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학, 게임에서 종종 언급되는 ‘사이버펑크’란, 첨단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억압적인 사회와 반체제적인 대중문화의 결합을 뜻하는 SF의 한 장르이다. 차갑게 기계화된 세상과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 고층빌딩이 감싸는 암울한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다. 해외 커뮤니티에서 ‘사이버펑크 서울’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같은 이유에서 사이버펑크를 다룬 영화들은 화려하고 매혹적이지만, 두려움과 공포심까지 함께 준다. 그럼에도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임을 인정하며, 세계가 사이버펑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사이버펑크의 대표 도시를 품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까지 각 국가별로 다섯 편을 소개한다.
<메트로폴리스> (1927) ㅡ 독일의 차가운 시대상을 반영한 고전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지상세계의 프레더는 어느 날, 마리아를 통해 지하 세계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게 된다. 이후 아버지이자 통치자 프레드슨에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프레드슨은 오히려 마리아와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을 교란할 것을 명령한다. 마리아를 복제한 로봇은 노동자를 선동하고, 지하세계는 홍수가 나며 공장이 노동자들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한다.
독일의 프리츠 랑 감독은 <메트로폴리스>로 SF 영화의 시초를 만들어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그려낸 이 작품은 무성영화나 SF를 언급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고전으로, 아래 소개할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수많은 SF 영화들에 귀감을 준 작품이다. 건조한 흑백과 무성 연출은 희망 없는 지하 도시와 개별성을 잃은 노동자들의 암울한 일상을 더욱 극대화한다. 영화는 삭막한 미래를 그렸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메시지를 녹여낸다. 극중 마리아의 "머리와 손의 중재자는 심장이어야만 한다"는 대사가 유명한데, 이는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를 품는다.
<블레이드 러너> (1982) ㅡ 혼돈과 무질서로 휩싸인 로스앤젤레스
핵전쟁 이후 혼돈과 무질서로 휩싸인 2019년, ‘로이’를 중심으로 한 레플리칸트 ‘넥서스 6’ 6명이 오프월드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지구로 잠입한다.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였던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지구에 잠입한 복제 인간들을 찾기 위해 복직하고, 자신이 복제 인간임을 모르는 ‘레이첼’(숀 영)을 마주한다. 증거의 꼬리를 잡아 수사하던 ‘데커드’는 ‘레이첼’ 덕분에 위기 속에서 목숨을 구하고, 복제 인간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게 된다.
미국의 리들리 스콧 감독은 <블레이드 러너>로 사이버펑크 장르의 비주얼을 정립하였다. 필립 K. 딕의 SF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사이버펑크의 근본적인 물음인 ‘무엇이 실재인가? 안드로이드도 과연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감각적인 비주얼로 풀어낸다. 어두운 스모그 구름, 수백 피트의 간판들, 빈곤한 삶과 엄청난 부가 공존하는 로스엔젤레스 거리 등 어둡고 혼란스러운 미래가 눈앞에 선명히 펼쳐진다. 여기에 감각적인 대사들까지 녹여내며 완성도를 높였다.
<공각기동대> (1995) ㅡ 정체불명 해커에게 위협받는 일본
기업의 네트워크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점점 더 지능화되고 흉포화해지는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 비공식 사이보그 부대 ‘공각기동대’가 탄생한다. 어느 날 주가조작, 정보 조작, 정치공작, 테러 등의 죄목으로 국제수배 중인 ‘인형사’가 일본에 나타났다는 경고가 ‘공각기동대’로 날아든다. 쿠사나기는 정체불명의 해커 ‘인형사’를 제거하기 위해 임무에 뛰어든다.
일본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공각기동대>로 도발적인 사이버펑크를 구현했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건조하면서 정적인 정서 위에 그로테스크와 에로스를 숨기지 않고 도발적으로 배치하여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이야기 또한 한발 더 나아간다. 인간이 인간을 벗어난 존재가 되고도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인다는 설정으로, 정확히는 포스트 사이버펑크에 속한다. 기술이 지배하고, 인간은 순응하는 세상에서 ‘영혼은 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그 대답은 온전히 관객에게 맡긴다.
<제5원소> (1997) ㅡ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프랑스식 SF
2천년대의 뉴욕, 지구인들은 엄청난 크기의 괴물체를 발견하고 파괴하려 하지만 신부(이안 홀름)가 이를 저지한다. 이 괴물체는 악마의 집합체로서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해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부는 이 괴물체를 없앨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원소에 대해서 알려준다. 이때 악마에게 쫓기던 몬도체인이 지구에 불시착하고, 지구인들은 그에게 릴루(밀라 요보비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 지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릴루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수사관 출신 비행 택시 운전사 코벤(브루스 윌리스)을 만난다.
프랑스의 뤽 베송 감독은 <제5원소>로 사이버펑크에 로맨틱함을 불어넣었다. 알록달록한 색채와 발랄한 진행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23세기의 뉴욕과 이집트, 크고 아름다운 우주를 무대로 선과 악의 싸움을 그린다. 그 모험의 끝에는 ‘사랑이 모든 것을 구할 것’이라는 로맨틱한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다.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설정이었지만, 뤽 베송 감독만의 유머와 탁월한 액션이 더해져 매력적인 사이버펑크 영화가 탄생했다.
<승리호> (2021) ㅡ 우주를 청소하는 2092년의 한국인
2092년, 지구는 병들고 우주 위성 궤도에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UTS가 만들어졌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조종사 ‘태호’(송중기)와 과거 우주 해적단을 이끌었던 ‘장선장’(김태리), 갱단 두목 출신의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유해진)는 우주쓰레기를 주워 돈을 버는 청소선 ‘승리호’를 이끌어간다. 어느 날, 이들은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하고, 이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계획한다.
대한민국의 조성희 감독은 <승리호>를 통해 젊고 경쾌한 한국형 사이버펑크를 보여줬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지구는 황폐화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는 미래에서 한국인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승리호>는 그 막막한 물음에 가장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2092년의 서울 여의도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이어지는 이 활극은 청춘들의 신나는 모험담 같기도 하다. 시종일관 유쾌한 에너지를 잃지 않는 <승리호>는 SF 영화 불모지였던 한국 영화계에 단비 같은 작품이다. 코로나 시기에 공개되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만나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이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