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본문은 <플라워 킬링 문>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미국적 가치'를 대표하는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미국은 어떻게 건설된 나라인가?” 마틴 스코세이지가 필모그래피 전체를 할애해 천착해 온 질문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건국사와 개척사를 그린 영화들은 많았다. 수많은 서부극들이 사막 한가운데에 새로운 세계를 쌓아 올린 미국인들의 삶을 노래했고, 프랭크 카프라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에서 자본과 부패한 정치에도 꺾이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미국인’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를 통해 ‘미국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스코세이지가 제시하는 대답 안엔 ‘서부개척’이나 ‘독립전쟁’, ’게티즈버그 연설’, ‘의회 민주주의’, ‘미국적인 가치’ 같은 근사한 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마침내)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디파티드>의 마지막 장면, 스코세이지는 미국이 '쥐새끼들의 나라'라고 천명한 바있다.

대신 스코세이지의 대답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일랜드 이민자 갱단이 자신들을 멸시하는 영국 이민자 갱단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던 19세기 뉴욕의 역사(〈갱스 오브 뉴욕〉, 2002). 사막 위에 세워 올린 욕망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지배하는 마피아들의 검은 돈(〈카지노〉. 1995). 베트남전 참전 이후 황폐해진 정신세계를 주체하지 못하던 외톨이가 폭력을 통해 영웅이 된다는 도착적인 판타지(〈택시 드라이버〉, 1976). 기품과 낭만으로 위장한 마피아의 신화가 사실은 치사하고 지저분한 개싸움에 불과하다는 걸 고발하는 냉혹한 고발(〈좋은 친구들〉, 1990)… 스코세이지는 미국이 사실 별 볼일 없는 건달들이 총칼로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다. 그 지리멸렬함에 대한 고백은 〈아이리쉬맨〉(2019)에서 정점에 올랐다. 미국이 사랑했던 젊은 대통령도, 시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던 노조 지도자도, 사실 마피아와 협잡해 일을 도모했을 뿐이라는 냉소.

스코세이지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2023) 또한 스코세이지가 오랫동안 건네 온 질문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백인들은 루이지애나에서 잘 살고 있던 북미 원주민 오세이지 족을 캔자스로 쫓아냈고, 다시 캔자스에서 오클라호마의 바위투성이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는 그 땅에서 석유가 솟아나기 시작하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오세이지 족으로부터 그 부를 강탈하려 든다. 마치, 털사의 흑인들이 자력으로 부를 축적하자 백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 부를 강탈했던 것처럼. 오세이지 족은 보호 구역에서 생산되는 석유에 대한 배당금을 받지만, 동시에 문명화가 되지 않은 ‘금치산자’로 분류되어 백인 후견인의 허락 없이는 제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 묶인다. 백인들은 온갖 달콤한 말로 오세이지 족을 설득해 그들의 운전사, 하녀, 후견인이 되어 월급을 받아간다. 백인 상인들은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백인에게 받는 가격과 오세이지 족에게 받는 가격을 다르게 책정해 바가지를 씌운다.

빌 킹 헤일(왼쪽)과 그의 조카 어니스트

‘오세이지 족의 친구’로 자처하는 빌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입만 열면 오세이지 족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는 오세이지 족의 말과 풍습을 배웠고, 포장된 도로와 문명화된 학교를 지어줬으며, 오세이지 부족 회의에도 참여해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백인들끼리만 있을 때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카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오세이지 족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지 이야기하던 빌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시대는 갔어. 그들은 다 죽을 거야. 어쩔 수 없어.” 빌은 말한다. 오세이지 족의 평균 수명이 50에 불과하다고. 다들 당뇨로 죽어간다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 부를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고. 한 문장 안에 ‘안타까운 일’이라는 말과 ‘그 부를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는 말을 함께 섞을 줄 아는 빌은, 정체를 숨긴 늑대처럼 오세이지 족 주변을 맴돈다.

이 무렵, 별다른 재주가 없는 백인 남자들은 앞다투어 오세이지 족 여성들을 유혹해 결혼했다. 오세이지 족 아내의 후견인이 되면 배당금을 마음껏 꺼내어 쓸 수 있고, 혹시라도 오세이지 족 아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내 소유의 땅과 배당금 수령권을 상속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빌은 이 ‘혹시라도’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자신이 오세이지 족 여성과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빌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조카 어니스트를 등 떠민다.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연애해 보라고. 어니스트는 자신이 모는 택시에 몰리를 태우고,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몰리와 가까워진다. 몰리는 어니스트가 자신의 돈을 노리는 게으른 백인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어니스트와 사랑에 빠진다.

버니스트는 몰리의 곁을 지킨다. 빌의 지시로 암살자들을 찾으면서.

문제는 어니스트도 몰리와 진짜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거다. 어니스트는 삼촌에게 “몰리는 진짜 숙녀”라고 말하며 제 마음이 진심임을 강조한다. 자, 일은 이제부터 복잡해진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꾸며 왔던 음모를 내려놓기 마련이다. 어니스트는 아니다. 삼촌의 꼭두각시 노릇을 그만두기엔 너무 줏대가 없고, 돈의 유혹을 이기기엔 너무 탐욕스럽다. 그러면 최소한 자신이 몰리에게 품은 감정이 평범한 사랑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야 하는데, 어니스트는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 어니스트는 몰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몰리네 집안의 부를 빼돌리기 위해 삼촌 빌이 짠 계획을 착실하게 수행한다. 어니스트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신이 저지르는 일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간이다. 그러니 몰리의 가족을 하나 둘 무너뜨리는 계획을 수행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돈도 사랑하거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어니스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삼촌의 지시를 따른다. 부랑아나 다름없는 백인 건달들을 설득해 오세이지 족을 하나둘씩 암살할 것을 주문하고, 반복되는 오세이지 족 암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고용된 탐정을 죽이고…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 몰리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오세이지 족의 말을 익혀서 몰리에게 안전을 약속한다. 아마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몰리에게 자신이 잘 하면 된다고. 금슬은 또 어찌나 좋았는지 애를 셋이나 낳았다. 빌조차 “저렇게 아픈 애랑 잠자리를 가지고 싶든?”이라며 경악할 정도였다. 낮에는 아내의 가족을 파괴하는데 전심전력을 다 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를 진정 사랑한다고 믿으며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남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탐욕스러운 얼간이. 자신이 아내의 몸과 마음을 모두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무섭고,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두자니 아내의 돈이 탐나는 불량배.

마틴 스코세이지(가운데)

“미국은 어떻게 건설된 나라인가?” 올해 나이 여든의 스코세이지는 자신의 스물여섯 번째 장편 영화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질문에 가장 냉철한 답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백인 남성이 저지른 온갖 비열하고 졸렬한 악행을 조금의 포장도 없이 그려내던 스코세이지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다소 직접적인 장치를 통해 말한다. 몰리의 부고 기사에는 오세이지 족 연쇄 살인사건도, 몰리가 겪었던 개인적인 비극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노라고. 백인 남성들이 기록해 온 역사는 그렇게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폭력과 갈취와 가스라이팅의 흔적을 지웠고, 그나마 전승되어 온 비극은 백인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소재가 되었다. 그 역사를 영화로 만들고 있는 자신의 행동마저도 백인 남성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비판하며, 스코세이지는 영화의 문을 닫는다. 자기 자신에게까지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 노장의 시선은 싸늘하고, 그가 시선을 거둔 자리에는 오세이지 족의 제의 만이 남는다. 마치, 그럼에도 오세이지 족은 살아남아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는 선언처럼.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