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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이라는 불안, 출산이라는 단절에 대하여.〈십개월의 미래〉와〈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돌아보기

씨네플레이

 

* 이 글은 <십개월의 미래>와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혹자에겐 생명의 경이일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오랫동안 선망해 온 가족계획의 성취일 수 있겠지만, 어떤 임신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균열로 가득 찬 재앙일 수 있다. 오해하지는 말자. 우리는 지금 임신과 출산 행위 자체를 격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원하는 부부에게 임신은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모가 아이를 원한다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기쁜 일이다. 물론 제아무리 계획하고 바라던 임신과 출산도 육아의 영역에 들어서면 말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육아라는 장기적인 여정은 결국 부모의 희생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부터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까지 오랜 기간 TV에서는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방송들이 흥행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 영화계의 오랜 화두는 언제나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신체의 문제였다. 아녜스 바르다는 <행복>(1965)부터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 등 줄곧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종속과 억압, 특히 출산과 결혼제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1975)에서 고발되는 것은 가사 노동과 성 노동 등의 여성의 신체와 노동의 문제였다. 최근에도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을 각색하여 만든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2021)은 매우 치밀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임신 중절의 문제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최근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하나 감독의 <애비규환>(2020)은 예기치 않는 임신 이후 출산 5개년 계획을 세운 토일(수정)이 복잡한 가족의 형태를 거쳐 가면서 끝내 그 형태와 성립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허정재 감독의 <첫번째 아이>(2021)는 독박 육아와 경력 단절의 현실을 고발한다. 

지난 11월 15일 개봉한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비혼과 비출산을 고집하던 연인 재이(한해인)와 건우(이한주)가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맞이한 위기와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다 보면 2년 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남궁선 감독의 <십개월의 미래>(2021)이 떠오른다. <십개월의 미래>에서 미래(최성은)는 남자친구 윤호(서영주)와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혼란과 불안을 겪게 된다. 두 작품을 잇는 키워드를 따라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영화 너머의 문제들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출산이라는 단절

<십개월의 미래>의 미래는 촉망받는 스타트업의 메인 개발자다. 그녀의 프로젝트 덕분에 기업은 중국 진출을 노리게 되었고, 당연히 그녀는 회사의 중국 이전에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재이는 소설가다. 데뷔작을 좋은 평가로 시작했고, 차기작도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출판사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출간을 확정 짓는다. 반면 미래의 남자친구 윤호는 아직 투자 받지 못한 새로운 사업 아이템과 그래픽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재이의 애인 건우는 성실히 동네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5년간 일하며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지만, 원장의 분점 확장 계획에 원장으로 합류하라는 제의를 받고 고민이 깊어진다. 두 영화 모두 임신 이전 여성들은 촉망받는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가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반대로 그들의 애인은 불안정한 미완의 상태를 직면하며 웅크리고 기다리는 중이다. 당연히 미래와 재이는 임신과 결혼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보다 먼저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겪은 여성들의 삶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커플 모두에게 임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찾아온다. 재이와 미래는 10주 차가 넘어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부정의 시기가 지나면, 이들은 곧장 임신 중절을 위한 병원을 모색한다. 작가의 삶만으로도 벅차다는 재이와 중국 진출 후 더 큰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미래에게 원하지 않은 임신은 일종의 재난 같다. 하지만 건우와 윤호는 임신을 반기고, 중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애원한다. 자신이 더 열심히 일을 해서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는 말로 애인의 출산을 종용한다. 윤호는 디자인과 개인 사업을 접고, 건우는 고사하던 분점 원장직을 수락한다. 이들의 애원은 가부장의 성 역할에 자신을 충실히 투영하여, 웅크리는 삶을 바로잡겠다는 일종의 다짐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다짐을 위해 중절을 하려는 미래와 재이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 사이 미래는 임신으로 중국행이 좌절되고, 재이는 차기작에 집중하지 못하여 만족스럽지 않은 글을 쓴다. 물론 영화 속 남성들도 원치 않은 일을 맡으며 치열하게 살았노라 항변하겠지만, 미래와 재이의 경력은 임신으로 인해 종언을 맞이할 위기에 놓인다. 영화 속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에 이어, 그토록 두려워하던 커리어의 단절을 앞두고 있다. 

