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영화에 대한 얘기보다 소설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원작 보다 뛰어난 경우가 드물다는 통례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은 영화보다 이면이 더 넓고 깊다. 언어로 쓰여진 걸 독자가 상상하며 읽게 될 수밖에 없으므로 당연한 일일 거다. 반면에 영화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의 표면을 영상으로 긁어낸다. 그래서 표면이 분명해지지만, 그래서 상상의 폭이 더 제한된다.


영화는 왜 소설보다 얕거나 짧거나 허술한가

표면들의 연쇄작용이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걸 소위 ‘영상의 깊이’라고 치자. 하지만 서사 줄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영화는 깊이(내적 필연성이라고나 하자)마저 표면에 떠 휘발되기 마련이다. 요컨대 인물이나 사건의 필연성을 외적으로, 그리고 설명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럴 때, 인물의 내면을 적실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게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원작 소설을 미리 접했을 경우, 그 오차와 낙차는 더 커진다. 인물의 정체성은 영화적 전형성을 걷어내기 힘들어지고, 사건은 상투적으로 나열되어 거의 억지로 결말에 꿰맞춰지기 일쑤다. 내겐 피터 웨버 감독의 <한니발 라이징>(2007)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조나단 드미가 감독한 <양들의 침묵>(1988) 이후, 한니발 렉터라는 가공할 캐릭터는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연이어 영화 시리즈가 제작되었으며 최근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공포와 매혹 혹은 공포의 매혹이라는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물론, 영화 시리즈에서 렉터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우람한 카리스마와 드라마에서 열연한 매즈 미켈슨의 매력이 큰 몫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천재적인 두뇌와 고아한 예술 취향, 모든 감각이 평균적 인간의 밀도 이상으로 발달되어 살인과 식인마저 서슴지 않는 존재를 그토록 우아(?)하고 개연성 있게 그려낸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의 필력을 우선 치하(?)해야 할 것이다.

<한니발 라이징>은 2006년 발표한 원작과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다. 토머스 해리스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 이전 한니발 시리즈의 전사(前史), 즉 프리퀄이라 할만한데, 한니발 렉터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어떻게 그러한 괴물이 탄생했는지 밝히는 내용이다. 시작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재 소년이 스스로 감춰버린 암흑

한니발 렉터는 14~15세기 잘기리스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로 리투아니아에 거대한 렉터 성을 쌓아 올린 ‘잔인한 한니발’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침착하고 명민한 소년 한니발은 귀족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한니발에겐 미샤라는 여동생이 있다. 한니발은 미샤를 지극히 사랑한다. 부모님은 온화하고 아이들을 무척 아낀다. 소년 한니발은 가정교사가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두뇌를 지녔는데, 그림과 물리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일찍이 발휘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2차대전의 화마에 휩쓸린다.

리투아니아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번갈아 점령하며 카오스 상태에 빠진다. 렉터 성의 가족들은 성을 버리고 깊은 산 속 사냥용 산장으로 피신한다. 그 와중에 독일군에 의해 하인이 여럿 살해당한다. 산장으로 피신한 렉터 가족도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 와중에 모두 사망한다. 불타 죽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한니발에게 깊은 상처로 각인된다. 그런데 정작 렉터 집안을 끝장으로 몰살시키는 건 독일군이 아니다. 전황에 따라 독일군에 붙었다가 소련군에 붙었다가 하는 그루타스(리스 이판) 일당이다. 거의 산적 수준으로 전락한 그들은 한니발과 미샤만 남아있는 산장을 급습한다. 진짜 악몽은 이때부터다.

그루타스 일당은 오래 굶주린 상태다. 먹을 수 있는 건 무조건 물어뜯는다. 죽은 새마저 깃털째 입안에 욱여넣을 정도다. 마침 한겨울이다. 결국 먹을 만한 게 없어진다. 일당은 두 어린아이에게 눈을 돌린다. 아이들도 오래 굶은 건 마찬가지. 그루타스의 잔혹성은 극에 달했다. 다른 일당들도 광기에 휩싸인 상태. 미샤가 그들의 먹이가 된다. 한니발이 미샤를 구하려 발버둥치지만,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이후 한니발도, 이야기도 코마상태에 빠진다. 죽음보다 끔찍한 악몽이었지만, 그 내용이 심연 속에 갇혔다. 그 심연에서 비로소 괴물의 씨앗이 발아한다.


