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주인공은 바로 주윤발이다. 신작 <원 모어 찬스>를 비롯해 <영웅본색>(1986)과 <와호장룡>(2000)이 상영된다. 개막식과 오픈토크 등 영화제 초반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주인공 주윤발의 <영웅본색>을 다시 곱씹어보려 한다. 일단 <영웅본색>은 리메이크 영화다. 골든하베스트에서 일련의 코미디영화들로 승승장구하던 오우삼은 드디어 자기 스타일의 액션영화를 꿈꾸게 되는데, 당시 신흥영화사 시네마시티(신예성영업유한공사)의 지원으로 ‘전영공작실’을 차린 후배 서극을 만나게 되고, 이내 용강 감독의 흑백영화 <영웅본색>(1967)을 영화화하고자 의기투합한다(원작의 영어 제목은 1986년작의 영어 제목인 ‘A Better Tomorrow’가 아니라 ‘Story of a Discharged Prisoner’다). 거의 10년 넘게 감옥에 있다 출소한 한 남자(<영웅본색>의 적룡)가 그를 다시 조직으로 끌어들이려는 보스, 그리고 경찰인 동생(<영웅본색>의 장국영)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원작과 비교하면 주윤발 캐릭터가 굉장히 커진 셈인데,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을 맡은 사현이 바로 최근 장백지로 인해 상처가 컸을 사정봉의 아버지이자, <소림축구>(2001)에서 선글라스를 낀 악마팀 감독을 연기한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악당 보스는 바로 <용쟁호투>(1973)에서 섬의 주인 ‘한’을 연기한 석견이었다.
<영웅본색>은 오우삼의 다른 누아르 영화들과 비교하면 사실 액션신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오프닝부터 유려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이후 영화들인 <첩혈쌍웅>(1989), <첩혈속집>(1992)과 비교할 때 첫 번째 총격신은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20분 정도 지나서야 등장한다. 그러니까 20여 분이 지나기까지는 당시 홍콩 관객에게 ‘코미디 감독’으로 각인돼 있던 오우삼의 ‘낡은 것과 새것’ 사이의 갈등을 보는 것 같다. 장국영의 여자친구 주보의가 배우로 출연한 서극 감독의 차 유리를 첼로 가방으로 박살내면서 슬랩스틱코미디를 하고, 사업차 대만(타이완)으로 갈 예정인 이자웅에게 주윤발이 조심하라는 의미로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차이완(홍콩 북동부 지역)이 아니라 타이완이야!”라며 말장난하는 대사들은 영락없이 이전 오우삼의 코미디 영화들을 보는 것 같다. 심지어 장국영이 경찰서에 데려온 범죄 용의자가 열리는 문에 부딪혀 쓰러지는 일종의 몸개그도 있다. 이후 오우삼이 주윤발, 장국영과 다시 만나 만든 <종횡사해>(1991)가 이런 코믹 요소들의 결정판이라 보면 된다.
주윤발이 피 묻은 안대를 하고 “버리기 아까운 야경이야” 운운할 때 등장하는 짧은 야경이, 흔히 홍콩 관광객들이 피크 트램을 타고 올라가서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보는 그 화려한 홍콩의 밤거리가 아니다. 주윤발이 얘기할 때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카이탁 공항이다. 지금의 첵랍콕 공항이 아니라 당시의 카이탁 공항은 김포공항처럼 거의 도심에 있어서 비행기가 빌딩들 사이를 오가듯 사람들과 가까이 이착륙을 했다. 홍콩 사람들의 애잔한 향수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곳은 바로 카이탁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룡성채가 내려다보이는 외딴 산이기도 하다. <성항기병>(1984)과 <아비정전>(1990)의 무대이기도 했던 구룡성채는 영국과 중국 두 나라의 통치를 전혀 받지 않는 무법지대이자 극도의 초고층, 고밀도 슬럼지역으로 <공각기동대>(1995)의 미래도시에 시각적 영감을 줬던 곳이자 주성치가 <쿵푸허슬>(2004)의 무대 돼지촌을 구상하면서 오마주를 바쳤던 공간이기도 하다. 홍콩의 오랜 유물이나 다름없는 구룡성채와,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카이탁 공항을 내려다보는 설정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영웅본색>은 그야말로 영화적 기법의 교과서다. 세월이 흘러도 거대한 휴대폰 장면 정도만 빼면(악당이 들고 있는 무기나 가방인 줄 알았는데 안테나를 뽑아서 전화를 받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특별히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데는, 그런 치밀한 구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왜 그리 커다란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아마도 전편에 걸쳐 있는 대조와 반복법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수사들이 무의식중에 반복 축적됐을 터인데 그걸 쭉 대조하며 정리해봤다.
