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때로는 든든하게 느껴졌던 가족이란 울타리가 나를 옭아매고, 신뢰의 의미로 보여주었던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을 신뢰하는 딱 그만큼 우리는 가족에게 상처를 입는다.
가장 상처에 취약한 유년 시절, 누구나 가족에게 상처받은 기억이 있을 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상처를 덮어가며 성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매일같이 덧나는 상처는 결국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해도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가정을 새롭게 꾸리는 순간, 되풀이된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트라우마에 짓눌린 사람은 그저 자신이 겪었던 일만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가족을 소재로 한 ‘공포’ 영화다. 영화 속 가족은 보는 내내 불쾌하고,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때로는 긍정의 이면을 돌아보는 행위가 필요하기에, ‘애증의 관계, ‘가족’을 주제로 영화 5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만약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심하다면 시청에 주의해주시길. 트라우마 직면은 버거운 일이니까.
<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호아킨 피닉스
7월 5일에 국내 개봉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악몽 코미디’라는 다소 독특한 장르에 속해있다. 장편영화 데뷔작 <유전>(2018)으로 전 세계에 큰 인상을 남긴 아리 애스터 감독은 <미드소마>(2019)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고작 2편 만에 세계에서 주목받는 신예 감독에 등극한 그는 (보통 점프 스케어라 하는) ‘깜짝 놀래키는’ 전형적인 공포영화 스타일이 아닌, 인간의 심리를 조금씩 자극해 결국 숨이 막히게 하는 고전적인 오컬트 무비 스타일을 고수하는 편인데 특히 ‘가족이 주는 트라우마’를 굉장히 잘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과거에 가족과 어떤 사건이 생겨 트라우마가 있는데, 그 부분을 작품에 반영한다고.
만약 아리 애스터 감독의 전작을 모두 보고 그의 팬이 된 사람이라면 이번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악몽 코미디라는 다소 괴상한 장르로 분류되었지만 사실 분류가 의미 없는, 장르를 완전히 탈피한 작품에 가깝다. 따라서 공포영화를 기대하고 보러 갔다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하지만 이것이 영화의 퀄리티가 낮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가족의 지나친 애정’이라는 뒤틀리고 집착적인 감정을 탁월하게 시각화했다. 줄거리를 매우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에게 집착적인 사랑을 받아온 남자 보의 이야기로, 그에겐 문밖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겪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관객은 ‘보’에게 동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어렸을 적 “엄마 말 잘 들으면 다 돼”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결국 잘못 살아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라면 아마 보의 감정에 이입하지 않을까.

- 보 이즈 어프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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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호아킨 피닉스, 패티 루폰, 네이단 레인, 에이미 라이언, 카일리 로저스, 스티븐 헨더슨, 드니 메노셰, 파커 포시, 아르멘 나하페티안
개봉 2023.07.05.
<유전>(2018)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토니 콜렛, 알렉스 울프, 밀리 샤피로
한 콘텐츠에서 같은 감독의 영화를 2편 이상 소개하는 건 지양하고 있으나 ‘뒤틀린 가족’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 <유전>을 도저히 빼놓을 수 없어 결국엔 소개한다. <유전>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1960~70년대 유행했던 오컬트 무비와 비슷한 무드를 갖고 있으면서도 공포의 근원은 ‘가족 유대의 붕괴’에 두고 있다. 외부 환경에 의해 무너지는 가족이 아닌, 서로의 신경줄을 점점 팽팽하게 당기는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각적인 부분 역시 일반적인 공포영화와는 다른 모습이다.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삐걱거리는 바닥’, ‘비바람에 망가진 벽’, ‘음산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깜짝 놀래키는 장면도 적다. 감독은 이에 대해 “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는 것에 겁을 먹었다”고 밝혔다.
미디어에선 으레 ‘가족이라면 이렇다’라는 모습으로 이상적인 가족상을 대중에게 제시한다. <유전>은 이러한 ‘가족의 유대’에 대한 거짓된 믿음에서 탈피해 가족을 개인의 굴레로 만들고, 결국 그들이 주는 지긋지긋한 고통을 표현한다. 그는 “나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때때로 서로의 삶을 침범해 힘들게 만든다”라며 가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는데 ‘사랑하지만 지긋지긋한’ 가족의 관계를 <유전>보다 잘 표현한 영화는 보기 드물다. 영화는 가족 때문에 겪는 고통을 ‘불가항력적인 비극’으로 표현한다. 제목 <유전>에서도 드러나듯, 유전자는 불변한다. 할머니 엘렌은 자식을 희생해 파이몬교에 헌신하고, 엄마 애니는 이런 운명을 피하고 싶어 노력하지만 결국 몽유병으로 발현된다. 부모가 원치 않아도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어떤 유전자를 물려줄지는 양측 모두 선택할 수 없다. 이러한 불변적 연결성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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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가브리엘 번, 알렉스 울프, 앤 도드, 재커리 아서
개봉 2020.04.22.
<이레이저 헤드>(1977)
감독 데이비드 린치
출연 잭 낸스, 샬롯 스튜어트
<이레이저 헤드>는 컬트의 왕, 데이비드 린치의 첫 장편영화로,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기괴한 스토리와 연출로 인해 제대로 개봉조차 하지 못했으나 마니아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말 그대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레이저 헤드>의 서사는 단순하다. 헨리와 메리는 연인 사이로 메리는 헨리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아이의 모습은 파충류와 닮아 있었고 메리는 끊임없이 울어대는 아기를 돌보는데 지쳐 친정으로 돌아가버린다. 헨리는 아기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해 죽여버린다. 전체적으로 사건 간의 개연성도 희박하고, 불쾌함만 남는다. 게다가 영화 전반에 날카로운 아기 울음소리와 둔탁하게 울리는 공장 잡음이 깔려있어 관객은 점차 예민해진다.
<이레이저 헤드>는 난해하고 초현실적인 연출로 인해 명확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이 있는데 바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생긴 책임감에 대한 공포를 표현했다’는 것. 로튼 토마토 역시 <이레이저 헤드>를 두고 “디테일한 비주얼과 소름 끼치는 음악으로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한 남자의 두려움을 기괴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그려냈다”고 총평했다.

