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덕>

흔히 배우는 나이를 먹을수록 연기가 깊어진다고들 말한다. 삶의 경험이 점점 쌓이면서 구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배우는 나이를 넘어서는 감정의 심도를 지니고 있다. 문승아는 그런 배우다. 한없이 어린 마음을 내비치면서 동시에 그 누구보다 성숙함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주어진 영화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다. 어른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다가도 그 안에서 서로의 유년을 마주하게 한다. 여느 중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보내는 그녀지만, 스크린 위에서만큼은 어떤 배우들보다 크게 느껴지는 그녀를 주목해 보자.

비밀의 언덕

감독 이지은

출연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 장재희

개봉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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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 (2020) dir. 홍의정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소리도 없이>는 흥행과 별개로 평단과 관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로건 럭키>(2017)를 연상시키듯, 눈앞에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들이 이상하리만큼 나른한 톤으로 전개된다.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범죄 조직으로부터 하청을 받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간다. 창복은 ‘달걀 트럭’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게 꿈이며, 태인은 양복과 고급 세단을 갖춘 조직원처럼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주로 거래하던 실장 용석(임강성)은 둘에게 잠시 며칠간 사람 하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시체 처리는 해도 자신은 단 한 번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창복과 태인은 한사코 거절하지만, 용석은 반강제적인 협박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람을 맡는다. 다만 그 사람이 그들이 생각했던 우악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인데.

<소리도 없이>는 배우 문승아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그녀는 창복과 태인에게 유괴된 11살의 아이 초희 역을 연기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두 주연 배우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문승아의 첫 등장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토끼 가면을 쓴 소녀가 제 몸집보다 큰 의자 뒤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장면은 초희가 풍기는 양가적인 아우라를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내 초희가 침묵을 깨고 내뱉는 대사들은 아이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녀는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며, 돈을 내면 자신을 풀어주는 것인지 창복에게 묻는다. 태인의 집에 머물게 된 뒤로는 태인의 꾀죄죄한 집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동생 문주(이가은)를 동정하는 듯 집안일을 돕기도 한다. 그녀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타협을 한 것일까?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나른한 리듬은 문승아의 연기가 개입되는 순간 양옆으로 고무줄을 잡아당긴 것처럼 팽팽함으로 변한다.

소리도 없이

감독 홍의정

출연 유아인, 유재명, 문승아, 이가은, 조하석, 승형배, 임강성, 유성주, 김자영, 서동수

개봉 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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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밤> (2019) dir. 이지형

<소리도 없이>의 캐스팅 당시 문승아가 연기한 초희는 무려 300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전부터 배우 문승아의 이름은 이미 영화계에서 오르내렸는데,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성인 배우들을 전부 제치고 배우상을 거머쥔 작품인 이지형 감독의 <흩어진 밤> 때문이었다. <흩어진 밤>은 어느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 승원(임호준)은 역사박물관에서 일하고, 어머니 윤희(김채원)는 학원 강사로 이 4인 가족은 보편적인 중산층 가족이다. 다만 이 집에 문제가 있다면 아버지는 거의 집에 오는 법이 없고, 부부 사이의 균열을 이미 두 남매가 직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광도 잘되지 않는 아파트에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찾아들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 자신이 살 새로운 집을 알아본다. 서로를 아끼는 두 남매는 필연적으로 갈라서야 하고, 모두가 함께 사는 경우의 수는 점차 줄어든다. 

<흩어진 밤>의 가장 큰 사건은 부부의 이혼이지만, 가장 중요하게 닥친 문제는 ‘누구와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온전한 가정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낙담이다. 따라서 <흩어진 밤>은 엄마와 아빠의 삶보다는 선택을 기다리며 불안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두 남매 진호(최준우)와 수민(문승아)에 집중한다. 차분한 연출 속에서 빛나는 것은 최준우, 문승아 배우의 연기다. 남매가 처음으로 부부의 이혼 소식을 듣는 장면은 되레 담담해서 가슴이 아프게 만든다. 끝내 입이 떨어지지 않아 에둘러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에 이미 예감이라도 했듯 진호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고, 수민은 네 가족이 다시 뭉치는 경우의 수를 배제한 채 오로지 누가 누구와 살 것인지의 문제에 골몰한다. 겉으로 성숙해 보이던 아이들도 흩어짐이 다가오는 밤에는 끝내 두려움에 몸을 떨고 만다. <흩어진 밤>에서 보여준 최준우 배우와 문승아 배우의 연기는 덤덤한 척 버텨오지만 끝내 터지고 마는 두려움의 멍울을 어떤 성인 연기자보다 잘 표현했다. 

흩어진 밤

감독 이지형, 김솔

출연 문승아, 최준우, 김채원, 임호준, 강석원

개봉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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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언덕> (2023) dir. 이지은

7월 12일 개봉한 이지은 감독의 첫 장편<비밀의 언덕>은 개봉 전부터 베를린 영화제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해외 영화제와 국내 영화제를 모두 거치면서 큰 호응을 얻은 <비밀의 언덕>은 오로지 배우 문승아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5학년 명은(문승아)은 억척스럽게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어머니(장선)와 아버지(강길우)가 부끄럽다. 선생님(임선우)의 총애를 가득 받는 반장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에도 어머니의 반응은 오히려 돈이 든다는 이유로 냉담하다. 부끄러운 가족을 숨기려 노력했던 명은은 선생님의 권유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된다. 부끄러움은 가리고 숨기는 게 전부라고 믿었던 명은에게 전학생 혜진(장재희)은 진솔하게 글을 쓰는 법을 보여준다. 명은의 글쓰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주하기 어려웠던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흩어진 밤>, <소리도 없이>에서 이미 엄청난 깊이의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 문승아의 진가가 <비밀의 언덕>에서 완벽하게 발현되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발칙하고 뜨거운 욕망 가진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힌 이지은 감독의 코멘트처럼 <비밀의 언덕> 속 명은은 영화의 모든 흐름을 주도한다. <흩어진 밤>에서 보인 덤덤하게 내비친 불안함과 <소리도 없이>에서 드러난 생존을 위한 다정함처럼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은 부끄러움과 진솔함이 공존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한 줌의 허구와 한 줌의 현실로 이뤄졌다는 말처럼, 명은의 유년은 가족, 학교, 자신을 향해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된 마음을 내비친다. 모두의 유년에 자리 잡은 부끄러움의 정서가 예술의 진정성을 마주할 때, 우리는 배우 문승아의 얼굴로부터 열병을 앓았던 그 시기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밀의 언덕

감독 이지은

출연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 장재희

개봉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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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밤>으로부터 <비밀의 언덕>까지 어린 나이에도 엄청난 필모그래피를 보여주고 있은 배우 문승아의 다음 작품은 하반기 개봉 예정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은 유태오, <퍼스트 카우>(2019)의 존 마가로, 그레타 리 등이 주연으로 합류했으며,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이다. 유년 시절 한국에서 알게 된 노라(그레타 리)와 해성(유태오)이 노라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며 헤어졌다가, 20여 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문승아는 그레타 리가 연기한 노라의 어린 시절을 연기할 예정이다. 앞선 세 작품에서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준 만큼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 10년 뒤, 20년 뒤의 문승아는 도대체 어떤 깊이의 연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벌써 그녀의 다음 행보들이 기다려진다. 

패스트 라이브즈

감독 셀린 송

출연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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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