괴물은 침묵과 어둠을 먹고 자란다

한니발은 극적으로 살아나 전쟁이 끝나자 고아원에 수용된다. 악몽 이후 실어증에 빠진 상태. 하지만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땐 “미샤!”를 외친다. 고아원은 렉터 성을 개조한 건물이다. 한니발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에 고아가 되어 갇힌 것이다. 고아원에서 한니발은 문제적 인물이다. 저항과 구타와 또다시 저항. 그러다가 한니발은 탈출한다. 삼촌 로버트 렉터가 살고 있는 프랑스로 향한다. (이 지점에서 원작과 차이가 있다. 영화에선 이미 사망한 것으로 설정돼 있으나 소설에서 로버트 렉터는 생존하는 유명 화가다. 로버트 렉터는 고아원장에게 뇌물을 먹여 한니발을 프랑스로 데리고 온다. 그러다가 모종의 사건 이후 급사한다)

로버트 렉터의 아내는 레이디 무라사키(공리)라 불리는 일본인이다. 한니발은 레이디 무라사키의 보호 아래 자라며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꼬마에서 청소년이 된 한니발(가스파르 울리엘)에게 레이디 무라사키는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미샤를 대체하는 유일한 애정 상대이다. 레이디 무라사키는 히로시마 출신으로 『겐지 이야기』의 저자인 무라사키 시키부의 10대손이다. 한니발은 그녀에게서 일본식 교양과 사무라이 정신을 학습한다. 그러면서 미샤가 죽을 당시,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졌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쓴다.

모든 게 암흑 속에 갇혀 잔상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한니발은 의학과 그림, 그리고 무술을 단련한다. 기억의 난간 너머에 있는 그루타스 일당의 얼굴을 떠올려 복수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통과해온 지옥으로 스스로 귀환하는 것인데, 그 매개는 그림이다. 한니발은 수년 동안 기억의 더께에 갇혀있는 그들의 얼굴을 종이에 스케치한다. 그리고 추적한다. 또 그리고 그게 천재 소년이 괴물로 변태(變態)하는 동인이 된다. 소설에선 한니발이 기억의 대동맥을 거슬러 가는 장면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예쁘게 썩소만 날리는 괴물이라니!

영화는 이후, 뻔한 슈퍼히어로 액션물 같은 설정들로 지리멸렬해진다. 뜬금없고 어설픈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받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언급은 어이없을 정도다. 소설을 먼저 읽고 봐서 더 그럴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레이디 무라사키는 어색하지 않다. 내용과 불화하는 인물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기 정화와 수련이라는 의미에서 외려 적절한 설정이라 할 수도 있다. 한니발은 기억의 폐쇄회로에 갇힌 인물이다. 천재적인 두뇌와 재능이 스스로 체증에 걸린 영혼에 의해 괴물의 필살기로 둔갑해 버리는 것인데, 영화에선 그 내밀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돼 있다. 그 ‘생략’으로 인해 괴물의 진정한 모습이 지워져 버린다. 그저 미소년 가스파르 울리엘의 작위적인 악의만 예쁘게(?) 그려질 뿐이다.

어떤 인물이 설득력 있게 창조되려면 실제적 개연성 이상의 심리적 통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흔히 알고 있는 한니발 렉터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그러면서 나이를 초월하고 인간을 초월하고 세상의 모든 윤리와 법률마저 초월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원형을 뒤늦게 설계한다는 건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전사(前史)도 후사(後史)도 넘어서 그 자체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된 일종의 영원한 표상이다. 대중들에게 그는 차곡차곡 설계되어 가공된 순차적 인물이 아니다. 그야말로 난데없이 뚝 떨어진 기상천외한 악마일 뿐이다. 그러면서 여러 인간적 허점도 때로 노출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잡아먹는 자, 그가 괴물이다

한니발은 기억의 폐쇄회로에 갇힌 인물이다. 천재적인 두뇌와 재능이 스스로 체증에 걸린 영혼에 의해 괴물의 필살기로 둔갑해 버리는 것인데, 영화에선 그 내밀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돼 있다.

그런데 그 허점은 그가 인간을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에 허점으로 보이는 것이지, 보통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빈틈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허점엔 눈 감는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허점을 잘 파고들어야 악마의 실체가 더 확연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한니발이 괴물이 된 연유엔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공히 드러나는 하나의 분명한 힌트가 있다. 한니발은 그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려 그루타스 일당을 죽이고 스스로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힌트가 궁금하다면 당연히 소설이든 영화든 살펴봐야 한다. 한니발은 실제로 레이디 무라사키를 여성으로 사랑했다. 한니발을 사랑하면서도 레이디 무라사키는 마지막에 담담하나 매몰차게 이렇게 말한다. “네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는지 모르겠구나.” 이것도 하나의 힌트다. 악마는 신의 과잉으로 누락된 결여가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과잉된 결여일 것이다. 괴물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타인의 육체인 양 마구 잡아먹는 존재다. 이것도 나름 힌트라면 힌트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