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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낼 수 없다〈더 킬러〉! 순응과 반역, 장르에 임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자세

씨네플레이

<맹크>(2020)가 실은 아버지가 쓴 각본을 쥐고 케빈 스페이시를 주연 삼아 <더 게임>(1997) 다음에 들어갈 작품으로 점찍었지만 (35mm 필름마저도 흑백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시기였고, 영화사에서도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해) 뜻하지 않게 장기간 표류한 기획이었던 것처럼, 데이빗 핀처의 근작 <더 킬러>(2023)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영화는 2007년에 알렉시 놀랑의 프랑스 그래픽 노블 원작에 대한 판권을 확보하고 브래드 피트 주연에 그의 영화사 플랜 B의 제작, 파라마운트 배급으로 진즉에 나왔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트는 각본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이라며 창작상 견해의 차이를 드러냈고, 핀처 역시 쉼 없이 다른 작품의 작업에 들어가다 보니 이 영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있었다.

“업계에 들어온 세월이 40년인데 영화는 10편 밖에 만들지 못한 게 이상하다”(그는 데뷔작 <에이리언 3>(1992)를 자신의 영화에 카운트로 넣지 않았다)라는 불평 섞인 말을 토로했던 것처럼 핀처는 감독으로서 운신에 제약이 많은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그가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만큼 다 소화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멀쩡히 승인이 떨어진 작품도 취소되기 일쑤였다. 특히 <나를 찾아줘>(2014)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괄목할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 사상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모았던 <월드 워 Z>(2013)의 속편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연되던 끝에 무산된 일은 한동안 영화감독으로서의 그의 필모그래피에 긴 공백기를 만든 악재였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와 4년간의 독점계약을 체결한 일은 핀처에게 있어 경력의 일대 전환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재능이 있는 감독들이 많이 있지만, 마블이 감독을 위해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한편으로 넷플릭스가 “감독에게 창작의 자유를 준다”며 옹호한 바 있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와 <마인드 헌터>로 다년간 호흡을 맞춰본 파트너십의 경험은 기존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경원시 당하던 넷플릭스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아이디어를 자신이 완전하게 장악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해줄 최선의 포맷이라는 확신과 신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더 킬러>를 넷플릭스로 가져온 건 그가 15년 넘게 품고 있던 이 기획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었는가와, 아울러 미디어 환경의 지형도가 급변하는 위기 속에서 도리어 그동안 해볼 수 없었던 것을 실현할 기회를 본 한 창작자의 기민함을 증명한다.


 

‘멋진’(cool) 암살자 영화의 수법들을 모두 없애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빗 핀처, <프레드 필름 라디오> 팟캐스트 인터뷰 중

플롯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살인청부 의뢰를 받은 킬러가 의도치 않게 임무에 실패하고, 일을 망친 대가로 고용주로부터 쫓기는 상황을 그리는 범죄 스릴러. 동일한 유형의 플롯을 공유하는 장르영화는 시중에 수없이 넘쳐나서 대강의 줄거리를 듣기만 해도 어떠한 사건이 펼쳐질지는 다분히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이런 경우 서사가 주는 정보의 엔트로피는 0에 가깝다. 다음의 사건 전개가 충분히 예상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르를 다루는 창작자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사건의 전개를 비틀고 내막을 복잡하게 짜 넣음으로써 불확실성을 늘이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이야기의 틀을 과하게 벗어나게 되면 관객은 역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작품의 구성이 질서가 없이 난잡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핀처의 태도는 사뭇 양가적이다. 플롯이 갖는 장르의 기본적인 전형성에는 철저히 순응하되,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공식(formula)으로부터의 일탈을 감행해 관객의 기대를 어그러뜨리는 데서 오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다분히 모순병치적인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본인의 영화에 대해 핀처는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훌륭한 B급 영화 같다”는 다소 기묘한 표현을 쓴다.) 작중 킬러의 캐릭터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핀처는 “그는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다. <더 킬러>의 오프닝은 표적을 노리고 잠입한 킬러의 상황 한가운데로 관객을 초대한다. 그러나 본드가 작전을 성공시키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과 달리 킬러는 예기치 않은 실수로 대상의 제거에 실패하며, 우리는 액션 시퀀스 대신 독백의 보이스오버와 함께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정적이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는 킬러의 일상, 그러다 실수로 급작스러운 혼돈을 마주하는 그의 기분에 동참하게 된다. 


 

서스펜스와 음모가 있어요. 물방울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전 그런 영화를 좋아합니다.