- 이레이저 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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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이빗 린치
출연 잭 낸스, 샬로트 스테워트, 알렌 조셉, 잔느 베이츠, 주디스 안나 로버츠, 로렐 니어, V. 핍스-윌슨
개봉 1996.07..
<악마의 씨>(1968)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미아 패로, 존 카사베츠, 루스 고든, 시드니 블래크머
<악마의 씨>가 처음 개봉했을 때 미국의 유명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히치콕마저 능가한다”는 찬사를 보냈다. <악마의 씨>를 시작으로 <엑소시스트>와 <오멘>이 연달아 개봉하며 오컬트 영화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오컬트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차별적인 살육과 고문보다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무서운 ‘냄새’를 풍기며 관객의 심리를 옥죈다.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한 <악마의 씨>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공포를 상징하는 영화로,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난 후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제는 <Rosemary’s Baby>(로즈메리의 아기)인데, 주인공 로즈메리(미아 패로)는 배우인 남편 가이(존 카사베츠)와 맨하탄의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이들은 친절한 이웃 노부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메리가 지하 공동세탁실에서 마주쳤던 한 여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로즈메리는 악몽을 꾸고 임신을 한다.
영화는 여성이 당하는 성적인 학대와 임신한 여성이 느끼는 신체적 호러를 표현한다. 영화는 여성이 느끼는 임신에 대한 불안과 예측할 수 없는 출산 이후의 삶에서 오는 공포를 오컬트적으로 풀어낸다. 살육에서 오는 잔혹함이 없이 끊어질 듯 팽팽한 신경증적인 분위기로 영화는 관객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는데, 이 스타일은 곧 고전 오컬트 영화의 문법이 되어 <유전>에서 반복되었다.

- 악마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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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미아 패로, 존 카사베츠, 루스 고든, 시드니 블래크머, 모리스 에반스
개봉 미개봉
<런>(2020)
감독 아니쉬 차칸티
출연 사라 폴슨, 키에라 앨런
<서치>로 대중에게 자신을 확실히 각인한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또 다른 스릴러 영화, <런>은 전작과 유사하게 가장 익숙한 공간, 관계로부터의 공포를 참신하게 그려낸다. 미숙아로 태어난 주인공 클로이(키에라 앨런)는 태어나자마자 세균에 노출되는 바람에 소아당뇨부터 천식, 하반신 마비까지 앓고 있다.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은 그런 클로이를 정성껏 키우고, 두 사람은 유별난 애정을 자랑하는 모녀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클로이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왔다. 하지만 엄마가 주던 약에 대해 의문을 갖는 순간, 견고해보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고, 장르는 마치 엄마의 얼굴처럼 표정을 바꿔 스릴러로 급변한다.
엄마가 치료제라 주었던 약은 동물용 근육 이완제였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클로이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엄마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화는 질주하기 시작한다.

-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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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니쉬 차간티
출연 사라 폴슨, 키에라 앨런, 팻 힐리, 오나리 아메스, 에릭 아타베일, 사라 손
개봉 2020.11.20.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