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대에 따라 김서형의 얼굴을 다르게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김서형을 알았다면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아내의 유혹>으로 알았다면 표독스러운 악녀 신애리로, <SKY 캐슬>을 봤다면 고압적이고 소름 돋는 빌런 김주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김서형은 센 악역을 자주 맡았다. <악녀>의 권숙, <샐러리맨 초한지>의 모가비, <기황후>의 황태후까지 늘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결코 숙이는 법이 없었다. 대중이 아는 김서형은 악하거나, 강했다.
그러나 김서형은 악녀 신애리를 지나 빌런 김주영이 되었고, 그를 지나 자신을 학대하는 여자 문정이 되었다. 7월 26일 개봉작, 영화 <비닐하우스>에서 김서형은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여자 문정 역을 맡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텅 빈 얼굴을 연기했다. 소위 ‘쎈캐’만 맡는 배우라고 알고 있기엔 김서형의 얼굴은 매번 새롭다. 오늘은 김서형의 대표작을 톺아보며 김서형의 익숙하거나 새로운 얼굴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내의 유혹> - 신애리
<아내의 유혹> 신애리는 김서형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아내의 유혹>에서 주인공 구은재(장서희)에게 열등감을 느껴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독한 여성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선 범법도 불사하는 그야말로 뜨거운 악녀다. 신애리의 특징은 ‘죄책감이 없다’는 데에 있다. 운전 중인 아버지를 향해 인형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빗길에 교통사고가 났고, 결국 신애리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전부 즉사했다. 한순간 고아가 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의 친구, 구영수(김용건)가 신애리를 집에 들여 구은재와 함께 자매처럼 길렀지만 신애리는 자격지심으로 구은재의 가족을 지독하게 미워하며 성장한다. 가족의 사망 역시 자신의 탓임에도 ‘구은재에게 줄 인형을 던졌기 때문에 구은재 탓’이라며 계속해서 모든 문제를 외부에서 찾는다. 책임을 타자에게만 전가하며 회피하면서 신애리는 점차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욕망에 따라서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찢어질 듯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는 신애리의 표독스러움은 전 국민의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강한 캐릭터성으로 인해 김서형은 김서형이 아닌, 신애리로 각인되었고 이후 ‘악녀’라는 스테레오타입에 갇혀버렸다. 실제로 김서형은 신애리 이후 슬럼프를 겪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어떤 작품을 해도 (신애리를)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선한 역에 반기를 들면 단순히 악역이라고 하니까. (중략) 뭘 해도 악역이 따라다녀서 반감 아닌 반감이 생겼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 아내의 유혹
-
연출 오세강
출연 장서희, 변우민, 이재황, 김서형, 정애리, 금보라, 김용건, 윤미라, 오영실
방송 2008, SBS
<SKY 캐슬> - 김주영
김서형의 전성기는 <아내의 유혹>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개였다. 신애리가 워낙 강렬했기에 그 이미지를 벗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일은 들어왔지만, 신애리의 변형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모두가 그에게 ‘그 나이엔 할 역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서형은 ‘삼십 대에도 그 얘길 들었다’며 맞받아치고, <SKY 캐슬>의 김주영으로 악녀가 아닌, 고도화된 빌런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SKY 캐슬>에서 김주영은 일류 대입 코디네이터로, 흐트러짐 없는 올백 머리에 올 블랙 슈트, 낮고 단호한 말투와 행동으로 화면을 압도했다. 슈베르트의 '마왕'은 김주영 그 자체였다. 4명의 엄마를 발밑에 둔 마왕, 그게 김주영이었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말은 그의 시그니처로, 대중은 ‘홀리듯’ 그를 믿었다.
대중이 아는 김서형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김서형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한 해에 최소 한 작품은 꼭 작업했다. 시청률이 낮아도, 아무도 그의 ‘진짜’ 이름을 몰라도 그는 쉼 없이 일을 했다. <SKY 캐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여기저기서 이야기했으나, 김서형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쌓아왔기에 김주영을 할 수 있었던 것에 가깝다. <SKY 캐슬> 이후 김서형은 무수히 많은 인터뷰를 했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었다. 바로 ‘다양한 역할에 대한 갈증’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 잘할 수 있어’가 아니라 못할 수 있지만, 도전해 보고 잘하는지 나도 알고 싶고, 못하면 잘하려고 노력하는 나도 알고 싶은 거죠. 기사엔 “나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으니 기회를 주세요”라고 짧게 나가지만, 그 뒤엔 이런 마음이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 SKY 캐슬
-
연출 조현탁
출연 염정아, 이태란, 윤세아, 오나라, 정준호, 최원영, 조재윤, 김병철, 김서형, 정애리, 송민형, 김정난, 이현진, 이지원, 권화운, 이동민, 찬희
방송 2018, JTBC
<아무도 모른다> - 차영진
<SKY 캐슬>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김서형의 차기작은 모두의 관심사였다. 많은 제안 사이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작품은 미스터리 감성 추적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였다. 그는 <아무도 모른다>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수사물, 추적극의 전형적 특징에서 벗어난 감성적 드라마를 지닌 작품이라 끌렸다"라고 말하며, “특히 광수대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차영진이 인간적이면서도 감성을 지닌 캐릭터가 좋았다"라며 차영진 캐릭터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성흔’ 연쇄 살인사건으로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차영진이 19년 만에 다시 시작된 연쇄살인을 추적하며 악의 실체와 맞닥트리는 이야기로, 촘촘한 스토리와 탄탄한 결말로 마지막 화에서 시청률 11.4%를 기록하며 웰메이드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다.