 

채식과 육식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재이는 시인인 선배를 따라 채식을 하고 있다. <십개월의 미래>의 윤호 역시 오랜 기간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 재이가 채식을 한 이유는 그 삶의 안정성에 있고, 윤호는 부모의 돼지 농장에 대한 트라우마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택한다. 두 인물은 모두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채식이 아닌 육식으로 향할 위기에 처한다. 재이는 건우의 어머니가 출산을 위해 육식을 종용하고, 윤호는 동업자의 사기로 내려온 아버지의 농장에서 부모로부터 육식을 강요받는다. 사회로 대변되는 부모 세대가 이들에게 가하는 육식에 대한 강요는 동일하지만, 이들이 맞이하는 결과와 그 과정은 서로 다르다. 재이는 끝내 육식을 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오로지 임신으로 인한 입덧이라는 호르몬 충동 때문에 갈비찜을 먹게 된다. 부모의 집에 내려와 식사를 하는 윤호는 자신의 입 앞에 고기를 들이미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며 끝내 거부한다. 그리고 이 역정으로 인해 식사 자리는 아수라장이 된다. 윤호의 폭력적인 면모를 강하게 경험한 미래는 이 일로 그에게 파혼을 선언한다.

채식과 육식이라는 문제는 두 영화에서 모두 임신 이후 찾아오는 삶의 강제적인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는 사회의 목소리는 육식을 종용하는 부모 세대의 행위와 공명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여성과 남성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 요구에 다르게 반응한다. 재이의 순응은 호르몬이라는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적으로 이뤄진다. 호르몬의 침공은 육식뿐만 아니라 글과 재이의 삶을 뒤흔든다. 책상 앞에서 손쉽게 글을 쓰던 작가 재이는 원치 않는 잠을 자야 한다. 재이가 불을 끄고 갈비찜을 뜯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 중 하나다. 영화는 재이의 앞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윤호의 저항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의 저항과 폭력의 기제는 곧 자신의 실패로부터 비롯된다. 동업자에 사기를 당하고, 원치 않은 아버지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다. 그마저도 윤호는 아버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 그의 폭력성은 아버지가 아닌 미래를 향한다. 미래가 윤호에게 결별을 고하자마자, 윤호는 이 애가 자신의 애가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그녀를 쫓는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가해지는 사회의 압력에 여성은 신체적인 부담까지 겪으며 자신이 지워지고 있다. 

 

코스믹 호러와 분기하는 파국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을 경험하게 된 미래를 축으로 작동한다. 영화의 ‘챕터’ 역시 그녀의 임신 주차를 기준으로 나뉜다. 출산이 임박할수록 미래를 둘러싼 상황은 더 급박하게 작동한다. 임신 초기에는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 만삭에 가까울수록 급격히 불어나는 복부와 달리, 상황은 점차 미래를 향해 수축되고 있다. 임신 중절을 시도하던 초반부 역시 시간에 촉박함에 쫓기기는 했지만, 윤호의 몰락, 미래의 퇴직, 육아에 시달린 강미의 공허한 눈빛, 아수라장이 된 식사, 그리고 윤호를 피하고자 노력하다 맞이한 교통사고. 임신 주차가 다가올수록 미래의 주변은 끊임없이 그녀를 향해 옥죄어 온다. 마치 임신이라는 불가항력적이고 대적할 수 없는 순간 앞에 놓인 미래의 무력감이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카오스’라는 태명을 지닌 아이는 그녀를 혼돈 속으로 내몬다. 그리고 카오스는 탄생한다. 영화는 카오스를 바라보는 미래의 얼굴로 끝난다. 마치 10개월의 소용돌이를 겪고 나온 미래의 얼굴은 코스믹 호러의 탈출구에 도달한 인물의 얼굴과 닮았다.

물론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두 연인 역시 불가항력적인 상황들 속에 각자의 최선을 다하지만 악화되는 삶을 겪는다. 하지만 <십개월의 미래>와 달리 영화는 재이와 건우의 연인 관계에서 시작하여 점차 두 사람의 서사를 분리하며 파국으로 도달한다. 임신 전까지 서로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연인은 임신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함께하지 않는다. 건우는 학원 분점 건설에 몰두하고, 가장으로의 책무 때문에 원장이라는 자리에 집착한다. 그 사이 재이는 호르몬에 지배된 신체와 자아를 위한 글쓰기 사이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점차 건우의 서사와 재이의 서사는 분기한다. 존경하는 선배 작가의 장례식장에 방문한 재이는 진통을 겪고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 자리에 건우는 없었다. 그 시간 건우는 자신을 토사구팽한 원장(오만석)에게 분노를 내비치고, 상해를 가한다. 건우의 머리에 아이는 이제 없다. 그 자리는 분점 원장직이라는 물신만이 가득하다. 사회와 몸 두 강압을 겪어내는 재이의 곁에 있겠다는 건우는 가부장의 사회가 내미는 물신의 유령에 홀려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두 인물이 교도소의 면회로 재회할 때, 더는 두 연인이 함께하는 담기는 일은 없다. 두 눈 사이에 하나의 직선은 사라졌고, 이제 너무 멀리 와버린 두 사람이 서 있다. <십개월의 미래>가 수축과 혼돈의 코스믹 호러라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하나의 직선을 두 동강 내버린, 건우의 연필과 맞닿아 있다.