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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복수는 달다, 아니 쓰다, 아니 드물게 예쁘다 〈발레리나〉

씨네플레이

이충현 감독의 <발레리나>에 대해선 아무 사전 정보가 없었다. 감독 이름도 생소했다. 우연히 포스터를 봤을 뿐인데, 호기심이 당겼다. 전종서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전종서는 묘한 매력이 있는 배우라 여겼다. 배역에서 풍기는 이미지 너머 어딘가를 남다르게 지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막연한 인상일 뿐이지만, 영화 속에서 보다 스크린 바깥으로 잔상이 길게 묻어나오는 신인 배우를 알게 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왜 한국 영화의 대사는 잘 안 들릴까

<발레리나>의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다가 영화 내용을 대충 훑었다. 흔해 빠진 복수극이라는 선입견을 빼도 박도 못했다. 그래도 조만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국 보게 되었다. 김지운과 박찬욱을 교본 삼은 듯싶으면서도, 약간은 뜬금없게도 팀 버튼 스타일의 영상미를 좇고 있다는 단상이 남았다. <발레리나>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짚어 둘 게 하나 있다.

본 연재에서 한국 영화를 다룬 적은 한 번도 없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글쓴이의 고의가 다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한국 영화(드라마도 포함)를 잘 안 보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까닭이 제일 크다(나이 먹고 가는 귀가 먹은 탓이라 해도 부인은 않겠다). 발음과 말투, 그리고 호흡 등은 배우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전체적인 음향 조율일 것이다. 속삭이는 대사든, 소리치는 대사든 정확히 짚어줘야 할 대사들은 관객의 귀에 또렷이 들리게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국 영화의 대사들이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이비인후과에 가야 하는 건지, 한국 영화의 전체적인 사운드 운용방식을 따져 물어야 하는지 아직 판단이 안 선다.

 

<발레리나>는 영상미 차원에서 보자면 예쁘게 잘 만든 영화라 할 수 있다. 서사 줄기의 빈 구멍과 익숙한 전개,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소품들과 캐릭터 등, 단점으로 짚을 만한 요소들을 절반 이상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색감과 다채로운 앵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복수극이라 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김지운이나 박찬욱 영화에나 나올 법한 괴상한 악당 캐릭터들이 복수극의 전형성을 답습하고 있지만, 연기의 디테일이 섬세하게 살아있다. 빤해 보이는 이야기를 90여 분의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요란한 듯 정확하고 단순한 액션

액션 영화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건 배우들의 몸놀림일 것이다. 진하고 다채로운 색감만큼 액션 연출 또한 밀도 높고 화려하다. 언뜻 요란해 보이지만, 모든 동작이 정확하고 단순하게 느껴진 건 쓸데없는 과잉 동작으로 초점을 흐리지 않은 까닭일 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지점인데, 주인공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지나치게 길고 잔 동작이 많은 액션 연출은 되레 피로감을 줄 때가 많다. 옥주(전종서)의 가공할 만한 활극이 허황돼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대1이든 1대100이든 옥주는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있는 인물임에 분명해 보인다.

앞서 ‘예쁘다’란 표현을 썼거니와, 함의가 여러 개 있다. 영상이 예쁘고 색감과 앵글이 볼 만하다는 건 일차원적인 단평이다. 1990년생 감독이 그보다 30년 연상인 감독들의 특징을 요소요소 잡아내 오마주하듯 말끔하게 연출한 게 가상하다고 말한다면 감독에게 실례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전에 봤던 유사한 스타일의 영화들이 자꾸 오버랩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패러디에 가까울 정도로 상기한 두 감독의 작품 속 장면들이 떠오르는 설정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게 가소롭거나 어설퍼 보였다면 아마 중간에 관람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모든 예술은 앞 세대의 기술과 성과를 답습해 버전업하거나 새로운 양식으로 극복하여 자기화하는 게 당연지사다. 그런 요소를 가감 없이, 그리고 발랄 혹은 발칙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감히 ‘예쁘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극한의 감정, 극한의 움직임

앞 문단의 전제를 두고 또 다른 ‘예쁜 점’은 소도구나 디테일에 있다. 민트초코는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지 맥락을 생각게 하는 매개다. 소위 ‘민초파’ 어쩌구 하면서 사람의 성향을 구분하는 심리 테스트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민트초코는 상충되는 맛과 색의 조합이다. 그래서 약간은 괴이하고 낯설고, 누군가에겐 역겨울 수도 있는 음식이다. 통상 개념을 깨뜨리는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이기도 하다. 거기에 칼부림과 총질. 피범벅이 난무한다. 달콤하고 싱글싱글하는 것과 잔혹한 피의 결합이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을 독특하게 뒤섞는다고나 할까.

