾌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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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홍금보
출연 성룡, 홍금보, 원표, 로라 포너, 케이스 비탈리, 베니 어키데즈, 허브 에델만
개봉 1985.01.01. 2015.05.14. 재개봉
허안화 - 여인사십
허안화는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중 한 명으로, 사회문제를 ‘여성’의 시선에서 날렵하게 포착해낸 영화인으로 유명하다. 홍콩영화하면 무협 혹은 누아르를 떠올리기 쉬운데, 허안화는 장르적 한계를 넘어 가부장제 속에서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이나 빈곤한 이주민의 삶을 깊게 관찰해 표현했다. ‘작품 간 편차가 크다’라는 평을 간혹 받지만 치매 노인을 둔 가정의 어려움을 평범한 중년 여성의 시선으로 그린 <여인사십>(1994)은 3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이다.
그의 대표작 <여인사십>는 40대 평범한 워킹맘 손씨 부인이 주인공이다. 맞벌이지만 집안일을 전담하던 주인공은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까지 간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아들의 어머니이자, 남편의 아내, 이제는 시아버지의 며느리 역할까지 해야 하는 손씨 부인의 모습에서 나의 엄마, 아내, 그리고 내 모습을 만나게 된다. “30년 전 이야기네”라고 쉽게 넘겨버릴 수 없다. <여인사십>은 점차 심해지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과 직장인 중년 여성이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를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다.

- 여인사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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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허안화
출연 소방방, 교굉, 나가영
개봉 1996.09.07.
담가명 - 아버지와 아들
‘홍콩영화계의 잠자는 용’,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진정한 거장’ 등 담가명 감독을 수식하는 말은 무척 많다. 그리고 그 말은 하나같이 그가 ‘실력에 비해 명성을 얻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홍콩영화계의 선구자로 꼽히는 그는 자국, 외국 모두 실력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왕가위의 스승’이라는 평가가 그닥 달갑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담가명의 작품 자체로 평가받기보다 ‘왕가위의 스승’으로서의 모습이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살수호접몽>(1989) 이후 감독으로서 17년간 공백기를 가졌던 것도 대중이 그를 잊어버리는 것에 한몫했다.
<아버지와 아들>(2006)은 17년 동안 이어졌던 공백기를 깨고 담가명이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는 한때 잘 나갔으나 이제는 아내를 때리는 폭력적인 남편의 전형인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총명하고 효심이 깊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매일같이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어머니의 가출 계획을 아버지에게 밀고하는 아들. 영화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 가족을 상처 입히는 인물들을 조명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평단의 극찬과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잠자던 용이 깨어났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전 작품들에 대해서도 재평가 받게 되었다.

-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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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담가명
출연 오경도, 곽부성
개봉 미개봉
원화평 - 취권
무술인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힌 원화평은 <풍광살수>(1970)를 시작으로 여러 굵직한 작품의 무술감독을 맡으며 영화판에 들어왔다. 이후 <취권>(1978)부터 <사형도수>(1978), <남북취권>(1979) 등을 연출하여 ‘코믹쿵푸’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이제는 여러 미디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취권’을 지도한 게 바로 원화평이다. 독특한 무술 연출로 이름을 날린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매트릭스>의 무술감독을 맡아 할리우드 액션 스타일까지 선도하게 된다.
그가 연출한 작품 중 최고봉을 따지자면 역시 <취권>이 아닐까. <취권>은 당시 무명이었던 성룡을 최고 스타로 만든 작품으로, 아직도 아류작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하다. 동네 건달 황비홍(성룡)이 괴짜 스승을 만나 암살자를 물리치는 내용으로 줄거리는 심플하지만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취객의 무술이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웠다. 통각도 잊은 듯 얻어맞아도 굴하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도 꽤나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

- 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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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원화평
출연 성룡, 황정리, 원소전
개봉 1979.09.29.
두기봉 - 흑사회
두기봉의 영화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기만성’이다. 80~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감독들과 달리, 그는 2000년대 초에 그 진가를 드러냈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스타일을 바꾼 것도, 대단한 전환점을 맞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홍콩 누아르’ 장르를 매년 꾸준히 만들었고, 노력 끝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에 가깝다. 다른 감독들이 ‘타고난 천재’ 스타일이라면, 두기봉은 전형적인 ‘노력형 천재’였다. 노력형 천재가 으레 그렇듯, 그는 철저하게 촬영 현장을 통제해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완벽하게 구현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두기봉의 영화의 키워드를 굳이 하나 뽑자면 ‘폼생폼사’다. 느슨한 개연성에 캐릭터의 행동 동기도 불분명하다. 그저 ‘멋진 모습’ 하나만으로 2시간을 끌고 가는데 그 모습이 꽤나 호쾌하다. 성긴 전개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폼만 잡는 영화’지만, 그 시절 홍콩영화의 ‘멋’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몇 안 남은 ‘스타일리스트 감독’이다. 그의 작품은 대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편이나 <흑사회> 시리즈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작이다. 1, 2편 모두 평단과 대중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1편은 두기봉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영화는 다수결로 차기 보스를 뽑는 홍콩 흑사회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왕좌 쟁탈전을 다루고 있다. 줄거리는 심플하나, 흑사회의 잔인하고 냉정한 세계를 완벽하게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상미와 음악은 물론 ‘민주주의의 타락’이라는 뼈아픈 메시지까지 그야말로 3박자가 딱 들어맞는 걸작. 홍콩 누아르를 좋아하지만 대책 없는 낭만이 싫었던 이라면 반드시 봐야 한다.

- 흑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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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두기봉
출연 양가휘, 임달화, 고천락
개봉 2011.01.27.
임영동 - 용호풍운
임영동 역시 담가명과 비슷하게 과소평가된 감독 중 한 명이다. 늘 ‘서극, 오우삼과 함께 홍콩영화계를 이끌었던 감독’이라는 말이 따라오며 임영동 자체만으로 논의된 적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그의 필모그래피가 오우삼, 서극과 비교하기엔 부족한 건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는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홍콩 누아르에 미친 영향을 따져보면 결코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용호풍운>(1987)은 누아르 장르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잠복 경찰 누아르'를 개척한 작품으로, 명작이라 불리는 <무간도> 시리즈나 <신세계>(2013) 모두 <용호풍운>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이 임영동의 <용호풍운>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훔쳐왔다”고 자백(?)할 정도. 실제로 <저수지의 개들>에서 <용호풍운>과 완전히 똑같은 장면도 볼 수 있다. 주윤발 주연으로 홍콩 유흥가의 뜨내기 건달로 위장한 잠복 경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용호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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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임영동
출연 주윤발, 이수현
개봉 1988.12.16.
서극 - 황비홍
아마 홍콩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우삼과 함께 가장 많이 들어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서극은 홍콩영화 뉴웨이브 선두에 서있던 인물이다. <영웅본색>, <동방불패> 등으로 80~9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홍콩의 유명한 영화 제작은 거의 서극이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가 직접 연출한 작품인 <황비홍-천하무인>(1991)도 흥행에 성공해 <황비홍>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황비홍>은 실존 인물인 황비홍의 일대기에 살을 붙여 만든 영화로 (중국 정세 변화와 작품 선택 실패가 맞물려) 그 당시 한물 간 배우였던 이연걸을 최고의 액션배우로 만든 작품이다. <황비홍>이 개봉한 이후, 황비홍이란 이름은 중국무술을 대표하는 고유명사가 되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아류작들을 만들어냈다. <황비홍>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 황비홍-천하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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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서극
출연 이연걸, 원표
개봉 1991.10.26. 2015.05.21. 재개봉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