마이클 패스벤더, <엠파이어>와의 인터뷰 중

 <더 킬러>에서 핀처는 물적인 규모의 스펙터클 대신 인물의 긴장된 심리를 전달하고 내면을 탐구하는 영적인 탐구의 여정으로 초대하는 도구로서 장르의 규칙을 비틀고 역전시켜버린다. 또한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처리할 뿐인 킬러의 동선을 카메라는 일일이 챙기듯 따라가며 좀처럼 말이 없는 인물의 행동에 깃든 세심한 디테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에는 핀처가 영향을 받았을, 고전이 된 다른 영화들의 그림자가 이따금씩 아른거린다. 고독한 킬러의 캐릭터와 그의 여정을 포착하는 담담한 터치는 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한밤의 암살자, 1967), 내러티브적인 의미 대신 행동과 사물의 물질성, 질료성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은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 킬러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그의 주관으로 초대해 몰입시키는 망원렌즈적 프레이밍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1954), 작업에 들어가기 전 가능한 철저히 준비를 갖추는 프로페셔널한 과정을 꼼꼼히 필기하듯 담아내는 과정은 (제임스 칸이 예행연습에 개조된 장비까지 주문해가는 각고의 노력 끝에 금고털이를 성공시키는) 마이클 만의 <도둑>(1981)을 연상시키는 면이 다분하다. 

플롯의 단순함은 영화의 형식미학적 측면과도 연결되어 있다. 핀처는 도식화된 서사 모델을 답습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 자체는 수월하게 따라가도록 한 대신, 매 순간 장면의 프레이밍과 음향효과, 필터의 선택, 컷의 연결, 씬의 리듬을 정교히 다듬는 편집광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다시 말해 <더 킬러>는 영화의 의미 정보를 고의적으로 빈곤하게 비워버린 대신, 반대급부로 미적 정보를 과포화한 수준으로 꽉꽉 채워 넣어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죽이고 연출의 기교에 빠져들도록, 즉 영화적 테크닉에 의한 시청각적 몰입감을 최대한으로 추구한 스타일리스트의 영화이다. 단순한 예시로 킬러가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갈 때, 카메라는 일체의 떨림 없는 수평이동으로 인물의 동선과 시선방향을 따라가는데, 원경에 지나가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한) 비행기마저 타이밍을 맞춰 움직이는 데다 이륙하는 운동 방향도 마찬가지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전개되는 등, 사소하게 넘기기 쉬운 순간조차 프레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이미지너리 라인(imagenary line), 이동축과 회화축이 딱 맞아떨어지게 만들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핀처의 연출관이다.

이런 통제광적인 집착은 마치 히치콕이 <현기증>(1958)에서 스크린 프로세스 합성이지만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박이 키스하는 순간에 맞춰 배경의 파도가 물결치도록 타이밍을 조정해 맞춘 걸 상기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118분의 러닝타임을 구성하는 1740개의 개별 샷들, 평균적인 숏 길이는 5.2초. 미끄러지듯 유려한 흐름의 시청각적 곡예로 관객은 거슬림 없이 편안하게 장면을 따라갈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몰입감의 이면에는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앵글의 컷들을 매끄럽게 이어 붙이는데 골몰하는 현란한 테크니션의 고집이 자리하고 있다. 중저예산 액션 스릴러에 그칠 법한 규모감의 영화에 1억 7500만 달러라는, <오펜하이머>(2023)의 바로 턱 밑까지 추격해오는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건 배우의 동선과 카메라 움직임, 구도와 사물의 배치가 정확히 일치될 때까지 재촬영을 밥 먹듯 하고, 후반 작업에서 가서도 인지하기 어려운 수준의 미세한 카메라 흔들림까지 디지털 스테빌라이저로 일일이 보정해 바로잡는 등, 원하는 형태로 완전하게 통제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세공력을 밀어붙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큐브릭마저도 아득히 넘어가는) 핀처 특유의 강박관념이 낳은 결과인 셈이다. <더 킬러>는 언젠가 히치콕이 ‘순수 영화’(pure cinema)라 지칭했던 시네마틱의 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데이빗 핀처, <가디언>과의 인터뷰 중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쳐들 수 있다. 이것은 스타일과 포즈만이 있는 공허한 껍데기인가? 분명 <더 킬러>는 한국의 이도다완 도예가나 스위스 시계공방 장인처럼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쉼 없이 작품을 깨부수고 다듬길 거듭하는 외골수 장인의 세공품이긴 하지만, 서사적인 차원에서의 내용은 빈곤해 보인다. 요컨대 ‘장인’의 영화일 수는 있지만 ‘작가’의 영화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과연 그러한가? 핀처의 영화경력에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 <세븐>(1995)이나 <조디악>(2006)처럼 폭력적인 상황에 연관되어 있고, 또한 <파이트 클럽>(1999)이나 <소셜 네트워크>(2010), 그리고 <맹크>에서처럼 고의적이거나 혹은 기질적으로 반체제적 내지 체제 부적응적인 성격의 반골이며,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에서처럼 기성의 질서를 외부인의 시선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아웃사이더들이다. 