최민희(박유림)와 옥주의 대화, 그리고 여고생(신세휘)의 대화 장면은 그저 평범한 소녀들의 말투와 표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색감으로 치면 민트에 가깝다. 그러다가 조사장(김무열)과 최프로(김지훈) 패거리와 맞짱 뜰 땐 검붉고 진득한 피비린내가 난무한다. 이 기묘한 대조가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기존 복수극의 색감과 차별화한다. 가부장제의 조포성(粗暴性)에 희생당한 여성들의 복수 활극이라는 점은 당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공분(公憤)을 화끈하게 발산한다. 그걸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요즘 여성들에겐 언짢게 들릴 어사일 수도 있다. 그래도, 더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할 바에야 예쁜 건 예쁜 거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예쁜 건 바다다.

민희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 발레를 배우겠다고 말한다. 민희도 말하듯 인류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거창한 인류사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몸을 격렬하게 쓰는 건 사람이 가진 몸의 한계를 몸의 특징을 통해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의지를 표상한다. 모든 무술은 동물의 동작에서 영감을 받은 특수한 기술이다. 발레도, 노래도 그렇다. 새의 동작과 울음소리를 흉내 내면서 춤과 음악이 발전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걸 완성하기 위해선 스스로의 몸을 초극하려는 노력과 극한의 훈련이 필수적이다. 영화에서 옥주는 굉장히 유능한 경호원으로 묘사된다. 발레리나도 경호원도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특별해 보이기만 하는 인물들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감정의 극한에서 결국 피를 보고 만다.

 

“기억 안 나? 나 발레리나야.”

물고기가 되지 못한 민희는 사람만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유린당하여 목숨을 잃는다. 사람이 사람을 잃게 되는 건 또 다른 사람에 의해서다. 그래서 복수는 언제나 타당한 명분을 갖지만, 완전한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복수를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당한 그 사람 자체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에 옥주와 여고생은 총상을 입은 최프로를 바닷가로 끌고 간다. 민희가 자신만의 비밀 장소라 일컬었던 곳이다. 옥주는 늙은 총포사들에게서 구입한 화염방사기로 최프로를 위협한다. 최프로가 발악하듯 외친다. “넌 도대체 누구야?”라고, 옥주가 대답한다. “기억 안 나? 나 발레리나야.” 옥주는 이미 민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는다. 바닷가에 시뻘건 불덩이가 피어오른다. 물과 불, 파랑과 빨강이 그렇게 교접된다. 그리고 전환. 따뜻한 엔딩.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가장 완벽한 복수는 소리 소문 없이 상대방을 말살시키는 것이지만, 신이 아닌 한 불가능에 가깝다. 복수는 결국 복수하는 자에게도, 당하는 자에게도 끈질긴 감옥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영화도 복수라는 테마에 갇힌 기본 패턴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복수 자체가 감정의 어둡지만 확고한 프레임이고, 그걸 다루는 영화도 기존의 영화들이 만들어 놓은 두터운 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2003년의 <올드보이>나 2005년의 <달콤한 인생>이나 복수는 늘 참혹하고 처절하며 애잔하다. 붉은 피가 결국 검어져 점액질의 고깃덩이만 남는다. <발레리나>는 그것들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가. 영화를 보면서 자꾸 그 생각만 한 것 같다.

 

누구에겐 별미, 누구에겐 이상한 영화

복수가 복수에 갇히고, 영화가 영화에 갇혔다는 이 느낌이 어째 서늘하다. 영화니까 가능한 아름다운 복수, 혹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기에 더 끔찍한 복수.
복수가 복수에 갇히고, 영화가 영화에 갇혔다는 이 느낌이 어째 서늘하다. 영화니까 가능한 아름다운 복수, 혹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기에 더 끔찍한 복수.

조폭 똘마니의 머리통을 관통한 총알이 창문을 뚫고 나간다. 거미줄 형태의 금이 옥주의 머리를 휘감는다. 창밖에서 본 풍경이다. 줌인하자 테두리가 검은 프레임 같은 게 직사각형으로 옥주를 가둔다. 복수가 복수에 갇히고, 영화가 영화에 갇혔다는 이 느낌이 어째 서늘하다. 영화니까 가능한 아름다운 복수, 혹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기에 더 끔찍한 복수. 민트초코는 싱그러운 바다 빛이다. 누구에겐 별미이고, 누구에겐 이상한 음식이다. <발레리나>는 왠지 그런 영화인 것 같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