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영화 리스트 중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 바로, <잔고: 분노의 적자>(2022)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를 패러디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 C급 영화를 고집하는 감독, 백승기의 5번째 장편 영화다. 스스로를 C급 영화감독이라 칭하는 그는 저예산 패러디, C급 영화를 만들며 한국 영화판의 가장자리에서 자신만의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지는 않아도 결만 맞으면 충성하게 된다. 오늘은 백승기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며, 그의 C급 감성에 공감해 보고자 한다. 발굴하지 못한 당신의 숨은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숫호구
제목에서 느껴지는 진한 C급 감성의 <숫호구>는 백승기 감독의 데뷔작이다. 서른 살 원준(백승기)은 흔히 떠올리는 ‘평균’과 떨어져 있는 인물로, 번듯한 직장 생활도, 연애도, 결혼도 모두 하지 못했다. 모태솔로 인생 30년, 그런 원준 앞에 어느 날 정체불명의 박사가 나타나 섹시한(?) 아바타(손이용) 안에 원준을 넣어준다. 아바타를 갖게 된 원준은 기존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아바타 라이프를 만끽하던 어느 날, 그는 동네 헌 책방 아르바이트생 지나(박지나)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가 좋아하는 건 아바타라는 사실에 좌절한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숫호구>는 스토리는 물론, 연출 역시 C급 감성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전혀 섹시하지 않은 아바타를 섹시하다고 우긴다던가, 촬영 중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친구들을 배우로, 소지품을 소품으로, 고향 동네를 배경으로 삼아 만든 <숫호구>는 일반 상업영화에 비하면 조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조악한데, 어쩔 건데?”라는 뻔뻔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매력으로 <숫호구>는 제1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이 직접 선정하는 ‘후지필름 이터나상’을 수상하고,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 영화관에 정식으로 상영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 숫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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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백승기
출연 백승기, 손이용, 박지나, 조한철, 김선호, 성충경, 신예주, 백대현, 이순자, 손규진
개봉 2014.08.07.
시발, 놈: 인류의 시작
오해하지 마시길. <시발, 놈: 인류의 시작>에서 ‘시발’은 시작을 뜻하는 한자어 '始發'이다. 일반적이라면 ‘이하 <시발, 놈>’이라는 괄호가 붙었겠지만 해당 작품은 계속 풀네임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백승기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제목처럼 인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예상치 않게 <숫호구>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백승기 감독은 차기작으로 보다 심도 있는 주제, ‘인류의 기원’을 다뤘다. 초저예산 영화지만, 초단기간에 만든 영화는 아니다. 백승기 감독은 기획 및 제작에 2년, 편집에 2년을 써 총 4년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쳐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완성시켰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보고 알고, 다치면 아프다는 것을 다친 후에야 아는 ‘최초의 인류’를 보여준다. 최초의 인간은 무수한 실패 끝에 성장과 확장을 거듭한다. 그 과정은 인간의, 혹은 나의 실패는 결코 영원한 패배로 이어지지 않음을 증명한다. 한참을 킥킥거리며 웃다 보면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처음 인생을 살고 있는 ‘최초의 나’로서, 인생의 마지막까지 실패와 좌절, 시행착오를 거듭하겠지만 그 과정은 성장을 위한 과정임을 무심코 깨닫게 된다.

- 시발, 놈: 인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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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백승기
출연 손이용, 김보리, 백승기, 영건, 장우진, 김선호, 장동균, 이지규, 송정민, 손규진
개봉 2016.08.18.
오늘도 평화로운
아마 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보고 자연스럽게 자동완성되는 단어가 있을 테다. <오늘도 평화로운>은 백승기 감독이 실제로 중고거래 중 사기를 당한 경험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영화감독이 꿈인 주인공 영준(손이용)은 편집을 위해 노트북을 중고거래했고 사기를 당한다. 경찰에 요청해도 중국에 있는 사기단이라 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본인이 직접 사기꾼을 잡기 위해 중국(?) 사기꾼의 본거지에 침투한다.
