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라엘
마텔에서 발매한 아즈라엘과 배트맨 피규어

개인적으로 나이트폴(Knightfall)’ 사가는 지난 30년간 DC 코믹스에서 나온 모든 스토리 중 톱3에 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크 나이트 리턴즈배트맨: 이어 원처럼 현대의 배트맨을 재정의한 기념비적인 작품들도 있으나 나이트폴사가는 그 분량이나 구성에서 앞의 두 작품과는 또 다른 기념비를 세운 작품으로, 이미 유명하긴 하나 아직도 저평가된 스토리라 생각한다.

<나이트폴>, <나이트퀘스트>, <나이츠엔드>의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스토리는 배트맨뿐만 아니라 당시 어떤 슈퍼히어로 만화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대서사시급 기획으로, 전체 분량은 3000페이지에 달한다.

아즈라엘이 첫 등장한 아즈라엘의 검 1호

기본적인 구성은 2012년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이미 차용된, 베인이라는 최강의 적수를 만난 배트맨의 고난과 좌절, 그리고 회생을 다루고 있으나 영화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나이트폴대서사시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크 나이즈 라이즈>는 제1장인 <나이트폴> 챕터에서 여러 요소들을 차용해온 것일 뿐이다.

3000페이지에 달하는 나이트폴사가를 한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자도 액션 어드벤쳐 비디오게임을 하루에 한 챕터씩 클리어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끝판왕이라 생각했던 베인은 게임으로 치자면 중간 보스에 불과했다. 진짜 끝판왕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아즈라엘은 성 뒤마 성령기사단이라는 광신도 집단의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는 젊은이로 등장한다. 나중에 마블 총편집장 자리에 오르는 조 케사다가 젊은 시절 만든 캐릭터로, <배트맨: 아즈라엘의 검> 미니시리즈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단편성 악역으로 기획되었다.

이제는 메인급 케릭터로 자리 잡아서 배트맨 관련 컨텐츠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나이트폴기획의 윤곽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총 책임자 데니스 오닐은 당시 유행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폭력적인 안티히어로들에 대한 코멘터리를 나이트폴스토리 안에 넣고 싶다는 의견을 밝힌다. 독자들에게 히어로에게 허용되는 폭력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이트폴시작 불과 1년 전에 첫 등장했던 아즈라엘(장 폴 밸리)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즈라엘 신분이 아니라 배트맨의 수련생 역할이었다. 장 폴 밸리는 나이트폴의 3개 챕터에 전부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1부에서는 쓰러진 배트맨을 대신해 새로운 배트맨이 되는 과정을, 2부에서는 새로운 배트맨으로 활약하면서 펼치는 폭력의 향연을, 그리고 3부에서는 그를 저지하고 다시 배트맨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는 브루스 웨인과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각 시대마다 존재해 왔던, 영웅의 성장 과정을 그린 구전설화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이다.

아즈라엘이 새로이 디자인한 배트슈트

역시 조 케사다가 디자인한 기계적인 요소와 각종 무기가 강화되고 실전적인 느낌이 강한 새로운 배트슈트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폴 프롬 그레이스스토리에서 등장하는 데어데블의 강화슈트와 함께 90년대의 정서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디자인이라 생각한다.

이미 나이트폴의 기본 골조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써먹었기 때문에 동일한 설정으로 등장할 수는 없겠지만, 아즈라엘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정식으로 등장한 적 없으니 기사단원 아즈라엘의 모습으로라도 추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닥터 둠
존 번은 닥터 둠을 마블 유니버스의 초강력 빌런으로 만드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닥터 둠은 만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악당 축에 속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슈퍼빌런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2015년의 망작 <판타스틱 4>의 여러 실패 요인 중 하나로 닥터 둠을 전혀 매력적이지 않게 묘사한 것이 항상 거론되는데 닥터 둠은 마블 코믹스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 전체에서 가장 균형 잡히고 완벽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

많은 수집가들이 염원하는 왕좌에 앉아 있는 둠 스태츄

닥터 둠을 디자인한 사람은 미국 만화계의 전설 잭 커비. 캐릭터를 창작할 때 그리스신화, 로마신화, 그리고 각종 문학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모티프를 차용하는 것을 즐겨하던 그는 이 캐릭터를 디자인할 무렵 아마도 철가면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 보다. 비슷한 시기에 세 명의 유사한 캐릭터들을 생산해냈기 때문이다. <판타스틱 포> 5호와 같은 달에 출간된 <테일즈 오브 서스펜스> 31호에도 거의 유사한 형태를 한 철가면을 쓴 괴물이 등장한다. 같은 해에 출간한 웨스턴물인 <키드 콜트 아웃로> 10호에도 아이언 마스크가 등장한다. 같은 얼굴을 한 캐릭터를 세 군데서 한꺼번에 써먹은 것이다.

닥터 둠의 전설적인 첫 등장

어쨌건 닥터 둠은 나름 편집부의 고심 끝에 만들어진 빌런이었다. 스탠 리, 조 사이먼, 그리고 잭 커비는 혼자서 주인공들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캐릭터를 만들어보자고 머리를 맞대었고, 잭 커비는 죽음을 형상화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해서 해골 대신 온몸을 갑옷으로 뒤덮은 캐릭터가 탄생하였다.

탄생 당시 빅터 폰 둠은 세상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유능한 완벽주의자 과학자였다. 마스크를 항시 착용하는 것에 대해 잭 커비의 최초 설정은,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실제로는 볼에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이 전부이지만 본인이 그것을 못 견뎌하기 때문에 철가면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는 나름 심리학적인 설정이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후대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수 차례 변경되었고, 스케일도 점점 장대해져 닥터 둠은 실험실의 과학자에서 라트베리아라는 중세 유럽 국가를 연상시키는 나라의 지배자로 변모하게 된다.

테일즈 오브 서스펜스 31호 / 키드 콜트 아웃로 10호

닥터 둠은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부터 <지.아이.조>의 '데스트로'까지 여러 팝 컬쳐 캐릭터들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팬들과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잡한 캐릭터이고, 닥터 둠에서 이름을 따 온 MF DOOM이라는 유능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도 있다. 지금까지 영화에 총 2회 등장하였으나 그 정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사실 솔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10년 넘게 인기를 얻고 있는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가 좀 더 성숙하고 다방면화된다면 닥터 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얼굴에 대한 설정은 계속 바뀐다

최원서 / 그래픽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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