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 슬픔의 삼각형>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좌우 대칭이 맞는 포스터보단 이게 더 본질적이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2022)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한마디를 2시간 27분에 담아낸 결과라고 하겠다.

자본주의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가진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쏟아낸다

슬픔의 삼각형(sadness of triangle)은 성형업계에서 쓰이는 단어로서, 미간의 주름이라는 뜻이다. 타고난 이유로 이 주름이 짙은 사람이 있겠으나, 여하튼 간에 이것은 보톡스라고 하는 자본으로 덮어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영속적일지, 근본적인 해결법일지, 혹은 눈을 가린 아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팔자주름은 블랙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른다. 삼각형을 좋아하는 업계인가 봐.

영화는 3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

패션업계를 소개하며 두 남녀, 칼(해리스 디킨슨 분)과 야야(샬비 딘 분)를 비춘다. 야야는 돈 얘기는 섹시하지 않다고 하지만, 칼은 그 이야길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평등의 메시지가 공허하게 채워진 패션쇼 장에서 자본 논리에 의해 자리를 뺏긴다. 이후 그들은 말다툼을 하게 되는데, 불공정이 그 원인이며 배경에는 평등을 결코 허락지 않는 자본주의가 있다.


2부

요트가 보여지면서 불공평의 코드는 더욱 심화된다. 선상에서 햇살을 즐기는 고객들과 무릎을 꿇고 갑판 바닥을 닦는 직원들의 대조가 시작부터 제시된다. 자산을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거대한 부를 쌓은 부자들, 그리고 그들의 편의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계층을 이룬다. 그 직원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돈이다. 그들의 책임자인 폴라(비키 베를린)는 힘든 일을 수행하는 직원들에게 일이 마무리되면 돈을 받을 것이니 힘을 내자고 한다. 여기에 자극받은 크루들은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돈을 향한 찬양은 아래층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소음처럼 다가간다. 제목의 '삼각형' 만큼이나 명징한 직조인데, 이것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삼각형을 다른 모형으로 축조해도 압도적 차이는 피할 수 없다.

그렇게 감독이 설계한 세계(배)는 곧 토사물로 가득한 사회의 프리즘인데, 전복된다. 그리고 이후의 사람들은 감독이 설계한 일종의 신세계(섬)로 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위계관계나 계층이 새롭게 짜인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도 아닌가?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세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라면, 섬에서 펼쳐지게 되는 장면은 마치 연출자가 선사하는 대안적 방향처럼 보인다.

배는 돈과 무능의 사회라면, 섬은 능력과 모계의 사회다.


3부

그런데, 전복(비록 그것이 하위 계층의 혁명적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후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라고 해서 기존에 품고 있었던 부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배에서 화장실 청소 담당이었던 에비게일(돌리 드 레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급자족의 능력과 불 관리, 요리 스킬 등으로 단숨에 리더로 떠오른다.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입하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된다. 그녀는 기존 기득권이 보여줬던 기분 나쁜 모습을 지우고 이상적 집단을 만들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칼의 육신을 탐낸다.

에비게일은 배에 있을 땐 가장 낮은 곳에서 임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별로다. 아무리 일해도 부는 거머쥘 수 없고, 부자라 불리는 자들은 밉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 사회에서의 돈 중심, 부계 중심의 문화, 불공평등의 문제가 완전히 타도되어도 인간이라는 동물이 저지르는 짓은 똑같은 것이다.


연출자의 목소리

147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을 가진 이야기에서 섬으로 가는 장면은 60%가량 진행됐을 때 등장한다. 관객들 대부분이 중산층이거나 그 이하임을 감안하자면 이야기의 2/3쯤 되는 이 지점에서 에비게일이 지도자로 등극하고, 거부였던 드미트리(즐라트코 부리치)가 분위기를 읽고 고분고분히 따르는 모습에 쾌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는 호락호락히 계층의 문제점을 파고들며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무기 상인 주제에 세계의 평화를 책임지고 있다는 궤변 후에 자신들의 무기에 의해 폭사한 부부처럼, 영화는 해답 제시 같은 태도를 취하는 듯하다가 자폭의 길로 들어선다.

전복 후 권력을 손에 쥔 실권자(에비게일)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가면서 주도권을 처음으로 쥐어본 탓일까. 그러면서 관객들은 얼마 되지 않은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 바로 1부에서 칼과 야야가 패션계에서 역전됐던 정황에서의 위계 문제인 것이다. 야야는 업계 내에서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내세워 칼을 부려먹는다. 그리고 에비게일은 생존에 관련된 요소들을 쥐고 있는 데다 야야의 방임 아래에서 칼을 차지한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이 풍기는 씁쓸한 수미쌍관인 것이다.

여기에서 완력이 더 강한 남자들이 왜 덤벼들지 않았는지는 좀 의아하다

계층의 역전으로 자그마한 통쾌함과 시원함을 맛봤던 관객이 있다면, 이 장면에서 허구한 날 싸우기만 하는 정치판이 연상될지도 모르겠다. 누가 이기든 그 나물에 그 밥이고, 승리자가 관심 있는 건 잿밥이구나 하는 허탈함을 기반으로 하는 웃음이 올라온다. 이것은 번복 후에 더 좋은 세상이 빠르게 찾아온다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예언 같은 것일까? 희망은 없으니 정신 차리라는 감독의 묵시록이려나.


기묘한 정반합

야야와 에비게일은 산 뒤쪽을 탐험하다가 자신들이 무인도라 믿었던 이곳은 사실은 럭셔리 리조트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에 야야는 에비게일에게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가면 자신의 매니저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태도를 전환한다. 그러나 에비게일은 야야에게 살의를 뿜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에비게일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의 폐해 등,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원류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탐심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곧 이것은 사회구조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무릇 인간이란 세상을 사악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블랙 코미디라는 메인 장르가 제시하는 방향과는 좀 다르게 니힐리즘적인 세계관(허무주의)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방안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이것이 해결책...인 줄 알았지? 대안 따윈 없어!'라고 외치며 정갈히 난장판으로 만드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다.

자폭의 태도를 직구로 던지고도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니, 좀 의아한 건 사실이다.

만화 <데스노트>에서 사신 류크는 역시 인간이 가장 재미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생전에 무슨 짓을 하든 죽은 녀석이 가는 곳은 동일하며 천국, 지옥 따윈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음의 평등을 알린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순간은 부자든 뭐든 간에 정직한 토사곽란을 뿜어대던 지점이었다. 어쩌면 자본주의에서 평등을 찾는 것은 너무나 간단해서 되려 허무한 일 일지 모르겠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