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복수극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전종서 주연의 영화 <발레리나>가 10월 6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지 버튼 누를 새도 없이 액션이 몰아친다. 아마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한국영화 중에서 폭력 수위가 가장 센 영화가 아닐까 싶다. 전종서의 얼굴에 ‘친절한 금자씨’와 ‘존 윅’이 겹쳐 보인다. <발레리나>의 파격적인 도전이 왜 칭찬받아 마땅한 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여성 복수극의
계보를 잇는다
복수에도 스타일이 필요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최근의 한국 장르 영화 가운데 여성 복수극은 종종 스타일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속 주인공 금자가 “예뻐야 돼. 무조건 예쁜 게 좋아”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권총의 디자인을 꼼꼼하게 따져 물을 때부터 예견된 흐름이었을까.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나서는 복수극은 액션 영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의상이나 분장, 미술 등 화면을 꽉 채우는 스타일을 중요한 요소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복수극은 장르적 특성상 액션을 강조하게 마련인데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성 복수극을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했다. 물론 최근에는 김옥빈 주연의 <악녀>나 이시영 주연의 <언니>, 한소희 주연의 <마이 네임> 같은 시도가 있었다. 제각각 추구하는 장르적 결도 달랐다. 모두 배우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작품들이다. 액션 연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촬영 기법이나 프로덕션 디자인상의 특징을 강조하기도 했다. <악녀>의 묘기에 가까운 핸드 헬드, 롱테이크 촬영이 대표적인 사례다.
영화는 아니지만 공감을 넘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인기까지 모두 사로잡은 송혜교의 <더 글로리>같은 복수극 시도도 있었던 만큼, 여성 복수극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스타일리시한 여성 복수극을 한 편 볼 때가 됐단 말이다. 전종서 주연의 <발레리나>는 여성 복수극의 계보 안에서 시각적 스타일과 물리적 액션 모두를 성공시킨 사례로 기억될만하다.
클리셰를 정면 돌파
배우 전종서가 연기하는 주인공 옥주는 경호원 출신으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중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국적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무국적인 편의점 공간에 껄렁대는 양아치들이 들어와 금고를 털려고 시도하는데 하필 그곳에 옥주가 있었다. 양아치들이 옥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을 시작으로 <발레리나>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전종서의 버라이어티한 액션을 쉴 새 없이 보여준다.
옥주가 무자비한 복수극의 주인공 혹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성들의 성폭력이 주된 원인이다. 우연한 계기로 재회하게 된 중학교 동창 민희(박유림)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옥주의 소소하고 행복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옥주는 편지 한 장 남겨두고 눈앞에서 자살한 민희의 억울함을 달려주기 위해 복수를 다짐한다.
최근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리던 그루밍 범죄, 마약 범죄 등 온갖 현실 기반의 범죄를 종합 세트처럼 구사하는 최프로(김지훈)는 옥주가 총구를 겨눠야 하는 빌런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다. 옥주의 복수극이 고된 여정이 될 거라는 예상을 하게 되는 이유는 김지훈 배우가 연기하는 최프로의 존재감이 무지막지하기 때문이다. 최프로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묘사하는 암흑가 보스들의 외형을 사실상 복제하듯 꾸며 놓았지만 매서운 눈빛만은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다. 이충현 감독은 옥주와 김프로 사이의 대결 구도를 밋밋하게 일대일로 설정하지 않는다. 김무열 배우가 연기하는 보스 캐릭터가 둘 사이를 더욱 긴박하고 긴밀한 사이로 연결해준다. 옥주는 최프로에 도달하기 전에 또 다른 보스를 거쳐야 한다.
캐릭터 관계의 변주 혹은 레이어는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이충현 감독은 단편 <몸값>으로 주목받은 후에 첫 장편 <콜>을 연출하면서 여성 캐릭터들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이야기의 핵심 요소로 담았다. 이번 영화 <발레리나> 역시 마찬가지다. 복수극의 희생양은 사실 여성들이지만 끝장을 보는 키를 쥐고 있는 것도 여성들이다. 옥주는 민희의 죽음으로 인해서 분노하지만 그의 복수극에 기름을 붓는 부스터 역할로 신세휘 배우가 연기하는 어떤 캐릭터가 또 등장한다. 누군가는 <발레리나>를 좋게 말하면 오마주, 안 좋게 말하면 클리셰 자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과장되고 키치한 장르적 변주의 쾌감을 선사한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 명배우 김영옥, 주현 콤비를 활용하는 방식도 기가 막히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속 한 장면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어여쁜 난장판 복수극
<발레리나>에서 전종서 배우가 보여주는 액션 연기는 이전의 어떤 한국영화 속 배우의 활약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파워풀한 매력을 선사한다. 이충현 감독과 <콜>을 함께 작업한 조영직 촬영감독, 윤석진 무술감독의 협업 결과다. 옥주는 권총을 주요 무기로 활용하고 있지만 액션의 타격감을 가미하기 위해 몇몇 장면에서 권총 자체를 칼처럼 쓰기도 한다. <존 윅> 시리즈의 직접적인 영향이 느껴지는 대목. 사실 <존 윅> 뿐만 아니라 최근의 많은 할리우드 복수극, 이를테면 <이퀄라이저>나 <드라이브> 같은 영화들의 흔적도 곳곳에서 보인다.
영화 전체의 배경이 무국적인 공간으로 디자인된 것도 특징이다. 거의 모든 공간이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디스토피아 풍의 SF 영화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가득 찬 아파트 실내 공간, 난데없는 형광빛 수조 같은 오브제, 화려한 벽지로 둘러싸인 모텔 복도와 20세기 초의 모던한 실내 양식 등 왕가위 감독 영화 속 특징이 혼재되어 있고, 그로테스크한 마구간과 마약 농장 공간 등도 <발레리나>의 휘황찬란한 액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 요소로 등장한다.
이충현 유니버스는 계속된다
이충현 감독은 단편 <몸값>부터 시작해서 여성들이 겪는 공포의 순간을 소재로 장르적 상상력을 더해 나가는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한국의 ‘모텔’이란 공간을 끔찍하게 묘사하는 방식 역시 <몸값>의 공포스러운 세계와 <발레리나>의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연대하고 기어이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몸값>에서 여성의 몸에 값을 매기고 흥정하려 드는 남자를 연기한 박형수 배우가 <발레리나>에서도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하는 점도 이충현 감독의 작품 세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요소로 느껴진다. 여성들이 직접 나서서 깨고 부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그 여정의 다음 도착지는 어디일까 궁금하다. 또 어떤 장르적 변주를 보여줄지 역시 기대된다. 참고로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이 만들고 있다고 알려진 <존 윅> 시리즈 외전 <발레리나>와 이충현 감독의 이 영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사한 설정이 겹칠 뿐이다.
김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