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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누구나, 누구에게든 악마가 될 수 있다 〈다운폴〉

씨네플레이

 

1945년 이후 영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실존 인물은 아마 히틀러일 것이다. 전 세계 각지에서 히틀러 혹은 나치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만큼 히틀러는 20세기 최고의 문제적 인물이자 전 세계적인 거악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사의 정치와 이념, 도덕과 신념, 학문과 예술 등에 히틀러가 남긴 후유증은 지대했다. 히틀러는 인간이 얼마나 타인 혹은 다른 민족에게 잔악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반증한 인물로 남았다. 가난하고 콤플렉스에 찌든 화가 지망생이 어쩌다가 세기의 악마로 둔갑하게 됐던 걸까.

 


벙커에 갇힌 나치의 흥망성쇠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의 <다운폴>(2004)은 히틀러와 나치가 몰락하는 최후의 순간을 다룬 영화다. 독일어 원제는 <Der Untergang>. 영어로 번역된 걸 한국어 음가로 그대로 옮겨오는 방식의 제목 처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구태의연하다. 심지어 한국에선 10년이 지난 뒤에 소리 소문 없이 개봉했다가 금세 간판을 내렸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한국어 자막이 깔린 패러디 영상들이 돌아다녔는데, 한국 네티즌들의 재기(?)에 새삼 포복절도하게 되었다는 정도의 반향만 남았다고나.

 

영화는 어두침침하고 삭막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소련군의 침공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이다. 히틀러(브루노 간츠) 및 나치 수뇌부들은 ‘퓌러붕크’(총통의 벙커)라 일컫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숨어 전황을 살피는 중. 일군의 젊은 여성들이 군인들에 이끌려 벙커로 들어온다. 히틀러의 타자수를 뽑기 위해서다. 히틀러는 많이 지치고 고뇌에 찌들어 보이지만, 잔뜩 얼어있는 여성들에겐 여전히 위대하고 인자하신 ‘총통’의 위엄만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의외로 친절해 보인다. 이름과 나이, 고향과 직업 등을 묻고 나서 한 여성이 낙점된다. 이름은 트라우들 융에(알렉산드리아 마리아 라라). 영화는 이후, 그녀의 시점에서 가감 없이 전개된다.

 

히틀러의 타자수가 된 트라우들 융에
히틀러의 타자수가 된 트라우들 융에

전황은 독일군에게 매우 불리한 상태이다. 소련군은 이미 베를린 근처까지 쳐들어왔고, 쥐어 짜내듯 수립했던 작전들은 매번 수포로 돌아간다. 몰락의 기운이 벙커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평범한 처녀였던 트라우들 융에는 벙커 안의 상황을 낱낱이 목격하게 된다. 간부들의 내분과 거의 분열증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광기. 그러면서 여전히 이어지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따분하고 무기력한 일상. 히틀러의 정부(동반자살 직전 결혼한다) 에바 브라운(율리아네 쾰러)은 그 와중에 요란스러운 파티까지 연다. 파티 도중 공습이 일어나 벙커 전체가 휘청거리는 동안에도 미친 듯이 마시고 춤을 춘다. 전쟁도 일상이 되면, 그리하여 죽음도 삶도 단 몇 센티 차이로 맞붙게 되면 외려 모든 것에 초탈하거나 둔감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잘못했지만 나는 아니야!

 

병색이 완연해진 히틀러는 전황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 휘하 장군들을 독려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병적으로 몰아붙이는 광기는 그 자체가 몰락의 기운에 사로잡힌 인간의 현실 부정과 자기합리화의 전형적 증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이미 미쳤고, 이미 쓰러지고 있으며, 이미 자신의 죽음을 머릿속에 새긴 상태다. 이성이 광기에 함락당한 자에겐 모든 게 불가능한 동시에 모든 게 가능하다는 착각만이 녹슨 작두처럼 의식을 지배할 뿐이다. 장군들은 장군들대로 자신들만의 예감과 불안에 휩싸인 상태에서 서로를 헐뜯는 데 여념이 없다. 삶도 죽음도 모두 남의 탓이고, 자신은 결백하고 정직하다고 믿는다. 이렇듯 죽음을 예감하며 자기 명분에만 집착하는 모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랜 속성이다. 모두가 잘못했지만 자신만은 예외라는 자기 긍정, 아니 궁극의 자기 부정. 전쟁통이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은 일상에서 흔하지 않던가.

 

실화에 충실했던 만큼 장면 장면이 모두 핍진하고 설득력이 뛰어나다. 1981년 사망한 알프레드 슈페어(건축가이자 군수장관으로 괴벨스의 대표적 정적이었다)가 생전에 증언했던 내용과 2002년 영화 시사회 직후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 트라우들 융에의 협조 덕이 크다. 거기에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자칫 지루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150분을 넉넉한 긴장감으로 가득 채운다. 요란스러운 전투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러닝타임 대부분이 삭막한 콘크리트 벙커 안에서 흐른다. 총포 소리가 난무하는 전투보다 더 맹렬하고 잔인한 인간의 내면이 사투를 벌이는데, 역사적으로 악인이라 낙인찍힌 사람이라도 결국엔 한 명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기본일 거다.

