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에비앙 협정을 통해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했다. 8년 간의 식민주의 전쟁이 그렇게 막을 내린다. 평화 협정 이후 군부의 일부 세력들은 드골의 결정에 극렬히 반대한다. 드골은 2차 대전 당시의 공헌으로 군부에 의해 추대된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결성된 게 OAS(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라는 군사 단체다. 극우파로 조직된 그 단체는 드골 암살을 결행한다. 1973년 프레드 진네만이 감독한 <자칼의 날>은 바로 그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금발의 미지의 남자를 추적하라!
기자 출신 소설가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1971년 발표한 동명의 유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작가의 출세작이었다. 그 작품과 관련해서 여러 일화가 있는데, 한국에서도 흥미로운 해프닝(?)이 있었다. 1975년 광복절 축하 행사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를 암살 시도했다가 실패하곤 육영수 여사만 사망했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문세광의 소지품 중 원작 소설이 있었다. 담당 검사였던 김기춘이 그 소설을 빌미 삼아 자백을 끌어냈다는 풍문이 있다. 하지만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여섯 차례의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코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암살 가담자는 총살 당하고 궁지에 몰린 OAS는 외국인 전문 킬러를 고용하기로 한다. 접선 장소는 로마의 한 호텔. 수소문 끝에 영국 출신(으로 보이는) 금발의 잘 생긴 남자(에드워드 폭스)를 호텔로 부른다. 스스로를 ‘자칼’이라 부르는 그는 총액 50만 불을 제안하고 절반 금액을 착수금으로 요구한다. OAS는 동의한다.
자칼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한다. 위조 여권을 만들어 제네바와 로마, 런던 등지를 오가며 신출귀몰한다. 무기 암거래상을 만나 직접 설계한 총을 생산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용의주도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 암살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 내무부는 촉각을 곤두세운다.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예정되어 있는 대규모 행사를 취소할 용의가 없다. 프랑스 내무부는 유능한 노장 형사 클로드 르벨(마이클 론스데일)에게 전권을 일임한다. 이후, 군더더기 없고 말끔한 추적극이 드라이하게 전개된다.
저 남자, 어째 데이비드 보위를 닮은 것 같군
자칼은 변신의 귀재다.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 처리에 있어선 냉혹할 정도로 정확하다. 이 영화 이후, 각종 영화에 등장하는 살인청부업자의 전형을 창조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당시로선 기상천외한 캐릭터였다. 언뜻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케 하는 외모인데, ‘변신의 귀재’ 이자 타고난 완력과 출중한 사격 실력 등 다재다능한 면이 그런 연상을 더 부추긴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원작이라 영화 기획 당시, 스파이물에 일가견 있는 로저 무어(그는 대신 007 제임스 본드로 발탁됐다)나 로버트 쇼 등이 자칼 역으로 물망에 올랐었다. 하지만 프레드 진네만은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 자칼 역에 적합하다 여겨 에드워드 폭스를 캐스팅했다. 지금 봐도 탁월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자칼은 끝까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이든 가능해 보일 것 같은 자칼이지만, 암살은 실패한다. 드골은 1970년에 사망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꾸며낸 픽션이니 만큼 드골이 자칼에 의해 암살당하지 않을 거라는 결과는 진즉에 암시되어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루하지도, 뻔한 복선에 의해 이야기를 쥐어짜지도 않는다. 자칼의 행동 하나하나가 수수께끼처럼 이어질 뿐, 어떤 상황을 설명하거나 단서를 제공하는 영화적 플롯 등도 제한적으로 활용된다. 그러면 외려 플롯이 엉성해질 수도 있는데, 그래서 외려 원작 소설의 치밀한 디테일을 역설적으로 잘 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자칼의 행동처럼, 연출도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기에 전체적으로 정밀감이 두드러진다.
사건은 막았지만, 용의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일부러 긴장을 자아내려는 의도가 느껴지지 않기에 장면 장면이 다 의미심장하고 밀도 있게 여겨지는 영화다. 엘리제 궁이나 개선문 장면 등에선 당시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위상이 느껴질 만큼 웅대한 연출이 더해져 볼 만하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1970년대에 제작된 영화지만, 파리 중심가의 모습이 21세기가 20년이나 지난 지금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건 또 다른 별미랄 수도 있다. 5년 정도만 해외를 돌다가 돌아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나름 별미다.