이러한 필모그래피의 주제와 특징은 <더 킬러>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되어 있다. <더 게임>과 <파이트 클럽>에서 화이트 컬러 직장인의 권태와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한 핀처의 블랙코미디적 감각은 작중 킬러의 특징적인 행동 몇 가지에서 마각을 드러낸다. 패스벤더가 연기하는 킬러는 다양한 가짜 신분으로 발행한 여러 종의 신용카드를 번갈아 쓰면서 현대 자본주의 질서의 맹점을 유유히 교란하듯 돌아다닌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서는 빵을 버리고 패티와 야채 토핑만을 골라먹고, 독일인 관광객이나 쓰레기 청소부를 가장한 위장의 차림새로 감시 카메라의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하며, 에어비엔비로 빌린 방은 쾌적한 여행의 숙박이 아닌 암살 작전을 위한 무대 세팅으로 동원된다. 현대 소시민의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감 어린 태도는 <파이트 클럽>에서만큼 분노에 차있진 않지만, <더 킬러>에서도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그리고 유머스럽게 배어들어 있다.

<파이트 클럽>의 연장선상에서 <더 킬러>를 해석한다면, 우리는 챕터별로 구분된 영화의 공간학적 지형도를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과 <이창>에 대한 경의를 담은 오프닝의 파리를 벗어나 영화의 카메라는 도미니카의 은신처, 중개인이 있는 뉴올리언스의 변호사 사무실, 주변인을 습격한 두 암살자의 거주지인 플로리다와 뉴욕을 거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암살 작전의 의뢰인이 있는 시카고를 차례대로 옮겨 다닌다. 열대 휴양지의 인상이 강한 도미니카가 질서의 외부에 놓인 피안의 장소로서 밝은 톤의 영상으로 표현된다면, 미국 내의 도시들을 오가는 나머지 챕터의 공간들은 대부분 어두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칙칙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컬레 그레이딩이 잡혀있다. 야수처럼 거친 스타일과 완력으로 킬러를 압도하는 플로리다의 청부업자는 하위문화를, 틸다 스윈튼이 우아한 폼으로 소화하는 뉴욕의 공범은 여피족과 같은 중산계급의 라이프스타일을 각각 표상하며 극단의 대위를 이룬다.  

킬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도 아니다. 그의 정체성은 텅 비어 있어 공허하며, 그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로도 치환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익명성’이란 역설적이게도 현대 소시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속성 아니던가? 킬러의 발걸음이 시카고의 고층빌딩, 처음에 암살을 청부하고 나중에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반을 보낸 의뢰인의 펜트하우스에 이르는 순간, 영화의 체제 전복적 함의는 선명해진다. 가장 낮은 하청의 자리와 중간 관리자를 거쳐 최상층에 도달하기까지, <더 킬러>의 공간학적 지형도는 미국 사회로 대변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에까지 이르는 계급질서의 층위를 거슬러 올라가는 잠행의 동선으로 세팅되어 있다. 그리고 ‘익명성’의 소시민 중 하나로 가장한 킬러는 역설적으로 그 익명성에 힘입어서 자본주의 질서의 최정상부인 억만장자의 집으로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

의뢰인을 직접 마주하고 정체를 드러낸 킬러가 경고를 남기고 빌딩을 떠나는 장면은 다소 허무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영화의 중요한 의미를 완성한다. 펜트하우스에 침입하기 위해 킬러는 청소부의 키를 훔치고, 스포츠 센터의 회원으로 섞여 들어가 카드키를 복사한다. 현대의 소시민은 익명의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든지 될 수 있으며, 질서의 상부구조에 위치하는 최상류층의 삶도 사실은 하부구조의 소시민들에 의해 관리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주인은 자신이 노예를 지배하고 관리한다고 믿지만, 그들의 노동에 의지해 자기 삶의 편의를 누리고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일을 내맡길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 역설적인 종속 관계에 처한다. 킬러는 바로 그러한 질서의 맹점을 파고들어온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보복을 위해 돌아올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실은 체제에 대한 경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킬러>의 엔딩은 건물을 폭파시키지만 않을 뿐이지 <파이트 클럽>의 전복적인 함의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어찌 보면 <더 킬러>는 작품 내에서 반체제적인 인물을 고수하던 핀처가 작품 밖 현실에서도 할리우드라는 기성체제의 외부로 나가서, 내적 주제로서나 외적인 스타일과 작업 방식에 있어서나 그의 반골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결과물일 것이다. 핀처는 장르의 규칙을 교란하는 스타일리스트인 동시에 현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반감과 저항을 꿈꾸는 몽상적 저항가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의 작가의식이 넷플릭스의 돈으로 뒷받침되어서야 구현이 가능했다는 이 현실은 얄궂은 희극일까, 아니면 자본과는 불가분의 관계로 매일 수밖에 없는 영화예술의 근본적인 비극성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