(형의 정체를 모를 때) 이제 막 경관이 된 장국영이 경관이라면서 적룡을 뒤에서 덮치는 장면과 (형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장국영이 적룡을 정말로 미워하면서 뒤에서 덮쳐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 타이베이에서 적룡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보고 신문을 떨어트리는 주윤발(“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어”)과 나중에 거의 불구가 된 주윤발을 멀리서 바라보며 신문을 읽고 있는 적룡,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조직의 ‘초짜’ 이자웅에게 약 사먹으라며 지폐 몇 장을 건네는 주윤발과 나중에 거의 막일꾼이 돼서 주윤발이 이자웅 리무진의 차창을 닦아주자 밥이나 사먹으라며 땅에다 지폐를 몇 장 팍팍팍 떨어트려 주는 이자웅, 타이완으로 떠날 때 흰색 슈트를 입고 있는 적룡과 나중에 홍콩에 돌아와 새로운 보스가 돼 흰 슈트를 입고 있는 이자웅, 시아버지를 죽이러 온 킬러를 잡기 위해 방의 불을 끄는 주보의와 자신의 생일을 잊어먹은 것 같은 장국영에게 삐쳐서 방의 불을 끄는 주보의, 적룡이 출소해서 돌아온 뒤 다시 시작하자며 적룡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주윤발과 형에게 제발 잘하라며 장국영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주윤발, 적룡을 범죄자 취급하는 장국영을 보고 열받아 그의 총을 자기 머리에 겨누는 주윤발과 라스트 액션신에서 그와 똑같은 구도로 서 있다 진짜로 머리에 총에 맞아 죽는 주윤발(“형제란…”), 몰래 적진에 잠입한 장국영을 핸드헬드로 쫓아 총상을 입히는 성규안과 라스트 액션신에서 바로 그 장국영의 총에 맞는 성규안, 그 밖에도 감옥에서 줄서기를 하는 적룡과 심각한 얼굴로 경찰 수업을 받고 사격 연습을 하는 장국영의 모습도 교차편집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홍콩영화 사상 최고의 범죄형 얼굴 성규안은 1편에서 죽어놓고 2편에도 등장한다. 주윤발도 쌍둥이가 있었다는 식으로 2편에도 등장했는데 성규안 역시 쌍둥이였던 걸까? 기억해야 할 악당은 또 있다. 적룡을 배신한 뒤 <영웅본색> 최고의 명장면인 풍림각신에서 주윤발의 총에 맞아 죽었던(주윤발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그놈) 진지휘는 이후 <열혈남아>(1988)의 최고 명장면인 포장마차 액션신에서도 유덕화의 칼에 숨을 거둔다. 그렇게 진지휘를 통해 홍콩 누아르의 두 걸작도 반복법으로 혈연관계를 맺었다.
<영웅본색>을 대표하는 곡은 당연히 장국영의 ‘당년정’이지만, 그 외에도 기억해야 할 곡들이 있다. 먼저 한국가수 구창모의 ‘희나리’를 가수 나문이 번안해 부른 ‘기허풍우’(幾許風雨)로, 클럽에서 주윤발이 적룡과 이자웅을 앞에 두고 과거의 무용담을 들려줄 때 흘러나온다. 구창모의 노래가 사랑과 이별을 테마로 했다면 ‘몰아치는 비바람’이라는 뜻의 기허풍우는 주윤발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집약해 들려준다. 두 번째는 주윤발이 적룡의 복수를 위해 쳐들어가는 풍림각 액션신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곡 ‘면실지’(免失志)다. 대만 가수 진소운이 불렀으며 ‘의지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 주윤발의 당당함을 잘 드러낸다.
세 번째는 후반부에 주보의가 가르치는 아동합창단이 부르는 ‘명천회갱호’(明天會更好)다. <영웅본색>의 영어제목 ‘A Better Tomorrow’와 딱 맞아떨어지는 ‘오늘보다 밝은 내일’이라는 뜻으로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라고 노래한다. 홍콩의 본토 반환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홍콩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처럼 느껴지는 가장 중요한 곡이다. 더구나 홍콩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동합창단의 해맑은 목소리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오래전 에티오피아 기근을 극복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여러 유명 가수들이 불렀던 ‘We are the World’처럼 기아와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화어권 가수들이 모여 불렀던 곡이기도 하다.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