자칼은 암살에 실패하지만, 경찰 입장에서 영화를 돌이켜 보게 된다. 르벨 총경은 자칼이 영국인이라는 단서를 통해 영국 수사국에도 도움을 청한다. 찰스 캘스롭(Charles Calthrop)이라는 30대 남성이 유력 용의자가 된다. 영국 수사팀이 캘스롭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여행 중이었다. 정황상 더 유력해진다. 자칼(Jackal)이라는 이름에서 단서를 찾은 건데, 자칼의 프랑스어 표기가 ‘Chacal’이다. 일종의 철자 놀이를 통해 르벨 총경도, 영국 수사팀도 캘스롭이 자칼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캘스롭은 자칼이 아니다. 영화에선 그 사실이 애매하게 흐려지지만, 원작에선 분명하게 얘기된다.
그럴 경우, 경찰은 과연 자칼을 특정하고 사건을 종결한 게 아닌 게 된다. 암살은 막았지만, 자칼은 여전히 미궁 속 인물이다. 분명히 죽었지만, 어쩐지 여전히 그가 살아있을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사건의 해결 및 용의자를 정확히 식별해 체포하는 게 경찰의 기본 임무다. 사건은 막았지만, 범인은 여전히 정체가 불분명한 상황. 그렇다면 자칼이 현장범이란 단서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이 작품이 주는 묘미, 그리고 자칼이라는 인물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수박은 붉다, 아니 푸르다
자칼은 수차례 변장을 일삼는다. 임무를 부여받곤 처음엔 공동묘지에 들러 2살 때 죽은 사람의 출생 일자를 도용해 평범한 영국인 행세를 한다. 그러곤 공항에서 한 덴마크 교사의 여권을 훔쳐 정체를 바꾼다. 검색과 포위망을 뚫고 파리에 잠입해선 터키 탕에서 만난 게이의 집에 숨어든다. 결행일 당일엔 10만 명의 군경이 동원된 삼엄한 경계망 속을 한쪽 다리를 잃은 늙은 상이군인 행세를 하며 무사통과한다. 르벨 총경은 예민하게 냄새를 맡지만, 늘 한 박자 늦다. 미리 제작한 조립식 총(목발로 쓰이기도 했다)으로 어느 건물 꼭대기에서 자칼이 드골의 머리를 겨냥한다. 그때, 자칼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드골이 마중 나온 하객과 비쥬(볼을 맞대 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소음기를 통과한 탄환이 땅바닥에 튕긴다, 동시에 르벨 총경과 소총을 든 경찰이 들이닥친다. 자칼은 그렇게 사라지면서 화면이 전환된다. 왠지 원래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허공에 붕 떠 순식간에 지워지는 느낌이다.
자칼이 무기 밀매상에게 주문한 총을 들고 스위스의 어느 숲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전 장면에서 자칼은 시장에 들러 사람 머리통만 한 수박 한 통을 산다. 숲에 도착한 자칼이 수박에 흰 물감으로 눈 코 입 형태를 그린다. 100여 미터 정도 사거리를 둔 채 수박을 나무에 매단다. 총을 나무에 밧줄로 묶어 거치하곤 총의 영점을 잡는다. 이마를 겨냥해 첫 발. 왼쪽 뺨 부위에 맞는다. 자칼은 드라이버로 조준경을 조절한다. 두 발째는 이마를 살짝 비껴 맞는다. 다시 조준경 조정. 세 발째 수박이 박살 난다. 자칼이 르벨 총경의 총에 맞아 허공에 뜨는 순간, 불현듯 이 장면이 오버랩된다. 왜일까.
자칼은 아직 죽지 않았는지도 몰라
수박은 자칼이 가상으로 설정한 사격 연습 도구다. 음식이지만, 먹기 위한 게 아니다. 겉은 파란색이되, 속은 빨갛다. 자칼이 수박을 명중시킬 때, 수박은 빨간 즙을 흩날리며 박살 난다. 사격은 명중이지만, 죽은 사람은 없다. 자칼은 언제나 혼자다. 그러면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다. 죽어서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원작도, 영화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가상의 인물을 가공했다. 허구란 실제로는 알 수 없는 어떤 인물이 그 자신이 아닌 걸 연기함으로써 완성되는 시스템이다. 허구에서 죽은 그는 실제로 죽은 게 아니나, 실제로 죽게 되는 순간, 또 다른 허구가 작동하게 되는 게 어떤 이들에겐 운명이기도 하다. 착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허구 속 ‘그’를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그’라 여기게 되는 것.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문득 자칼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지금 누군가의 곁에, 혹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곁에.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보여지는 대상에겐 늘 일종의 총구와도 같다. 영화는 바로 그런 착종을 먹고 사는 암살자에 다름 아니다. 레거시 미디어도 SNS도 다를 바 없다.
누구인지 모를 자칼은 여전히 살아 있고, 수박 철은 일단 지나갔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