 


잘 자라 이쁜 아이들, 지옥에서 보자꾸나

히틀러 역할을 맡은 브루노 간츠는 스위스 출신의 독일 배우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 베르너 헤어조그의 <노스페라투>(1979) 등 출연한 작품마다 다채롭고 개성적인 연기를 선보인 명배우인데 2019년 타계했다. <다운폴>을 준비하면서 그는 히틀러 생전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억양 하나, 발음 하나마저 섬세히 재연하려고 애썼다. 실제 외모상 유사성은 딱히 안 느껴지지만, 미세한 표정 하나 손짓 발짓 등은 히틀러의 붕괴된 내면을 적실하게 표현한다. 다른 배우들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울리히 마테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코리나 하르포히)가 히틀러 자살 직후, 잠자리에 드는 6명의 자녀들에게 수면제와 청산가리를 먹이는 장면이 있다. 패망이 닥쳤으니 가족 모두 흉한 꼴 보지 말고 지옥에서 해후하자는 심사일 텐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분위기는 고요하고 차분하다. 마그다가 아이들에게 차례로 수면제를 먹인다. 잘 자라라는 다정한 인사도 빼놓지 않는다. 아이들은 내막을 알 수 없다. 큰 아이 하나만 징조를 느끼고 약을 거부한다. 마그다는 그래도 침착하다. 아이를 달래 결국 약을 먹인다. 남편 괴벨스는 묵언 동의 상태. 그렇게 아이들은 고요하게 영면한다. 괴벨스 부부는 다음 날 바로 동반 자살한다.

 

마그다 괴벨스는 남편보다 더 극렬한 ‘히틀러 신도’라 알려져 있다. 재벌가 출신인데, 여성 편력이 심했던 괴벨스와의 결혼 내막을 들여다보면 여느 일반 사람들의 치정 관계와 다를 바 없이 간교하고 치사한 욕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그랬던 그녀가 히틀러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보면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심리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일반 정서를 짚을 수도 있다. 1차 대전 패배 후 독일 정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각종 이념을 내세운 정당들이 난립하고 경제는 공황 상태였다. 히틀러는 그 혼란을 자신의 무기 삼아 도깨비처럼 나타난 메시아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실체를 파악한 사람들조차 그의 등장을 묵인했다. 프랑스를 비롯, 주위 모든 국가가 그들의 적이고 타도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경제적 부와 학계의 명망을 두루 쟁취한 유태인이 독일 내부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히틀러도 괴벨스도 유태인에 대한 개인적 콤플렉스에 짓눌려 있던 인물이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타깃 삼아 뭇 대중의 불만과 욕망을 집중시키면 심리적 화력이 증폭하면서 거대한 돌풍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이건 비단 나치 현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나치 이전, 나치 이후에도 그런 현상은 늘 예측 불가한 방향에서 선풍을 일으켜 원래 없던 적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선’과 ‘정의’를 외친다. 그럴 때, 사실의 내막이나 사건의 본질, 인물의 정체 따윈 핵심 사항이 아닌 게 된다. 잠재된 악의 광풍은 늘 ‘선각’과 ‘혁신’의 이름을 띠고 있다. 나치는 그것의 한 전형이자 커다란 메타포로 지금 어디서든 재발 가능한 인류의 불치병을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를 외치려거든 ‘악의 씨’부터 가려내라!

잠재된 악의 광풍은 늘 ‘선각’과 ‘혁신’의 이름을 띠고 있다. 나치는 그것의 한 전형이자 커다란 메타포로 지금 어디서든 재발 가능한 인류의 불치병을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재된 악의 광풍은 늘 ‘선각’과 ‘혁신’의 이름을 띠고 있다. 나치는 그것의 한 전형이자 커다란 메타포로 지금 어디서든 재발 가능한 인류의 불치병을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에 보관된 히틀러의 유골을 의학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본 적 있다. 히틀러가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는 선험적 혹은 후천적으로 전두엽에 이상이 있다는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악마’라 불리는 자의 특유한 ‘악마성’을 의학적으로 증명했을 때 ‘근거없음’이라는 결과가 나온 셈인데, 그로 인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악마가 늘 평범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악마라 불리는 그 스스로도 자신의 악마성을 인지하거나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더 무시무시한 사실일 수도 있다. <다운폴>을 보면서 느낀 것도 그런 점이다. 마그다 괴벨스는 자식들에겐 더없이 다정하고 온유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가 아이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그 기저엔 맹목과 맹신으로 침윤된 악마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마그다를 연기한 코리나 하르포히는 그 장면을 찍고 실신했다고 한다. 악마는 그렇게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지문을 찍어대고 있다. ‘정의’를 부르짖으려면 그것부터 제대로 가려내야 할 것 아닐 텐가.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