김서형이 연기한 차영진은 ‘성흔’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로, 친구를 잃은 아픔을 지닌 사람이다. 차갑고 메말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기본적으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라 극 중에서 ‘좋은 어른’으로 나온다. 대체로 차갑지만, 가끔씩 새어 나오는 온기를 김서형은 대사가 아닌 아우라로 표현했고, 대중은 드디어 김서형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 아무도 모른다
-
연출 이정흠
출연 김서형, 류덕환, 신재휘, 조한철, 백수장, 서영주, 박훈, 안지호, 민진웅, 강예원, 문성근, 박철민, 장영남
방송 2020, SBS
<종이달> - 유이화
동명의 일본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종이달>에서 김서형은 주인공 유이화를 맡았다. 중년의 전업주부 유이화는 기본적으로 온정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능력 있고 부유한 남편은 그를 무시하고, 삶은 무료함에 지배된다. 그러던 중 그는 저축은행의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고 출중한 외모와 배우자의 재력으로 주변의 질투를 받게 된다. 그렇게 점차 자신감을 쌓아가던 중 VIP 고객인 사채업자 박병식(장항선)의 손자 윤민재(이시우)를 알게 되고, 그와 내연관계가 된다. 불륜을 시작으로 그는 VIP 고객의 돈을 빼돌리는 일탈을 저지르게 된다.
최고 시청률이 1.5%임에도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작품성이 좋은 것도 있지만, 이전에 김서형이 했던 말 때문이다. 그는 <SKY 캐슬>로 주목을 받았을 때 한 매거진 인터뷰에서 “퀴어 영화나 나이 차 나는 연하남과의 멜로로 중년의 매력을 풍겨보고 싶네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방향성을 허투루 말한 게 아님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2019년 <SKY 캐슬> 종방한 이후 3년 뒤, 2022년 <종이달>에서 그는 미모의 중년 여성 유이화가 되어 20대인 윤민재와 내연관계가 된다. 꿈을 잊지 않고, 시간이 걸려도 이루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멋진가. 그가 말한 “남편이 있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거”는 언제 이뤄질지 기대가 된다.
<비닐하우스> - 문정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비닐하우스>에서 김서형은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문정 역을 맡았다. 문정은 감옥에 있는 아들이 소년원 출감했을 때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자신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있지만, 그는 엄마와 아들을 돌보기 위해선 남의 부모를 돌봐야 했다. 그는 치매를 앓는 노인 화옥(신연숙)과 시력을 잃은 화옥의 남편 태강(양재성)을 간병하는데, 살뜰히 그들을 챙김에도 화옥은 문정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구타했다. 누군가를 돌보기만 해온 그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느닷없이 자신의 뺨과 머리를 후려갈긴다.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건 오직 그의 매서운 손뿐이라는 듯이.
이러한 ‘일상’은 화옥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급변한다. 문정은 당황하며 병원에 연락하려 했으나 그 순간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받고 그는 죽음을 은폐하기로 한다.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는 아들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그를 이끌었다. 문정의 일상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비참하다. 기댈 사람도, 집도 없는 공간에서의 일상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문정을 둘러싼 인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앞이 안 보이는 태강은 초기 치매 판정을 받고, 문정이 다니는 심리상담 치료 모임에서 만난 순남은 지적장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한다. 김서형은 문정의 텅 빈 얼굴과 선뜩이는 눈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김서형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이곳에 없다. 감독은 그에 대해 “김서형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는 평가가 저한테는 가장 큰 찬사입니다”라고 밝힐 정도로 <비닐하우스>에서 김서형은 새롭다. 신애리와 김주영을 지나쳐왔듯이, 그는 문정으로 도장을 찍고 다시 지나칠 거란 확신이 들었다.

- 비닐하우스
-
감독 이솔희
출연 김서형, 양재성, 안소요
개봉 2023.07.26.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