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이 처음 공개된 날, 곽은미 감독에게 실례를 끼쳤다. 전주국제영화제 GV 현장에서 영화 제목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예상과 달리 감독은 “그런 사람 꽤 많아요”라며 태연히 웃어넘겼다. 감독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준비 과정부터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함께한 스태프조차 제목을 착각하여 오기하는 일이 왕왕 일어났다. 믿음이 ‘있다’는 긍정보다 ‘없다’는 부정이 입에 잘 붙는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듯하다고 덧붙이긴 했으나, 감독은 이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언어가 단지 소통 방편이 아니라 생활 습관과 시대 흐름, 사회 시선을 담는 그릇임을 상기하면, 이 일화는 그저 그런 실수로 여기며 무심코 넘기기엔 어려운 경험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주인공 한영(이설)에게 언어는 신뢰를 판가름하는 주요 잣대이자 생계 활동 도구다. 영화는 한영이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여 사회에 보이지 않는 문을 두드리는 과정을 비추지만, 한영은 끝내 신뢰받을 만한 사회 구성원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탈북민, 조선족, 재일조선인 등은 여전히 범죄자 혹은 약탈자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재현되곤 하지만, 이러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며 한국 사회에 자리한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영화 또한 드물지 않게 존재해 왔다. 젊은 창작자의 관심은 단편 <충심, 소소>(김정인, 2012), <명희>(김태훈, 2014), <은서>(박준호, 2019) 등으로 이어졌고, 탈북민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편 3부작 <마담B>(2016), <뷰티풀 데이즈>(2018), <파이터>(2021)를 연출한 윤재호 감독의 행보도 눈에 띈다. 박동훈 감독의 데뷔작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박동훈, 2020)의 경우, 천재 수학자라는 정체를 숨긴 채 근근이 먹고사는 인물에게 탈북민 설정을 부여하기도 했다. 넓게 보면 <믿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이와 같은 자장에 속한다. 단편 <열정의 끝>(2015), <대자보>(2017)를 통해 여성과 계급, 차별과 시선의 문제를 꾸준히 다룬 곽은미 감독의 첫 장편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탈북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 작품과 차이를 빚어내는 요소 중 하나는 인물의 직업이다. 한영이 한국에 정착하여 안정적 삶을 꾸리고자 선택한 직업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이드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업으로 인해 한영은 갈수록 불안한 처지에 내몰린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대신에 현실 세계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영화는 메르스 확산으로 혼란스러웠던 ‘2015년 가을’에서 시작하여 사드 배치를 둘러싼 중국의 경제 보복이 본격화된 ‘2016년 가을,’ 11년 만에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으로 국내외가 술렁였던 ‘2018년 봄’까지 총 세 차례 자막으로 시점을 표기한다. 다만, 극이 마무리되는 시점은 모호하게 열려 있다. 전 세계에 팬데믹이 번지는 2019년 이후를 언급하지 않고, 그저 이렇다 할 개선 없이 암담한 상황이 지속되는 시점에서 끝맺을 뿐이다. 영화가 최소한 3년의 세월을 다룬다고 가정할 때, 한영이 가이드로서 직업 활동을 이어간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전염병과 국가 정세 같은 한영 혼자 힘으로 어쩔 도리 없는 변화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한영은 외부 상황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구석으로 밀려난다. 말하자면 한영은 인과 없이 연속했던 모든 사건과 사고를 하나로 이어주는 표본이다. 누군가는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 파편처럼 접했을 소식이 한영에겐 차례로 누적되어 커다란 여파를 안긴다. 직장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이, 한영은 새 출발하겠다는 포부를 접어둔 채 생존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가이드라는 직업과 탈북민이라는 정체성이 맞물리며 한영을 짓누르는 압력이 증폭한다. 탈북 이후 합법이라는 자격을 취득하고 제 존재를 증명하고자 분투하던 한영은 점차 불법 행위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이때 영화는 극적 사건을 전개하여 충격을 가하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인물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길을 택한다. 한영은 타인과 외부 세계로부터 신뢰를 획득하는 일에 거듭 미끄러진다. 사상과 목적을 의심받고 다른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 거라며 공공연히 지목당하는 식이다. “잘 살아야 돼요”라며 지나가듯 조언하는 이도, “탈북민들은 나라에서 돈 줘서 일 안 해도 된다며?”라며 순진하게 묻는 이도 한영에겐 결국 적개심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차츰 질문의 화살표를 바꿔놓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 ‘사람’ 자리에 한영을 놓는 것이 아니라, 한영을 지켜보는 관객을 위치시킨다. 당신은 북에서 온 젊은이를, 출신도 불분명한 낯선 타인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이방인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고. 그럴 만한 포용력과 관대함을 갖춘 사람이냐고.

한영은 생명력 강한 인물이다. 그의 노력과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서 쫓겨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지만, 끝내 제 길을 정해서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간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쉽게 노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면 엄격해 보이는데, 주변 인물과 교류하며 관계 맺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한영은 남동생 인혁(전봉석)과 북한에 남은 가족을 책임지려 애쓰는가 하면, 친구이자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정미(오경화), 한영과 인혁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서 온 리샤오(박세현)에게도 마음을 내어준다. 경계심을 완전히 지우기 어려운 입장이지만 여행사 동료라든지 신변보호 경찰관 태구(박준혁)처럼 새로 만난 인물들과도 거리를 좁히려 최선을 다한다. 그런 한영이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얼굴로 한국을 떠나는 장면에서 관객은 목격자이자 방관자가 된다. 한영이 믿지 못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한영을 믿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와 같은 결말 외에 다른 마지막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물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이는 배우들이다. 이설은 한국어, 중국어, 북한 사투리를 익히고 강도를 조정하며 한영이 통과하는 삶의 여정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여기에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무는 행동, 부당한 상황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는 자세를 더하며 자존심 세고 독립심 강한 한영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친근하게 다가가면서도 한영을 섬세한 눈으로 살피는 정미 역의 오경화 역시 극에 활기를 부여한다. 정미는 한영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걱정하는 유일한 친구이며, 서로에게 잠시 버팀목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인생을 책임져 줄 순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어른이다. 비슷한 듯 다른 길로 나아가는 두 인물의 선택은 “안녕히 다시 만나요” 노래하며 작별 인사를 대신하는 순간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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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