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집에 가자...
영화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또 가장 쓸쓸한 경력 모두를 지닌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2016년 7월 2일 LA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나이 77세였죠. 1970년대 할리우드가 가장 주목했던 천재 감독은 평생동안 단 7편의 영화만을 남겼습니다. 그가 완벽주의자여서? 아닙니다. 그의 인생이 너무 기구해서입니다. 정상을 찍고 바닥으로 추락하기까지 너무 짧은 영광의 삶을 살았던 그를 추모하며 그의 인생 최고작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1979년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음향상
총 5개 부문 수상작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이민 2세대의 베트남전 참전. 국가에 헌신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거라 믿었던 부푼 기대. 그리고 참혹한 죽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이들의 좌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고 말하면서 잔인했던 미국 사회의 자화상과 살아남은 이들의 슬픈 진혼곡을 담아낸 영화. 197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비평적으로도 주목받은 그의 두번째 영화 <디어헌터>는 그 자체로 마이클 치미노 인생의 최고 정점을 상징하는 영화입니다.
촉망받던 미국의 거장, 마이클 치미노 감독 작품
<디어헌터>를 연출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과거,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 등 미국영화를 이끌어왔던 거장 감독들과 함께 거론될만큼 촉망받는 감독이었죠. 그는 “위대한 건축가이자 영화형식의 혁신자”라는 찬사를 들으며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가 <디어헌터>로 1979년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을 휩쓸었을 때 그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때는 베트남 전이 한창이던 1968년입니다.
마이클, 닉, 스티븐 세 사람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클리어턴 읍의 제철소에 다니는 일꾼이죠.
이들은 러시아계 이주민 2세대로 지역 주민 대부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터전을 이뤄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친구는 더 나은 미래의 보장과 기회를 위해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합니다.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고, 누구는 고백조차 하지 못한 채 혈기왕성했던 세 명의 남자가 전장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터 한복판은 그들에겐 결코 기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베트콩에게 붙잡혀 온갖 방식의 고문을 겪다가 살아남은 마이클과 닉, 스티븐은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닉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베트남을 전전하며 도박장에 빠져 살고 스티븐은 다리를 잃고 본국으로 소환되죠. 오직 마이클만이 멀쩡한 정신으로 친구들을 하나 둘 찾아나서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참전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입니다.
친구 닉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은 그저 짧지만 아낌없이 사랑했고 열심히 미래를 꿈꿨던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합니다.
거장 감독의 마지막 성공작
위에서 소개한 영화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디어 헌터>는 암울했던 전쟁 시기를 겪은 세 젊은 청년이 그로 인해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고 전장에서 돌아와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관객들이라면 다소 지루해할 정도로 3시간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죠.
베트남전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20여분 넘게 결혼식 장면만 보여주거나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평범한 일상을 찍은 장면들이 많죠. 하지만 이는 영화 전체 구조로 볼 때 비극을 극대화하고 주제의식을 깊이 하는데 일조하는 면이 있어요.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순수성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과 아메리칸 드림의 절멸 등을 강조하고 있죠.
묘하게도, 주인공 마이클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며 비탄에 잠기고마는 <디어헌터>의 마지막 장면과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작가로서의 운명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이 작품 이후 시장에서 엄청난 흥행 참패를 기록한 영화 <천국의 문>을 내놓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어쨌든 <디어헌터>는 앞으로도 후세에 계속 남아 시대의 정서를 오롯이 담아낸 걸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남긴 영화의 명장면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어떤 장면을 주목해야 할까요?
명장면1. 사슴 사냥 장면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전, 마이클과 닉, 스티븐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이들은 종종 라이플을 메고 사슴사냥을 즐겼습니다. 특히 마이클은 스티븐의 결혼식이 있은 다음 날, 결혼식 후 가장 먼저 사슴 사냥을 떠나자고 제안하는데요. 과묵한 성격이지만 결단력이 있고, 사슴에 어떤 연민의 정도 느끼지 않고 정확한 사냥 실력을 우선시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는 변합니다. 전장에서 돌아와 똑같이 사슴 사냥을 떠나지만 그는 이제 다시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죠.
명장면 2. 러시안 룰렛
아무튼, 이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관객들에게 <디어헌터>는 러시안 룰렛 영화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참혹한 전장 한복판에서 정신 착란을 일으킨 닉이 야시장의 불법 도박 러시안 룰렛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죠. 현지에서 탈영해 실종된 줄 알았던 닉이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위험천만한 러시안 룰렛 게임을 벌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훗날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베트남전을 벌인 미국의 자조적인 시각을 대변하는 장면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명장면3. 신은 미국을 보살펴 주실거야
마이클은 두 다리를 잃고 친구들보다 먼저 집으로 귀환해서는 칩거하며 살아가는 스티븐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돌아가 닉도 설득해보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장면에서 닉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돌아와 닉의 장례식을 치르죠. 어쨌든 오랜만에 세 친구가 모두 모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가 없죠.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친구들끼리 부르는 노래가 'god bless america' 입니다. 미국으로 이주해 기회만 엿보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이들에게 기회는 오지 않고 상처와 슬픔만 남은 것이죠.
전쟁의 비극 다뤘지만 미국 중심이라 비판받기도
흔히 <디어헌터>를 반전영화의 표본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깨져버린 아메리칸 드림 신화의 비판적인 시각이 담긴 영화로 보기도 해요. 그런데 정반대의 시각도 존재합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억압받던 소수의 사람들을 제멋대로 짓밟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또 멋대로 돌아가 중이병처럼 좌절해버리는 왜곡된 청춘들의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1979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당시, 미국의 영웅을 위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나쁜 악당처럼 묘사해 버리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작품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관객들에게는 <디어 헌터>가 자신들의 삶에 못을 받은 작품으로 기억될 소지가 있습니다.
영화사에 길이남을 음악, 카바티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친구들을 모두 잃고 뿔뿔이 흩어진 채로 홀로 고향 땅을 밟은 마이클은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입니다.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영화음악 역사에 남을 명곡으로 손꼽히고 있는 기타곡 '카바티나'입니다. 1930년생인 작곡가 스탠리 마이어스가 지은 이 곡은 원래 피아노 곡이었는데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의 조언에 따라 기타곡으로 편곡했다고 하죠. <디어헌터> 이후 여러 영화에도 쓰였지만 지금은 그저 <디어헌터>의 주제가 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듣고 있다 보면 회한의 정서에 빠지게 되는 매력이 있는 곡이죠. 많은 기타학도들에게는 꼭 연주하면 좋을 주법이 어려운 명곡으로 알려고 있습니다.

- Cavatina - The Deer Hunter - On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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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Dagmar Krug
발매일 2015.10.29.
이 영화는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찬사받았던 작품이지만 그 이후 어떤 감독도 <디어헌터> 같은 영화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디어헌터>는 또한 여러 논란을 안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좋을 이유를 꼽자면, 변화한 시대의 정서와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문제 등을 인식할 계기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다른 해석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바로 과거의 영화를 다시 찾는 이유일테니까요. 애잔한 선율의 '카바티나'도 다시 한 번 감상해보길 권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음악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일 테니까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