전작에서 ‘인류의 시초’로 거대하게 세계관을 확장했던 백승기 감독은 세 번째 작품에서 다시 초심처럼 본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고 왔다. 이젠 백승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좋을 손이용 배우는 이번에도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숫호구>에서 미모의 아르바이트생 지나 역을 맡았던 박지나가 다시 영준의 호감 상대 지나로 출연한다. “항상 제 주변에서부터 시작해요”라는 감독의 말처럼, 그는 데뷔작부터 변치 않고 꾸준히 제 주변의 것들로 영화를 만들었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에서 잠시 ‘우리’와 멀어진 듯 보였으나 이 작품 역시 결국 ‘우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물론, 손이용 배우도 출연했다. <오늘도 평화로운>에서는 백승기 감독의 능글맞은 뻔뻔함이 한층 더 진해졌는데, 사기꾼 일당의 중국 본거지는 사실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그리고 영화는 딱히 그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백승기 감독의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그야말로 눈물 나는 우리네 일상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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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백승기
출연 손이용, 박지나, 조근직, 이지혜, 윤단비, 감승민, 이해인, 민지혁, 서현민
개봉 2019.04.04.
인천스텔라
백승기는 본인의 영화를 ‘없음의 미학’이라 칭했다. 그의 영화 3대 요소로 꼽은 ‘인천, 손이용, 가난’이 <인천스텔라>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전작에서 일상밀착 코미디 영화를 제작한 백승기 감독은 이번엔 우주로 다시 세계관을 넓혔다. 제작비도 무려 6,000만 원으로 초기작에 비해 굉장한 규모의 영화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천스텔라>는 제24회 부척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정식 개봉 전에 공개되었는데, 3편의 장편영화로 확실히 팬층을 쌓은 덕에 45초 만에 매진되었다고.
누가 봐도 <인터스텔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천스텔라>는 사실 2014년 <시발, 놈: 인류의 시작> 촬영 당시 기획한 작품이다. 우주로 나간 아들이 블랙홀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내용이었는데, 그해 <인터스텔라>가 개봉해버렸다. 백승기 감독은 자신이 기획한 영화와 너무나도 유사한(?) <인터스텔라>를 보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면돌파하기로 마음먹고 야심 차게 <인천스텔라>라는 제목을 달았다. 주인공 기동(손이용)은 아시아항공우주국, 줄여서 아사(ASA) 탐사대원이었지만 동료이자 아내인 선호(권수진)를 잃고 아사를 떠나 딸 규진(강소연)을 홀로 키운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동은 죽은 선호를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아사에서 제안한 인천스텔라 조종사 자리를 수락한다. 딸 규진은 우주에 간 기동을 그리워하다 결국 행동에 나서게 된다. 백승기 감독은 <인천스텔라>는 코미디가 아닌 진지한 정극이라 강조했는데, 실제로 “의외로 웃긴데 진지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 인천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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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백승기
출연 손이용, 강소연, 정광우, 권수진, 조근직, 서현민, 신예주, 변동욱, 박채은
개봉 2021.03.25.
잔고: 분노의 적자
<숫호구>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백승기는 여전히 영화판의 가장자리에서 C급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에 개봉한 <잔고: 분노의 적자>는 백승기 감독의 C급 영화에 대한 집념의 결과다. 노래와 복장, 분위기에서 ‘나 서부극이요’하고 있지만 인천 뒷산을 걸어 다니며 시내버스도 도로에 간간이 지나다닌다. 주인공 닥터 솔트(서현민)의 애마, 러시와 캐시는 개그 프로그램 소품으로 쓰기에도 조악해 보인다.
<잔고: 분노의 적자>(이하 <잔고>)는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 잔고(정광우)가 자린고비 현상금 사냥꾼 닥터 솔트(서현민)을 만나 각성하는 이야기다. 배우가 꿈인 동생 잔디(정수진)를 위해 모았던 전 재산을 연예 기획사에 내어준 잔고는 결국 적자가 되고, 빚을 진 채 노예로 전락한다. 그때 닥터 솔트가 그를 구해주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전작 <인천스텔라>에 비해 훨씬 가볍고 유머러스해졌다. 대사가 전부 영어인데 영미권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이해하지 못할 콩글리시가 가득하다. 이탈리아식 서부극을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부르듯, <잔고>를 ‘화평동 세숫대야냉면 웨스턴’이라 부르는 팬들도 있다. 참고로, 세숫대야냉면은 인천 명물이다. 별명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C급 감성을 즐기고 싶다면 한 번쯤은 보는 것도 좋다.. 다만, 이런 장르가 익숙지 않다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C급일 수 있으니 백승기 감독의 전작을 한 번 ‘찍먹’해보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 잔고: 분노의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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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백승기
출연 정광우, 서현민, 손이용, 손규진
개봉 2023.09.13.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